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순위로 매길 수 있을까? 2026.9

2026. 9. 30. 10:20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Can Beauty
Be Ranked?

 

요즘 영화 <오디세이> 인기가 폭발적이다. 영화 <오디세이>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지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중 후반부인 <오디세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이고, <오디세이>는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이 대서사스의 출발은 ‘파리스의 심판’이다. 인간 영웅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성대한 결혼식을 열고 올림포스 신들을 초대했다. 하지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이 초대를 받지 못했고, 에리스는 불화의 여신답게 불길한 쟁점을 결혼식 연회장에 남긴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황금사과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은 누구인가? 여신들이 서로 자기가 그 황금사과의 주인이라고 다툴 것이 아닌가. 제우스의 아내이자 권력의 여신 헤라, 지혜의 여신 아테나,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서로 자기가 사과의 주인이라고 요구한다. 이 판단을 누군가 해야 하는데, 신들조차 꺼린다. 그리하여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그 심판권을 넘긴다. 이때 세 여신은 자기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뽑히기를 간절히 바란 나머지 파리스에게 뇌물을 주려고 한다. 헤라는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을 주겠다고 하고, 아테나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술적 지혜를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참으로 각 여신의 성격다운 뇌물이다. 파리스는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아프로디테를 황금사과의 주인으로 만들어준다. 그런데 당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는 유부녀였던 것이 문제였다. 그는 스파르타의 왕비였고, 파리스가 왕비를 트로이로 데려가자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가 10년간에 걸친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거대한 불화, 참혹한 전쟁과 비극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에서 비롯했다. 이 의문이 정당한 것이 되려면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바로 ‘최고의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사람들 머릿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아름다움의 개념에 대해 집요하게 연구했고, 그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최고의 아름다움, 또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관념은 유럽인들이나 동아시아인들 모두가 가지고 있었던 거 같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절(絶)’은 ‘끊는다’는 뜻이지만, 확장하여 ‘세상에 견줄 것이 없이 유일하다, 즉 최고다’라는 뜻을 가진다. 절세가인, 절경(絶景), 절대(絶對) 같은 단어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 아름다움의 기준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두리뭉실한 표현이 많다. 예를 들면 명모호치(明眸皓齒), 아미유요(蛾眉柳腰) 같은 묘사다. 번역하면 ‘서글서글한 눈매, 깨끗한 치열’, ‘초승달처럼 완만하게 굽은 눈썹, 잘록한 허리’다. 비유적인 표현도 많다.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은 폐월((閉月), 즉 “달도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묘사한다. 유럽인들도 문학에서 비슷한 표현으로 미녀를 느슨하게 또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움이 어떤 현상에서 오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연구했다. 그래야 객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아름답다고 하면 사람마다 그 판단이 다양하고 넓게 분포할 것이다. 진짜 최고의 아름다움을 선정하려면 그 기준을 개관화 해야 한다. 미의 기준이 주관적이라면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엄격하지 않고 굉장히 관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 문명의 출발인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아름다움의 기준을 객관화했을까? 그것은 바로 ‘수(number)’다. 숫자로 표현하는 것만큼 객관적인 것이 있을까? 예를 들어 남성 키는 183cm(르 코르뷔지에가 표준 인간의 키라고 정의)가 가장 아름답다고 정하면, 182cm나 184cm의 키는 덜 아름다운 것이 되고, 160cm나 2m 정도의 키는 덜 아름다운 정도를 넘어 아예 못난이 측에 들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한 아름다운 인체의 수란 독립된 팔 길이나 엉덩이 둘레, 키의 숫자가 아니다. 그 숫자는 비례를 따른다는 점에서 관계적이다. 특정한 숫자의 키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키와 신체 부위와의 비례가 아름다움을 만든다. 머리의 길이가 몸의 전체 길이에 1/8일 때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머리와 키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신체 부위들로 확대된다. 이상적인 팔의 길이나 허리의 둘레, 또는 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신체 부위들 사이의 관계가 올발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례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정의한 사람은 기원전 6세기의 수학자 피타고라스다. 피타고라스는 아름다운 화음은 수의 비례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하모니아(hamonia)’라고 했다. 음악의 아름다움이 조화로운 수의 비례에서 온다면, 그 아름다움에는 객관화할 수 있는 규칙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피타고라스의 하모니는 음악에 대한 개념이지만, 나중에 시각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들은 ‘쉼메트리아(symmetria)’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고대 그리스의 쉼메트리아는 오늘날의 시메트리(symmetry), 즉 대칭의 개념보다 훨씬 넓다. symmetria는 syn(함께, 서로)과 metron(측정, 척도)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함께 잴 수 있는 척도’ 정도지만, 진정한 의미는 ‘부분과 전체가 조화로운 비례관계를 이루는 상태’를 말한다.


이를 좀 더 학문적으로 정의한 사람은 기원전 5세기의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Polykleitos)다. 그는 <카논(Kanṓn)>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사라져 오늘날 전해지지는 않지만, 후대의 연구자가 폴리클레이토스가 말했다고 인용한 문장을 통해 그의 이론이 부분적으로 전해졌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모든 손가락과 손바닥 및 손목 사이, 이들과 팔뚝 사이, 팔뚝과 상완(팔뚝부터 어깨까지) 사이, 그리고 다른 모든 부분들 간의 비례”에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온다는 것이다. 그는 또 <카논>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아름다움은 많은 수를 통해 조금씩 이루어진다.”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되기도 한다. “잘됨은 많은 수를 통해 작은 차이로 이루어진다.” 그리스 원문을 어떻게 번역하든 폴리클레이토스는 신체의 여러 부분과 부분들, 그리고 부분과 전체의 수학적인 비례 관계로 인체의 아름다움을 정의하려고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쉼메트리아가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의 조화로운 비례라고 한다면, 카논은 쉼메트리아를 통해 이상적인 인체를 구성하기 위한 규범과 체계다. 폴리클레이토스는 조각가였으므로 자신의 손으로 쉼메트리아와 카논의 이론을 구체적인 물질로 구현할 수 있었다. 그 조각이 바로 유명한 <창을 든 남자 Doryphoros>다. 이 조각 역시 오리지널 작품은 사라졌고, 로마인들이 복제한 복제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사진 1>

 

<사진 1> <창을 든 남자>의 로마시대 복제품, 오리지널 조각: 폴리클레이토스, 5세기 ⓒ Paolo Villa

 

고대 그리스의 쉼메트리아와 카논의 개념은 신체뿐만 아니라 건축에서도 구현되고 있었다. 건축 역시 작은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 기술자들은 신전을 디자인할 때 칼럼의 지름과 칼럼의 높이, 칼럼과 엔타블라처, 엔타블라처와 페디먼트와 같은 부분들 사이의 비례를 조화롭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특히 건축에서는 모듈(module)이 비례의 중심에 있다. 칼럼의 지름이나 반지름에 따라 칼럼의 높이, 엔타블라처의 높이,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을 결정했던 것이다.<사진 2> 따라서 건축에서도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독립된 크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분들 사이의 비례가 중요하고 칼럼의 지름이나 반지름이 모듈이 되므로 그 길이가 달라지면 신전의 전체 크기도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칼럼과 엔타블라처의 구성 요소인 오더(order)를 올바른 비례로 만드는 체계가 바로 카논이다. 그러니까 건축에서도 카논은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의 조화로움을 만들어내는 규범으로 작동했다.

 

<사진 2> 칼럼의 지름을 1모듈로 해서 적절한 비례로 칼럼의 높이, 엔타블라처의 높이를 결정한다.

 

이런 이론에 전제되는 것이 있다. 바로 완벽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기원전 5세기의 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서 비롯한다. 플라톤은 사람이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물질적인 사물과 대상에는 궁극적인 이상형, 즉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데아는 사람이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한 곳에 있다. 현실은 그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침대의 이데아가 있고, 가구 장인이 만든 현실의 침대가 있고, 화가에 의해 재현된 침대의 2차원적 환영이 있다. 그렇다면 가구 장인이 만든 현실의 침대, 즉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다시 재현하고 모방하는 회화는 어리석은 짓이다. 조각도 마찬가지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 속에 존재하는 그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화가 제욱시스가 헬레네를 그릴 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완벽한 미는 하나의 존재에 있지 않다. 나는 이 다섯 명의 잠정을 결합하여, 이상적인 헬레네를 창조할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모델이라고 하더라도 이데아 개념에 따르면 반드시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섯 명의 모델에게서 이상적인 것들을 부분적으로 따와 완벽하게 아름다운 헬레네를 종합하고 재구성했던 것이다. 아마도 제욱시스보다 더 옛날 사람인 폴리클레이토스 역시 <창을 든 남자>를 조각할 때 모델을 똑같이 재현하지 않고 재구성하지 않았을까? 완벽한 쉼메트리아를 구현한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힘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왜냐하면 쉼메트리아는 일종의 수학적 이데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고대 그리스어는 칼로스(kalós)다. 칼로스의 개념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 개념 설명 중 “of fine quality”에 나는 주목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정제하여 다다라야 하는 일종의 목표가 된다. 칼로스는 ‘있는 그대로’만으로는 부족하다. 장인이 품질 좋은 가구를 만들려면 재료를 가지고 와서 끊임없이 다듬고 정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품질 좋은 가구의 어떤 이상형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리스어 칼로스의 개념은 하모니아, 쉼메트리아, 카논, 이데아 같은 개념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칼로스는 어떤 규칙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화로운 비례가 그것이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아름다운 여인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쉼메트리아의 원칙에 따라 부족한 부분이 시각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완벽함이 전제된 미인 대회의 성립을 가능케 한다. 미스 코리아나, 미스 유니버스와 같은 대회를 보면 수영복 심사가 있다. 왜 굳이 수영복을 입혀서 평가할까? 더 정확하게 평가하려면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옷을 입지 않아야 할 것이다. 유럽 회화사에서는 <파리스의 심판>이 수없이 그려졌다. 이 그림들에서 헤라와 아테나와 아프로디테는 언제나 벌거벗은 채 파리스 앞에 서 있다.<사진 3> 하지만 오늘날 TV로 방영하는 미인대회에서 옷을 벗길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인체의 비례 관계를 최대한 정확하게 심판해야 하니 몸에 딱 붙는 수영복을 입힌 것이다. 심사위원들의 머릿속 판단기준에는 뭐가 있을까? 어떤 잣대, 규칙, 규범, 즉 카논이 있는 것이다. 비록 ‘파리스의 심판’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고대 그리스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하모니, 쉼메트리아, 카논과 같은 개념이 정립되기 전에 만들어진 서사시다. 따라서 완벽한 아름다움, 그리하여 아름다움의 순위를 매길 수 있다는 관념과 태도를 가진 고대 그리스인들은 필연적으로 하모니, 쉼메트리아, 카논과 같은 개념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의 객관화를 이끌었다.

 

<사진 3> <파리스의 심판>, 그림: 페테르 파울 루벤스, 1632-35년 사이

 

한자문화권에서도 절대가인과 같은 말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객관화하는 이론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진짜로 모든 미인들 중에서도 1등을 가려 뽑아야 한다는 관념과 태도가 없기 때문이다. 유럽인이나 동아시아인 모두 시대에 따라 미의 기준은 바뀌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유럽인들은 늘 아름다움을 객관화려고 노력해 왔다. 그것이 오늘날 미인대회까지 만들어낸 배경일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와서 비로소 완벽한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은 위협받고 있다. 미녀의 기준을 전 세계에 수출했던 할리우드가 가장 먼저 그 기준, 즉 카논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다. 이번 <오디세이>에서 헬레나를 연기한 배우 루피타 뇽오는 흑인이며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미녀상과도 동떨어져 보인다. 미인 대회는 이미 인기가 사라진 지 오래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기준은 이제 느슨해졌다. 아름다움은 기준은 있겠으나 그것은 엄격할 수 없고 객관화하기도 힘들다. 완벽함이란 더더욱 불가능한 개념이다. 아름다움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시공간을 초월한 곳이 있지 않다. 아름다움은 현실 속에, 구체적인 사물들에 있으며, 곳곳에서 개별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한국말을 연구하는 학자 최봉영은 아름다움을 ‘자기다움에 이른 상태’로 정의한다. 아름다움은 ‘아름’과 ‘다움’을 합친 말인데, 아름은 공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한아름은 한과 아름을 합친 말인데, “두 팔을 최대한 둥글게 모아서 만든 둘레”라고 정의한다. 사람마다 팔의 길이가 다르므로 한아름의 크기를 수없이 많다. 이처럼 아름은 사적이고 주관적이다. 한국말 아름다움은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 수용적이고 관대하다. 아름다움은 모든 이에게 이미 존재한다. 그것은 어떤 기준에 따라 목표를 갖고 가꾸고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회귀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말 아름다움의 개념에 따르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선정할 수 있다는 관념, 즉 아름다움의 순위를 매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고마워 디자인』,『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