우아한 스크립트체는 어떻게 역동성의 상징이 되었나? 2026.4

2026. 4. 30. 10:15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How Did Elegant Script Fonts Become a Symbol of Dynamism?

 

 

 

진정한 스크립트 활자는 20세기 중반에야 나왔다.<사진 1> 스크립트 활자(Script typeface)란 사람이 손으로 쓴 유려한 글씨를 인쇄용 활자로 만든 것이다. 20세기 전반기까지 활자란 납으로 만든 물리적인 형체를 갖는 가동활자였다. 오늘날의 디지털 활자는 물리적인 실체 없이도 인쇄가 되지만, 20세기 전반기까지는 인쇄를 하려면 무조건 물리적인 활자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목판 인쇄술과 달리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 인쇄술에서는 글자들이 독립되어 있다. 이것을 ‘가동활자(movable)’라고 한다.<사진 2> 활판 인쇄술에서는 독립된 가동활자들을 문장의 단어 순서에 맞게 조립한 뒤 인쇄를 한다.<사진 3> 이런 방식으로 인쇄를 하므로 낱개의 로마자 알파벳들이 선으로 연결되는 필기체는 가동활자로 만들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진정한 스크립트 활자는 금속활자가 아니라 사진식자기술이 나온 20세기 중반에야 출현할 수 있었다.

<사진 1> 스넬 라운드핸드, 디자인: 매튜 카터, 1966년. ⓒ daisychainstationery.com

 

<사진 2> 활자 하나하나가 독립된 활판 인쇄술의 가동활자(movable type). © Btr

 

19세기까지 스크립트 활자는 주로 동판에 새겨 인쇄했다. 영국의 서예가 조지 비컴(George Bickham, 1684-1758)은 매우 곡선적인 손글씨체를 개발하고 그것을 인쇄하려고 했는데, 독립된 가동활자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동판에 새겨 인쇄할 수밖에 없었다.<사진 4> 동판 인쇄는 목판 인쇄와 재료만 다르고 그 방법이 같다.

<사진 3> 인쇄를 하려면 낱개의 가동활자를 조립해 단어나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 G.Mannaerts

 

<사진 4> 스크립트 활자를 새긴 동판과 동판으로 인쇄한 글자

 

동판이나 목판 인쇄술은 한 페이지를 위해 새긴 글자들이 오직 그 페이지를 인쇄하는 데만 쓰인다. 다른 페이지를 인쇄하려면 또다시 글자들을 딱딱한 금속이나 나무 위에 새겨야 한다. 반면에 활판 인쇄술에서는 활자들이 독립되어 있으므로 조립과 해체를 반복하면서 같은 활자로 내용이 다른 수 백, 수 천, 수 만 페이지를 인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동판과 목판 인쇄술은 활판 인쇄술과 견주어 효율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인쇄 가격도 비싸다.


조지 비컴과 같은 서예가가 쓴 손글씨는 우아하고 고급스럽다. 이런 종류의 필기체를 ‘라운드핸드(Roundhand)’라고 분류한다.<사진 5> 라운드핸드의 둥글고 유려한 곡선, 그리고 금속활자로는 재현하기 힘든 아주 가는 선을 보면서 사람들은 우아함을 느꼈다. 라운드핸드를 포함한 스크립트체는 왜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보일까? 독립된 활자들은 직선이 많다. 직선으로 글자를 그리려면 반드시 어느 지점에서 선은 멈추고 꺾어야 한다. 반면에 손으로 쓴 스크립트체는 모든 알파벳을 연결해야 하므로 자연스럽게 곡선이 지배적이다.

 

<사진 5> <만능 필경사>, 디자인: 조지 비컴, 1740-41년. 스크립트 체의 일종인 라운드핸드로 인쇄되었다. Public domain

 

그리고 글자들은 끊기거나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사람들은 이처럼 딱딱하게 꺾이거나 끊어지지 않고 곡선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형태나 동작을 보면 우아하다고 느낀다. 우아함이란 아마도 백조나 학과 같은 새의 길고 부드럽게 휘어진 목선, 잔잔한 물 위를 흔들림 없이 이동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다. 발레는 그런 우아한 새의 동작은 모방한 것처럼 보인다. 유럽의 귀족들은 거칠게 행동하는 하층민과 달리 부드러운 발걸음과 행동을 연습하면서 우아함을 체득했을 것이다. 느리고 부드러운 몸의 움직임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하층민과 자신들을 구별해 준다. 그런 몸짓을 세련되다고 여겼다. 그것을 글자의 모양으로 재현한 것이 스크립트체다. 스크립트체는 18세기부터 우아하고 세련되며 고급스럽다는 기호를 획득했다.


그리하여 돈을 좀 들이더라도 고급스러움과 품격을 표현해야만 하는 분야에서 라운드핸드를 포함한 다양한 손글씨체, 즉 스크립트 활자를 이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증권, 비즈니스 카드, 초대장 등이 그것이다.<사진 6> 이런 현상은 오늘까지도 이어졌다. 이제 디지털 서체로 인쇄를 하므로 과거 동판으로 인쇄할 때처럼 비싸지도 않다. 하지만 여전히 초대장, 초콜릿이나 쿠키의 패키지, 패션 매장의 간판처럼 우아함과 세련됨, 고급스러움을 표현하려는 목적에 부합한다.

 

<사진 6> 트레이드 카드, 18세기. Public domain

 

<사진 7> 투스칸 스타일로 디자인된 뉴욕 자이언츠의 저지 로고, 1930년대. Public domain / <사진 8> 이니셜로 디자인한 시카고 컵스의 저지 로고, 1920년대. 사진출처: baseball.org / <사진 9> 모노그램으로 디자인한 뉴욕 양키스의 저지 로고, 1930년대. Public domain

 

<사진 10> 스크립트체로 디자인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저지 로고, 1930년대 / <사진 12> 브루클린 다저스의 스크립트 로고, 1950년. © 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 / <사진 15> 15 베이스볼 스크립트로 디자인한 베네수엘라 대표팀의 저지 로고. © Latinos en Pelota

 

20세기 전반기 미국에서는 스크립트 서체가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바로 야구팀의 유니폼 로고에 적용된 것이다. 20세기 전반기까지 메이저리그 야구팀의 저지에는 굵은 투스칸 스타일 레터링이 많이 새겨졌다.<사진 7> 투스칸 스타일은 미국 서부개척시대를 대표하는 서체였다. 한편 왼쪽 가슴에 글자 하나나 뉴욕 양키스처럼 모노그램 형식으로 디자인하는 사례도 많았다.<사진 8, 9> 그러다가 1930년대부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같은 팀들이 본격적으로 스크립트체를 유니폼 저지에 적용하기 시작했다.<사진 10>


그렇다면 왜 스크립트체를 적용했을까? 첫째, 스크립트체를 적용하려면 기술이 전제되어야 한다. 두께가 얇고 휘어지는 글자를 직물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는 마치 19세기 활판 인쇄술에서 스크립트체를 가동활자로 만들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1920년대에 들어서 자동 자수 기계와 펠트지 커팅 기술이 발전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이런 글자들은 대개 펠트로 만들었는데, 펠트를 오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글자 굵기가 얇으면 오리는 과정에서 펠트가 찢어지기 쉬웠다. 하지만 기계로 깔끔하게 오려내고 그것을 유니폼에 기계로 박음질을 하므로 굵지 않은 스크립트 글자도 쉽게 부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 11> 스크립트체와 스우시를 결합한 시카고 컵스의 저지 로고, 1930

 

둘째, 20세기 전반기에는 스크립트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끄는 서체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스크립트는 세련되고 품격이 있어서 신뢰를 주었다. 필기체 형식은 서명의 글꼴이어서 ‘신뢰’라는 의미와 연결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스크립트체가 시각적으로 역동성을 준다는 점이다. 이때 글자는 수평이 아닌 약간 사선으로 디자인하는데, 이 역시 스포츠의 역동성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사진 13> 베이스볼 스크립트로 디자인한 한국팀의 저지 로고들 © prospecs.com

 

그리고 ‘베이스볼 스크립트(baseball script)’라는 하나의 범주를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스타일이 등장했다. 그것은 스크립트 글자 밑에 스우시로 마치 밑줄을 치듯 장식한 것이다.<사진 11> 스우시(swoosh)는 ‘휙’하고 빠르게 공기를 가르고 지나가는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이자, 그런 움직임이나 동작, 속도감을 표현한 의태어의 느낌도 있다. 우리에게는 나이키의 스우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크립트 글자 밑으로 스우시를 넣자 스포츠의 역동성이 더욱 살아나는 듯했다. 그리고 1938년 브루클린 다저스가 스크립트 글자와 스우시를 결합한 로고를 발표했고,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사진 12> 브루클린 다저스의 로고가 널리 알려지면서 더 많은 팀들에게 이런 저지 로고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스타일의 저지 로고가 많아지면서 ‘베이스볼 스크립트’라는 범주로 분류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서 스크립트는 과거 우아함과 세련됨보다는 던지고 치고 달리는 야구의 격렬함과 역동성을 상징한다.

 

<사진 14> 미국 대표팀의 저지 로고


최근 끝난 월드 베이스 볼 클래식에서도 베이스볼 스크립트를 적용한 팀을 볼 수 있었다. 한국, 이탈리아,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이상 다섯 팀이다.<사진 13> 오히려 미국 팀은 자신들의 전통을 깨고 코퍼플레이트 고딕 서체로 디자인했다.<사진 14> 그리고 미국 전통의 베이스볼 스크립트 서체로 무장한 베네수엘라는 강력한 미국 팀을 이기고 우승했다.<사진 15>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