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9. 30. 10:35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Jongmyo Shrine and Sulla-gil, Preserved by Restraint: Seoul’s Longtime Urban Planner
종묘다. 묵상의 공간이자, 조선의 정신이다. 왕조가 도읍을 정하면서 궁궐보다 더 중요시한 사당이다. 이는 단순히 제례 공간을 마련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엇을 가장 우위에 두고 숭상했는지 보여 주는 상징이다. 왕의 권력은 궁궐에 현존하지만, 그 권력이 가닿는 영역은 종묘가 결정지었다.
좌묘우사(左廟右社)는 도시구성원리뿐만 아니라, 통치 철학을 결정짓는 요소였다. 도성이 통치공간의 몸통이라면, 왕조를 규정짓는 심장은 종묘였다. 살아 있는 권력은 유한하다. 따라서 제아무리 위대한 왕이라도 선대왕들 신주 앞에선 시대의 짐을 짊어진 대리자에 불과했다. 그런 까닭에 종묘는 왕조를 지탱하는 공간이자 동시에 왕을 돋우는 터전이었다.
종묘는 화려하지 않다. 그런데 아름답다. 아주 오묘한 지점이다. 누구나 느끼듯, 이는 비워 냄의 정갈함이다. 정전 지붕의 긴 수평선, 단정한 붉은 기둥, 절제된 공간감은 무엇을 더하고 강조해 드러낸 아름다움이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걸 덜어내 끌어올린 품격이다. 누군가를 압도하기 위해 지은 건축은 더더욱 아니다. 경건함을 버리지 말고, 스스로 낮추라 다독거리는 건축이다.

종묘를 국가사당이나 세계문화유산으로 설명한다고 틀린 게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명의만으론 충분치 않다. 종묘의 본질은 결코 건축에 한정하지 않는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근본을 세운 방식이며, 권력이 역사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를 사적(史蹟)처럼 담아낸 공간이다. 종묘에 들어서면 누구나 경건해진다. 사당 건축이 주는 정갈한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늘 성찰하고 겸허해지라는 유교 철학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종묘는 과거 유산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지금도 살아 있는 오래된 질서의 증언자다.
조상에 예를 갖추고, 작금을 돌아보며, 지나간 시간을 회억하는 행위는 육백 년이란 시간을 넘어 종묘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큰 묵언인지도 모른다. 종묘에선 감탄보다 침묵이, 관람보다 경외로, 절제미에 감춰진 힘을 느끼는 곳이다. 그래서 묵상의 공간이다.


들어섬, 비움과 지켜냄
이 공간과 시설을 왕조는 어떻게 관리했을까? 한미한 가문도 족보와 사당을 지키려 진력한다. 그럴진대 나라의 근본이랄 수 있는 국가사당이야 오죽하겠는가. 종묘의 위상은 담장 안의 제례와 관리에 멈추지 않는다. 담장 밖에선 순라가 일상이었다. 가까운 우포도청과 연결된 도성 치안 체계의 범주에서 종묘와 그 주변이 특별 관리되었다.
종묘 순라는 그래서 별도의 거점, 이른바 간이 순라청으로 운영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그만큼 나라의 상징으로 특별 경비 시설이었다. 이곳에서 가까운 우포도청 영향으로, 도성 치안 체계에 따라 체계적으로 이뤄졌으리라 추정한다. 운종가 피맛길과 종묘 담장 밖의 동·서순라길은 이러한 도성 치안의 여실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운종가는 남쪽으로만 넓혀졌다. 따라서 다행(?)히도 북쪽 피맛길은 옛 그대로다. 단성사 자리가 우포도청 터다. 도성 동쪽 치안을 책임졌으니, 그 권한은 짐작할만하다. 우포도청에서 종묘는 걸어서 지척이다.
돈화문로를 사이에 두고, 극장을 대표하던 두 상영관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지금은 모습과 얼굴이 변했다. 청춘남녀의 발길이 들끓었을 피맛길엔 반짝이는 보석상도, 막걸리 흥건한 밥집들도 예전 그대로다. 피맛길 흥취 따라 걷는 맛은 여전하다. 그런 피맛길 끝자락에 ‘종묘시민광장’이 열려 환하다. 1967년 사진엔 꽉 차 있던 자리다. 1985년 공원이 되었다. 피맛길은 지적도에 흔적으로 남았다. 비워서 잘 지켜냈다. 그런데 이 공원 지하에 뜬금없이 대규모 주차장을 둔 건 무슨 연유일까? 너무나 이질적이고 생경하다.
동순라길
동순라길이 정겹다. 넓지 않은 길, 가운데 나무를 심어 더 그런가? 종로4가 못 미쳐 흔적만 남은 피맛길 옆으로 ‘종로성당’이 아담하다. 운종가에 늘어선 화려한 보석상들에 반해 더 예스럽고 단아한 맛이 엿보인다. 그러나 선선하고 아름다운 곳은 절대 아니다. 순례자 길이다. 가톨릭 박해 때마다 우포도청에서 순교가 있었다. 그런 연유로 가톨릭 서울교구는 여길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했다. 많은 순례자의 발길이 닿는다.
성당 옆으로 넓은 면적의 ‘세운스퀘어’가 있다. 맞은편, 운종가 생채기가 온전하게 이곳으로 옮겨와 앉았다. 세운상가 초입 ‘세운4구역’에서 쫓기듯 옮겨 온 시계 등 전문 상가가 입주해 있다. 비워진 세운4구역은 대안 설계도 여럿이다. 현 서울시장은 오래전부터 세운상가를 헐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바람에 동 하나는 이미 헐렸다. 헐린 양쪽으로 초고층을 짓겠다는 구상이다. 그 시작이 세운4구역이다. 도심 가까이 초고층은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그것도 전통 도심은 더더욱 그러하다. 이런 공간엔 오히려 낮은 건축물이 더 조화롭다. 욕망으로 짓자면 500층인들 성에 찰까. 논쟁거리던 종묘의 경관 문제는 차치하자. 그렇더라도 세운4구역 초고층 구상은, 묵상의 공간인 종묘에 너무도 무례하고 경박한 행위임이 분명하다.
조금 걸으니, 도로가 넓다. 2010년에 명명된 ‘김상옥로’다. 종로2가에 있던 악명 높기로 유명한 종로경찰서에, 1923년 김상옥 의사가 폭탄을 투하한다. 이후 며칠, 일본군을 괴롭히며 종횡무진 서울 한복판을 휘젓는다. 1천 명의 일본군에 포위되자, 효제동에서 권총 두 자루로 대적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의열단 단원으로, 공들여 일으킨 큰 재산 모두를 독립운동에 투여했다. 그가 마지막 포위된 효제동이 옆이라, 동순라길 닿은 길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김상옥로를 벗어나 종묘 담장을 따라가면 좁다란 골목 일색이다. 차 한 대 겨우 지날 정도의 도로는 그러나, 평온한 일상이 어우러지는 삶의 공간이다. 작은 카페와 물류 중계소, 작은 공방과 구멍가게는 변치 않는 소박한 우리네 얼굴이다. 묵상의 공간 종묘가 안겨준 또 다른 이면이다. 이런 공간이 서울 어느 구석엔가 남아 있어, 젊은 시절의 첫사랑처럼 풋풋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순라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는 본디 외가닥 좁은 오솔길뿐이었다. 그마저 광화문에서 돈화문까지다. 강제 병합된 1910년, 일제가 광화문에서 돈화문까지 도로를 뚫는다. 율곡로다. 1932년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급기야 돈화문에서 종로6가 사이마저 파내버린다. 창덕·창경궁과 종묘로 하나이던 언덕이 이때 무참하게 잘려 나간다. 만행이다. 이로부터 89년 후에야 터널화(2019)하여 언덕(2021)을 되메운다. 이로써 옛 순라길이 온전하게 이어지게 되었다. 궁궐과 종묘 사잇길을 걸어본다. 마치 신과 인간의 보이지 않는 권위 사이를 지나는 느낌이다. 사잇길이 끝나는 곳에서 서순라길이 시작한다.
길이 무척 정갈하다. 좌측 종묘 담장이, 공간을 장식하는 하나의 오브제 같다. 장식이라면 무릇 이래야 한다. 2층으로 이어진 오른쪽 집들과 서로 다른 듯 아닌 듯 어깨를 겨누는 사이좋은 이웃 같다. 1930년대 경성이 피식민지 공간이 아닌 낭만 가득한 자주독립국의 근대화 거리였다면, 여기가 그런 곳의 현시일까? 사시사철 얼굴을 달리하는 이 길에서 문득 방황하는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나고 있다. 그때처럼 젊은이들 밝은 얼굴이 이를 대변하는 중이다.

노포도 여전하다. 이야기가 깃든 먹거리를 소개한 만화에 등장했다. 반갑다. 홍어에 막걸리가 일품인 이 집 상호에도 길이름이 박혔다. 몇 년 전까지 이 집 단골이었다. 단골에게만 떠 주던 맑은술은 지금도 흥건한지? 가보지 못한 게 또 몇 년이다. 2층 오르는 삐걱거리는 계단은 안녕한지? 무심했던 미안함에, 그리고 살아남아준 고마움에, 그냥 걸음을 돌리고 만다. 소담스럽게 단장된 걸로 보아, 젊은이들 발길이 빈번하리라 믿어본다. 순라길은 그런 곳이다.
보행로가 반, 찻길이 반이다. 되도록 천천히 걷는다. 예쁘게 단장된 가게들을 눈으로 담아본다. 아련한 내 젊음처럼 오래도록 이 자리를 지키며 살아남길 염원한다. 한때 종로3가 홍등가의 중심이 이곳이었다. 종로3가의 봉익동이라 하여 ‘서종삼(徐鐘三) 이봉익(李鳳翼)’으로 희화화된 슬럼이었다. 1968년 대대적인 단속으로 급격히 축소되었지만, 흔적은 오랫동안 남았었다. 지금은 가히 상전벽해다.
종묘가 품고 있는 ‘절제의 미학’은 그 자체만은 아니다. 세계에 내세울 우리 문화재 이전에, 순라길로 남은 정갈한 공간을 지어냈다. 이런 경외감이 선한 영향력을 끝까지 끼치고 지켜지길 빌어본다. 묵상의 공간 종묘는, 그래서 노련한 서울의 도시계획가임이 분명하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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