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활자는 왜 기하학적인 형태로 태어났나? 2026.10

2026. 10. 31. 10:15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Why did Hangeul typefaces emerge
in geometric forms?

 

한글날은 1926년 국어학자들이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하고자 만든 날이다.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 불러서 ‘가갸날’이라고 정했다. 1926년은 일제강점기여서 이 날은 단순한 기념일을 넘어 우리 글과 말을 지키려는 투쟁의 의미까지 갖는다. ‘한글’이라는 말은 1912년, 주시경이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배달말글명(배달말글모음)’ 강습원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글보다는 가갸글이라는 말이 더 널리 쓰였다. 1927년에 잡지 <한글>이 창간되면서 ‘한글’이라는 말을 보급하려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리고 1928년 제3회 기념식부터 가갸날이 아니라 한글날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시경은 순우리말 한이 고대부터 크다, 바르다, 하나, 임금/우두머리 등을 뜻한다고 말했다. 주시경이 1914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뒤 한글 운동을 이끈 최현배는 주시경의 뜻을 받들어 한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한글에서 순우리말 한은 ‘크다’라는 뜻이므로 한글은 ‘큰글’이라는 뜻이다. 한은 또한 ‘한가운데’, ‘한낮’의 용례처럼 ‘바르다’, ‘정확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세종대왕이 정한 ‘훈민정음’, 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순우리말로 계승한 것이다. 한은 또한 ‘하나’, ‘으뜸’을 뜻하므로 ‘세상에서 으뜸가는 단 하나의 글자’, ‘우리 겨레의 유일한 글자’라는 자긍심을 나타낸다.


올해 한글날이 제정된 지 101번째이고, 한글이 반포된 지 581년째 되는 해다. 한글은 전 세계 어떤 문자도 가질 수 없는 정확한 창제의 해와 반포의 날짜를 갖고 있다. 1443년 12월에 창제되었고, 3년 뒤 1446년 음력 9월 29일에 반포되었다. 문자는 대개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는 라틴 알파벳은 1,200년에서 2,000여 년에 걸쳐 진화 발전해 왔다. 이집트 문자에서 시작해 고대 시나이 문자, 페니키아 문자, 고대 그리스 문자, 에트루리아 문자, 로마의 라틴 문자로 정착한 것이 라틴 알파벳의 역사다. 페니키아 문자까지 라틴 알파벳과 아랍은 공통 조상으로 발전해 왔다. 페니키아 다음 단계부터 라틴 알파벳과 아랍어로 갈라졌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쓰는 한자는 1천6백 년에 걸쳐 조금씩 지금의 문자로 진화해 왔다. 한자는 심지어 20세기에도 해서에서 간체로 진화했을 정도다.


이와 달리 한글은 분명한 계획을 갖고 만든 문자이므로 어떤 조상도 없을뿐더러 정확하게 창제 해와 반포 날이 있는 유일한 문자가 된 것이다. 이는 한글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진화해 온 다른 문자들은 문자의 형태와 그 소리는 어떠한 연관성이 없다. 스위스의 기호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여기에서는 기호와 발음 사이의 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A라는 문자와 ‘에이’라는 발음 사이에는 어떠한 연광성도 없다. 수백 년에 걸쳐 진화하면서 우연히 발음과 형태가 연결된 것이다. 이를 ‘기호의 자의성’이라고 부른다. 기호는 계획이나 법칙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글은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만든 문자인 한글은 문자의 형태 하나하나를 만들 때 분명한 뜻을 갖고 만들 수밖에 없었다. 발성기관을 본떠서 문자의 형태를 디자인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금닛소리 ㄱ은 발음할 때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뜬 것이고, <사진 1> 혓소리 ㄴ은 발음할 때 혀가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사진 2> 혀의 실제 모양은 유기적이고 비정형의 형태다. 그것을 본뜬다면, 곡선의 문자가 탄생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직선의 기하학적 형태로 디자인되었을까?

 

문자는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그림이 아니다. 고대 이집트 문자나 한자도 처음에는 상형문자로 대상과 비슷하게 묘사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추상화되었다. 문자의 그런 속성은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이루어진다. 하지만 계획을 갖고 만든 문자인 한글은 그럴 필요가 없다. 처음부터 추상적인 형태로 디자인한 것이다. 따라서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수평선이 직각으로 꺾여 수직으로 떨어지는 모양으로 디자인한 것이다. ㄴ은 바닥에 누워 있던 혀가 잇몸으로 붙는 모습을 수평선이 지각으로 꺾여 위로 올라가는 모양으로 디자인한 것이다. 따라서 한글은 기호와 발음 사이의 긴밀한 연광성이 있다. 이를 한글의 연상성이라고 한다. 발음 기호의 형태를 보면 소리의 성질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기하학적인 형태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한글은 기본 자음에서 가획으로 비슷한 소리의 문자를 만든다. ㄱ에 수평선 하나를 추가하면 거센소리 ㅋ이 된다. 그렇게 ㄷ에서 ㅌ, ㅂ에서 ㅍ, ㅈ에서 ㅊ, ㅇ에서 ㅎ이 추가된다. 또 같은 자음을 반복하면 된소리가 된다. ㄲ, ㄸ, ㅃ, ㅆ, ㅉ이 그것이다.<사진 3> 기본자에서 획이나 형태를 추가하여 거센소리와 된소리를 만들어내므로 이 역시 기하학적 형태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모음은 이와 다른 원리로 만들어졌다. 모음의 기본 글자는 점과 수직선, 수평선이다.<사진 4> 점은 하늘, 수직선은 사람, 수평선은 땅을 상징한다. 곧 우주의 구성 요소를 모음의 기본 문자로 삼은 것이다. 이 기본자를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해 여러 소리를 나타냈다.<사진 5> 이 모음 역시 기하학적인 형태여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수평축 ㅡ, 수직축 ㅣ, 그리고 점을 모듈로 삼아 그 결합방식에 따라 수십 가지의 모양과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기하학적인 형태여야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뚜렷한 의도를 갖고 체계적으로 만들었으므로 한글의 문자 형태는 처음부터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훈민정음해례본>의 본문을 보면, 한자와 한글이 섞여 있는데, 두 문자가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사진 6> 한자는 붓으로 쓴 모양이지만, 한글은 자로 잰 듯 반듯하기 때문이다. ㅇ이나 ㅎ처럼 동그라미가 들어간 문자의 경우 컴퍼스로 만든 것처럼 정원에 가깝다. 라탄 알파벳 활자의 진화를 보면 15세기 로만체는 손으로 쓴 듯한 모양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기계적이고 딱딱한 모양의 모던 로만체로 변화한다.<사진 7> 로만체가 처음 등장한 뒤 300년이 지나서야 기하학적인 활자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400년이 지나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완전한 기하학적인 활자가 등장한다. 바우하우스에서 등장한 유니버설이 그것이다.<사진 8>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술을 발명하고 금속활자를 처음 만들던 그 시기(1450년대)와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서는 기하학적인 활자가 등장한 것이다. 목판본 <훈민정음해례본>의 글꼴과 금속활자로 만든 <월인천강지곡>(1447년경)의 글꼴을 보면 초기 한글의 강한 기하학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사진 9>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붓으로 쓴 것 같은 활자가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1455년부터 1461년 사이에 만든 을해자병용 한글활자다.<사진 10> 이 활자를 보면 세로획의 모음 윗부분에 부리가 있다. 부리란 획의 시작하는 부분에서 튀어나온 돌기나 삐침을 말하는데, 라틴 알파벳의 세리프에 해당한다. <훈민정음해례본>과 <월인천강지곡>의 한글꼴에는 부리가 없다. 즉 민부리 활자다. 그러다가 나중에 부리 활자가 등장했다. 부리활자가 등장했다는 것은 붓으로 쓰는 글자의 모양을 활자에 적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라틴 알파벳의 진화와 정 반대다. 라틴 알파벳에서는 세리프가 있는 활자가 먼저 등장했고, 300여 년이 흐른 뒤에야 산세리프 활자가 등장했다.

 

 

이런 한글 디자인이 가진 디자인적인 특징, 즉 처음부터 아주 기계적이고 기하학적 글꼴로 탄생해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손으로 쓴 듯한 붓글씨체로 진화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문자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분명한 목적을 갖고 디자인되었다는 점이다. 그 목적이란 무엇인가? 바로 글을 몰라 자기 뜻을 펼칠 수 없는 힘없는 민중의 고통을 임금이 헤아렸다는 뜻이다. 원래 권력자는 백성이 공부를 하고 지식이 늘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무식해야 더 쉽게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조선시대 초기에는 최고 권력자가 오히려 피지배층을 배려해 아주 쉬운 문자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이것은 기적과도 같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벌어질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정치, 경제, 사회, 기술의 발전은 자연스럽게 미래를 예견하게 만든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도 그것을 추동한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가 되어 더 많은 상인들이 자녀를 대학에 보내면서 책의 수요가 폭발한 것이다.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다. 따라서 유럽에서 활판인쇄술의 등장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고 필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구텐베르크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발명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계몽주의, 프랑스 대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산업혁명도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역사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 그런 사건을 주도한 인물은 사실 꼭 그 사람이 아니어도 누군가에 의해서 벌어졌을 것이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인물을 헤겔은 ‘세계사적 개인’이라고 불렀다. 세계사적 개인이란 역사의 진보가 쓰는 도구다. 그 도구는 꼭 그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이 어린 나이에 죽었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에서는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즉 역사의 진보가 도구로 이용하는 인물이 분명히 나타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스, 넓게는 유럽 사회가 그런 인물을 열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종도 그랬을까? 나는 그 점이 궁금하다. 15세기 중반 조선사회는 한글의 탄생을 열망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어 보인다. 당시 지배계층인 양반은 이미 한자만으로 그들만의 문자소통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고, 백성들이 똑똑해지는 것을 원할 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시 백성들이 제발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글의 탄생은 시대정신의 구현이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세종이 아니더라도 결국 누군가가 한글 같은 문자를 만들었을까? 만유인력, 자연선택, 증기기관, 전구 같은 과학적 발견이나 기술적 발명은 꼭 뉴턴이나 다윈, 에디슨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 의해서 발견되고 발명되었을 것이다.


한글도 그랬을까? 한글은 왠지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노력은 세종 이전에도 있었다. 이두와 향찰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만약 세종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맞지 않고, 거기에서 불편함을 느낀 지식인들 중에서 분명히 누군가는 어떤 문자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도 지식인층에서 한자, 그리고 ‘히라가나’라는 한자에서 형태를 따온 표음문자로 일본문자체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한자와 히라가나를 병기하는 일본문자체계는 복잡하고 어렵다. 한글처럼 완성도 높은 문자가 나오기는 쉽지 않다. 만유인력이나 자연선택은 과학적 진리이므로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기다린다고 볼 수 있다. 증기기관과 전구도 시대의 과학적, 기술적 진보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명될 만하다. 하지만 한글은 발견을 기다리는 진리도 아니고 과학과 학문, 기술의 진보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명될 만한 그런 성질의 것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한글의 창제는 기적과 같다. 나는 전 세계 다른 문자의 진화와 달리 기하학적 활자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 손글씨의 활자로 진화한 그 사실에서 한글이 기적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한글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문자체계처럼 어렵고 복잡한 어떤 문자체계를 힘겹게 익히고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글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높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고마워 디자인』,『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