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0. 31. 10:30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Following the watercourse that once flowed through Suseong-dong, Seochon
인왕산이 내어준 청정하기 그지없는 물이, 흐르는 소리마저 청아했나 보다. 대체 어느 경지였기에 저런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풍광이나 서정만 좇은 게 아니다. 청각까지 그랬다. 암반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이니 수성동(水聲洞)이다. 그러하니 보고, 듣고, 느끼며, 즐길만했으리라. 시인 묵객은 물론 풍류 꽤 즐긴다는 도성 한량들 놀이터였음이 분명하다. 조금 더 멋을 부려 옥류동천(玉流洞川)이다.
작은 물줄기 서넛이 모여, 창의문에서 발원한 백운동천(白雲洞川)에 섞여든다. 경복궁에서 흘러나온 물과 합수한 백운동천이 청계천으로 흘러드니, 도성을 적시는 맨 윗물임이 분명하다. 물의 합수처럼 옥류동과 인왕동을 합해 옥인동(玉仁洞)이다. 옥류동천을 덮고 지나가는 길도 옥인길이고, 통인시장을 지나면 자하문로7길이다. 큰길 두엇을 가로지른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살았던 터가, 경복고등학교 경내다. 망중한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독서여가도(讀書餘暇圖)’에 그려 넣었다. 그 집이 1730년대 후반의 ‘인곡정사(仁谷精舍)’다. 이 집에서 만년인 1751년, 벗 이병연의 쾌유를 빌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그렸다. 서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건 당대 권력가인 장동 김씨 집안과 가까워서다. 넉넉하지 못했던 그로서는 그 집안의 후의를 톡톡히 입은 셈이다.
겸재의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은 이곳 실경이다. 인왕산으로 드는 길 초입이다. 좁은 바위가 깊은 골을 낸 사이로 긴 돌다리가 걸렸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를 지으면서 사라진 풍경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파트를 헐고(2011) 보니, 겸재가 그린 진경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돌다리가 길쭉해서 ‘기린교(麒麟橋)’라 했을까.
여기서 시작된 옥류동천 물길이 죄다 복개되었다. 따라서 길 모양도 자연스러운 물흐름 그대로다. 1977년 지정된 ‘경복궁 고도지구’로 서촌은 낮고 정겨운 공간으로 살아남았다. 복개된 길은 서촌 일부분에 불과함에도, 이곳의 많은 이야기와 인물을 품고 있다. 그 길이 지어낸 공간은 어떤 풍경으로, 어떤 삶들을 품어 살아가고 있을까?

식민의 시공간
왕조시대엔, 왕족과 권문세가는 물론 중인의 공간이었다. 세종대왕 태생지가 통인동이니, 왕에 오르기 전 태종이 살았다고 유추할 수 있다. 영조도 왕제 시절 서촌에 살았다. 궁궐에 종사하는 기술직들도 많이 살았다. 그럴만한 게 왕조 법궁 옆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나라 권력엔 늘 변동이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세도정치’에 나라가 질식할 지경이었다. 왕과 왕족의 힘이 쪼그라들고, 몇몇 권문세족끼리 연합해 나라를 오로지 했다. 그중 최고가 서촌을 아우르던 ‘장동’ 안동 김씨 가문이다.
1910년 8월 22일, 남산 조선 통감부에서 이완용이 나라를 넘기겠다는 조서에 전권대신 자격으로 도장을 찍는다. 백성이 두려워 쉬쉬하다, 1주일 후인 8월 29일 공표한다. 망국이자, 국치다. 이를 주도한 이완용이 서촌에 살았다. 수천 평 옥인동 19번지 일원이 전부 이완용 소유였다. 외관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완용 옛집으로 오인되곤 하는 가옥이 19번지에 현존한다.
이완용보다 윗길인 친일파도 서촌에 살았다. 윤덕영이다. 순종 장인인 윤택영의 형이다. 친일에서만큼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이완용이 울고 갈 지경이다. 나라 파는 문서에 이완용이 도장을 찍었다면, 강제 병합 때 일제에 국새(國璽)를 갖다 바친 인물이다. 고종을 감시하며 능멸한 것도 모자라, 독살을 주도했다는 의심도 여전하다. 일본 귀족으로 임명되어 어마어마한 은사금을 받는다. 그 돈으로 서촌에 그야말로 호화저택을 짓는다.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1910년부터 꾸준히 매입한다. 풍광 좋은 넓은 땅을 갖게 되자, 프랑스 귀족의 별장 설계를 바탕으로 언덕 위에 저택을 짓는다. 10년 넘게 공사한 집에 자기 호 ‘벽수(碧樹)’를 붙여 벽수산장이라 했다. 단단한 지반 때문에 1935년에야 완공된다. 1940년에 그가 죽어버렸으니, 실제로 벽수산장을 누린 기간은 5년에 불과했다. 딸과 사위에게 지어 준 집이 현재의 ‘박노수 미술관’이고, 서울시에서 매입해 복원 중인 ‘윤씨 가옥’은 소실이 살았다던 네모진 한옥이다. 산장 뒤쪽에 99칸 한옥이 있었다고 하니, 가히 아방궁과 다름없다.

문학과 예술의 정반합
길이 정겹다. 이상(李箱) 생가도 그렇다. 허름함을 껴안은 아담한 한옥에서 야릇한 기품이 풍겨온다. 피식민지 조선인 1세대 건축사로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조선의 천재들만 다녔다는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화가 구본웅과 운명처럼 벗이 되어 그림에 빠진다. 보성고보에서도 붓을 놓지 않는다. 생계 때문이었을까, 건축과에 진학한다. 그린다는 행위에 대한 태생적 갈증을, 과연 건축설계가 채워주었을까.


보성고보 졸업 기념으로 구본웅이 건네준 화구상자가 ‘李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연유다. 재료 그대로 ‘자두나무로 만든 상자’다. 천재는 요절한다던가. 천재 중 천재였던 이상은 짧은 생을 불꽃처럼 살다 갔다. 그림은 물론 건축과 문학에서 독보적인 재능을 보였음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어느 날, 이상이 살았던 서촌 생가가 위기에 처한다. 뜻있는 시민들이 나선다. 헐릴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자, 집이 웃으며 시민을 반긴다. 3살부터 20여 년을 살았다니, 그의 생애 중 세상에 뭔가 내보이기까지 갈고닦은 터전임이 여실하다. 27살 짧은 생애가 유난히 빛나 보이는 건, 이 집이 내어준 자양분 때문일까.
자하문 옆 ‘윤동주문학관’이 새하얗다. 수도시설을 개조해 꾸민 문학관은 재생한 건축물로써 의의가 크다. 시인과 서촌의 인연이 발단이다. 1940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극심해지자, 후배 정병욱과 함께 누상동에서 하숙한다. 시인이 존경했다는, 소설가 김송 집이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때까지 2년 남짓이다.
연희전문 졸업(1941.12) 무렵이다. 틈틈이 써둔 시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 한다. 일제 탄압을 걱정하는 주위 만류가 거세다. 모두 시인을 아낀 마음에서다. 그때 원고가 같이 하숙한 후배 정병욱 손에 전해진다. 정병욱이 전남 광양 고향 집에 원고를 보관해 낸 일화는 눈물겹다. 우리가 시인의 시를 음미할 수 있게 된 연유다.
서촌엔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다. 무릇 ‘건축은 죄가 없다’라는 말을 신뢰한다. 앞의 이완용이나 윤덕영의 집도 마찬가지다. 그 집에 살았던 사람이 문제일 뿐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단칼로 자르듯, 그 누가 옳음(是)과 그름(非)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非를 非라 아니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상이나 윤동주와는 분명 다른 삶이었다. 노천명 시인의 생가 역시 서촌의 품 안에 있다. 그녀를 사모했다던 김기림이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이 여기서 찍혔을까.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시인’이었다. 일제 땐 친일 기자였고, 해방 후엔 대학 강사, 전쟁 중엔 좌파 문인에서 휴전 후 방송인이었다가 대학교수까지 역임했다. 길에 찍힌 그들의 발자국이 부디 밝고 곱기만을….

작은 위기
기실 서촌이 고도지구에 속하여, 재산권에 상대적인 제약이 가해진 건 주지의 사실이다. 1970년대 최고 권력자의 경호와 안전을 이유로 지구가 지정되었다는 주장은, 그냥 지나간 가십으로 남겨두자. 그 덕분에 이처럼 낭만적인 공간이 연출된 것도, 큰 몫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도시공간에서 필지와 도로, 그리고 재산권은 불가분의 관계다. 용적률로 환원되는 건축물의 높이에 대한 규제는, 도시계획 기법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토지나 건축물의 ‘소유자’의 권리와 이해관계에는 즉자적이어서다. 반대로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겐 전혀 다른 문제다.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불거지는, 일종의 풍선효과라 할 수 있다.
서촌은 그런 측면에서 이용자의 공간이라 할만하다. 낮은 건축선이 안온하다. 오래된 골목은 정겹다. 그래서 공간은 더욱 예스럽다. 품위와 낭만이 깃든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 연유로 서촌이 품어낸 공간의 가치는 한층 격을 더해 왔으며 앞으로도 배가할 것이다. 이런 순환적 관계가 결코 소유자에게 불리하기만 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정확하게 경복궁 고도지구가 2024년 처음으로 완화되었다. 그건 ‘몇 미터 높아진다 해서 뭐가 달라져?’라는 함의가 품고 있는 작은 위기라 생각한다. 소유자들의 오래된 민원은 결국 용적률이라는 욕망에 가 닿기 때문이다. 여기서 멈췄으면 좋겠다. 사직단∼창경궁까지 사직로와 율곡로 북쪽이 유사한 고도지구다. 북촌과 함께 어쩌면 가장 우리다운 공간이 서촌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우리다운 공간이라야, 가장 우리다운 건축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게 한옥이건 재생 건축물이건, 오랜 시간이 쌓여 만들어낸 가장 우리다운 길과 땅, 흐름과 공간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게 서촌이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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