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디자인의 민주화는 어떻게 변질되었나? 2026.3

2026. 3. 31. 10:15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How Has the Democratization of Modern Design Been Transformed?

 

 

 

‘디자인’이라는 말은 누구나 쓰는 일상적인 단어다. 디자인은 삶의 아주 가까운 곳에 널려 있다. 우리 삶을 편리하게 만드는 온갖 도구들이 모두 익명의 사람들에 의해 디자인된 것들이다. ‘공기 같은 디자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디자인은 문명 세계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디자인을 약간 어려워하는 측면이 있다. 디자인은 뭔가 업그레이드된 사물에 쓰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디자인 가구’라는 말을 흔히 쓴다. 모든 가구는 디자인된 것인데, 디자인 가구는 도대체 무슨 뜻일까? 디자인 가구는 평범한 가구가 아니라 유명한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좀 특별한 가구라는 의미를 지닌다. 다른 말로 하면 디자인 가구는 ‘명품 가구’를 뜻한다.

<사진 1> 최초의 철교 아이언 브리지(The Iron Bridge), 디자인: 토마스 파놀스 프리처드, 1779년 ⓒ Tk420


현대문명의 도구들이 갖는 재료와 디자인은 20세기 전반기와 중반기에 걸쳐 일어난 모더니즘 운동에서 비롯한다. 모던 디자이너들이 꿈꾼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문명의 민주화다. 과거 어떠한 양식도 민주화를 꿈꾼 적이 없다. 고대의 고전양식부터 중세의 고딕양식을 거쳐 근대의 르네상스 양식과 그 변형인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양식은 권력을 강화하고 부유함을 과시하는 데 봉사했다. 오직 모더니즘만이 권력자와 부자가 아니라 서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디자인을 창조하고자 했다. 모더니즘이 선택한 기술과 재료가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대량생산기술과 대량생산이 쉬운 재료, 그리고 그러한 재료와 기술이 더 좋아하는 형태가 모더니즘 디자인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구체적인 사례로 한번 알아보자.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모던 디자인이 어떻게 서민과 멀어지고 다시 엘리트 계층의 삶의 공간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활용되었는지 살펴보자.

<사진 2> 19세기 가정의 부엌에 보급된 아이언 스토브 ⓒ Acabashi


모던 디자이너들이 선호한 대표적인 재료는 철이다. 건축재료로서 철은 나무나 돌보다 대량생산이 쉽다. 철은 처음에는 교량과 기차역, 공장과 같은 공공 인프라, 그리고 산업 건축물에 쓰였다.<사진 1> 철은 차갑고 기계적이며 산업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사무실이나 가정에는 적합하지 않은 재료로 여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장벽도 허물어졌다. 철은 일터(사무용 빌딩)와 가정 곳곳으로 퍼졌다. 합리성과 효율성이란 측면에서 철이 이익이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정의 실내에도 철로 만든 물건들이 보급되었을까?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9세기에 철은 난로와 라디에이터, 오븐, 욕조, 재봉틀과 같은 도구에 먼저 적용되었다.<사진 2> 이 도구들의 특징은 난방, 요리, 위생, 생산처럼 일과 관련된 일종의 설비들이다. 반면에 의자처럼 안락함을 주고 사람의 몸이 접촉하는 가구들은 여전히 나무와 직물로 만들었다. 가구는 설비와 달리 따뜻함과 안락함을 주어야 한다는 관념이 있으므로 철이 늦게 도달한 가정의 용품이다.

<사진 3> AEG 터빈 공장, 디자인: 페터 베렌스, 1908-09년 ⓒ Bodo Kubrak


철은 공장에서 규격화되어 대량으로 생산하기 쉽다. 이렇게 합리적인 재료가 사무실이나 가정으로 유입되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린 이유는 문화적 장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장벽은 상징성이다. 사무실이나 가정에서는 그 주체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 그것을 표현하는 문화적 관습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장식이다. 장식은 권력과 부의 산물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장식적으로 꾸미는 데 한계가 있다. 장식 행위는 높은 기술과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장식은 신분과 계급,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러니까 교량이나 기차역, 공장에는 그런 권위를 부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므로, 즉 문화적 장벽이 미약하므로 더 빨리 전해진 것이다. 공장은 공장주의 소유지만, 그곳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곳은 노동자의 일터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건물이나 시설부터 합리적인 재료가 먼저 퍼진 것이다. 왜냐하면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건축물은 건축주가 신경을 덜 쓰고 덜 간섭했으므로 훨씬 더 빨리 혁신적인 디자인이 적용될 수 있었다. AEG 터빈 공장, 파구스 구두 공장이 대표적인 사례다.<사진 3> AEG 터빈 공장을 디자인한 페터 베렌스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독일 대사관을 디자인할 때는 권위를 표현하고자 관습적인 고전의 언어를 구사했다.<사진 4>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모더니즘은 과거 권력과 부자들의 양식과 그 출발의 동기가 달랐다.

<사진 4>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독일 대사관, 디자인: 페터 베렌스, 1912년 ⓒ public domain


르네상스 이후 바로코, 로코코, 신고전주의 건축과 인테리어, 가구는 장식적이다. 산업혁명 이후에 태어난 빅토리아 양식도 장식 과잉이었다. 그것도 합리적인 철을 이용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는 철이 가진 합리성이라는 성질과 잘 맞지 않는다. 그것이 조정되는 과정이 바로 모더니즘의 전개다. 19세기말 고전양식과 모더니즘 양식의 과도기에 해당하는 아르누보는 철을 이용해 장식성을 표현했다. 엑토르 기마르가 콘서트홀을 위해 디자인한 철제 의자는 곡선적인 식물 모양을 모방해 장식적이다.<사진 5> 이 의자는 철이라는 근대의 재료를 주물이라는 근대적인 대량생산기술로 만들었다. 하지만 근대적인 기술과 재료가 갖는 성질과 그것으로 표현한 디자인이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이는 마치 내연기관으로 가는 자동차가 마차를 흉내 내는 것과 그 태도가 같다. 또는 디지털 사진이 필름 사진의 아날로그적인 맛을 내려는 것과도 같다. 늘 새로운 기술은 처음에는 옛 기술의 외관을 모방하다가 시간이 흐른 뒤 자신에게 맞는 외관을 찾아낸다. 철과 대량생산기술 역시도 마찬가지다. 결국 바우하우스에서 철에 맞는 형태를 찾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B3 체어다.<사진 6>

<사진 5> 움베르 드 로망스 콘서트홀 의자, 디자인: 엑토 기마르, 1901년 ⓒ wright20.com


엑토르 기마르의 철제 의자와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B3 의자의 가장 큰 차별점은 장식의 유무에 있다. B3는 속이 비어 있는 강철관으로 뼈대를 만들었다. 이 강철관은 공장에서 규격화된 모양으로 대량생산되는 것이므로 합리적이다. 더구나 강철관은 엑토르 기마르 의자와 달리 간결하게 직선의 구조로 디자인되었다. 이 뼈대 구조로는 장식성을 부여하는 데 한계가 있다. 과거 양식의 의자들은 모두 등받이나 좌판의 면을 통해 장식성을 부여했다. 이런 면이 없는 B3는 투명하고 비물질적인 특성을 지닌다. 장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강철관 뼈대 사이에 걸쳐놓은 좌판과 등받이는 최대한 저렴하게 만들고자 바우하우스 텍스타일 공방에서 개발한 튼튼한 천으로 만들었다. 이 의자는 디자인으로 분명한 선언을 하고 있다. 장식을 필요로 하는 권력과 단절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규격화된 강철관은 대량생산되므로 가격 또한 합리적일 것이다. B3는 분명하게 서민과 노동자를 위한 디자인이다. 이로써 모더니즘은 계급성을 타파하고 보편성을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르셀 브로이어는 B3 이후 강철관으로 만든 다양한 의자들을 발표했다.

<사진 6> B3 체어, 디자인: 마르셀 브로이어, 1925년 ⓒ Tim Evanson


하지만 이 실험은 초기에는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혔다. 첫 번째는 대량생산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규격화된 강철관 자체는 대량생산이 가능하지만, 의자의 디자인대로 휘는 것은 당시 기술로는 자동화가 불가능하고 불량률이 높았다. 또한 깔끔한 용접도 쉽지 않았고 강철관의 표면을 크롬도금 처리하는 것도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디자이너의 바람대로 서민들과 노동자가 구입할 만한 합리적 가격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두 번째는 문화적 저항이다. 20세기 전반기 유럽과 북미의 가정은 여전히 나무로 만든 전통적인 의자를 좋아했다. 이에 따라 가격이 높고 아방가르드한 B3 의자는 모더니즘을 수용할 정도로 진보적인 지식인, 엘리트계층에서만 소비되었고 그 수는 극히 일부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강철관 의자의 실험은 결국 대중화되었다. 기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했고, 문화적으로도 장벽이 허물어졌다. 철골조의 고층 빌딩이 석재마감을 하지 않고 골조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디자인이 퍼지자 그 실내의 가구 역시도 변화해야 했던 것이다. 마차를 타던 귀족들이 처음에는 자동차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가 결국 마차를 버리고 자동차로 갈아탔던 것과 같다. 강철관을 뼈대로 한 의자가 처음에는 사무실과 산업현장에 파고들었고,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가정까지 보급되었다. 전후 모던 가구를 주도한 디자이너는 찰스와 레이 임스, 아르네 야콥센 같은 인물이다. 이들은 강철관 뼈대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합판을 결합했다.<사진 7> 바우하우스의 실험은 보완되었다. 임스와 야콥센은 실질적으로 합리적인 가격의 가구를 엘리트 계층뿐만 아니라 중산층과 노동자계층까지 보급할 수 있었다. 결국 모던 디자인의 민주화는 20세기 전반기의 실험시기를 지나 2차 세계대전 뒤에 꽃을 피웠다.

<사진 7> 시리즈 7 체어, 디자인: 아르네 야콥센, 1955년 ⓒ Holger.Ellgaard


20세기 후반이 되면서 이런 민주화에 금이 가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전반기의 모던 가구들이 여러 가구 회사에서 재생산되기 시작했다. B3를 비롯해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의자들은 1960년대 이탈리아 가구회사 가비나(Gavina)에서 생산되었다. 가비나는 B3 의자를 ‘바실리(Wassily)’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바우하우스의 교수였던 바실리 칸딘스키가 이 의자를 좋아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한다. B3라는 이름은 산업적이고 중립적이며 익명적이다. 이렇게 이름을 짓는 태도에는 그 의자에 어떤 명예를 부여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단순한 기호와 번호로 디자인한 제품에 순서를 매긴 것일 뿐이다. 그 가구를 쓰게 하려는 대상, 즉 서민이나 노동자계층에게 이름 없는, 하지만 괜찮은 의자를 보급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하지만 ‘바실리’라는 이름에는 다른 의도가 있다. 바우하우스가 실제로 운영되었던 1920년대와 달리 전후 바우하우스는 더욱 큰 명성을 얻었다. 이 학교의 주요 교수진, 발터 그로피우스,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라즐로 모흐이너지, 마르셀 브로이어 등은 모던 디자인의 거장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에와 같은 바우하우스의 교장 출신들은 과거 기득권 문화권력에 저항하는 처지였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당당히 권력의 자리에서 오히려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B3라는 무미건조한 이름을 ‘바실리’로 바꾼 것은 이 의자를 산업적인 의자에서 끌어올려 모던 디자인의 아이콘이자 영광의 의자, 명품 의자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1960년대 이탈리아 가구산업이 지향한 것은 서민이나 노동자가 아니었다. 고가의 가구를 구매할 수 있는 부자들, 그리고 가구의 문화적 의미를 감상할 줄 아는 엘리트계층이다.


찰스 임스와 레이 임스의 가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원한 것은 대중적 보급이었다. 하지만 ‘임스’라는 디자이너의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모던 가구의 거장 임스 의자를 알아보고, 소유하는 것은 일종의 문화자본이 되었다. 그렇게 디자이너의 이름이 브랜드화되어 가구의 명성을 높인 사례로는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장 프루베, 아르네 야콥센 등 수없이 많다. 이 이름들은 가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그들의 이름으로 생산되는 가구들은 명품의 반열에 올랐다. 애초에 그들의 바람과 달리 가격이 높아졌고, 이에 따라 진품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가짜들이 더 많이 생산되고 유통되었다. 만약 진품 가구의 가격이 그렇게까지 비싸지 않다면, 가짜가 그렇게 많이 생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던 디자인의 민주화가 맞이한 변질이고 아이러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디자인’이라는 말까지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대부분의 물건들은 익명의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것이다. 하지만 ‘디자인 가구’라고 말할 때는 이른바 거장이 디자인했다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어느 순간 디자인은 다시 부자들과 엘리트계층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수단이 된 것이다. 마치 과거 양식을 창조한 예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