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9. 30. 10:45ㆍ아티클 | Article/포토에세이 | Photo Essay
The Cross Resting on the Tile Roof
Walking Through Onsuri Anglican Church, Ganghwa
강화도 남쪽으로 길을 잡아 온수리 마을에 들어서면 풍경의 속도가 조금 느려진다. 번잡한 도로를 벗어난 자리에 낮은 지붕과 오래된 나무들이 이어지고, 그 사이에서 뜻밖의 건축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성당이라고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서양 교회에서 익숙하게 보아 온 석조 벽체나 높이 솟은 첨탑 대신, 우리에게 익숙한 기와와 처마가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지붕 위의 십자가가 보인다. 그제야 건물의 정체가 선명해진다. 대한성공회 강화 온수리성당(옛 성안드레성당)이다.
온수리성당을 바라보며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무엇이 서양 건축이고 무엇이 한국 건축인가’라는 질문이다. 외형만 보면 전통 한옥에 가깝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와 공간의 방향은 분명히 교회건축에 속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건축문화가 한 건물 안에서 겹쳐 있다는 사실이 온수리성당을 특별하게 만든다.
한국 성공회의 출발은 18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고요한(Charles John Corfe) 주교가 그해 9월 제물포에 들어오면서 성공회의 한국 선교가 본격화되었고, 강화도에서는 1893년부터 선교활동이 이루어졌다. 온수리는 강화 남부지역에서 성공회가 자리를 잡아가던 중요한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옛 성당은 1906년에 세워졌다. 다만 건립 과정에 관한 기록은 자료마다 강조하는 인물이 조금씩 다르다. 국가유산 관련 자료에서는 조마가(Mark N. Trollope) 주교와의 관련성이 언급되고, 온수리성공회 자체 연혁에서는 길강준(F. R. Hilary) 신부가 건축을 맡아 진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11월 30일에는 단아덕(Arthur B. Turner) 주교가 성당을 축성하였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한 사람을 설계자나 건립자로 단정하기보다, 당시 성공회 공동체가 새로운 예배공간을 마련해 간 과정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건물 자체가 그 시대의 선택을 가장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성당 앞에 서서 전체 모습을 보면 먼저 지붕의 비례가 눈에 들어온다. 건물은 9칸×3칸의 길쭉한 평면을 이루고 그 위에 팔작지붕이 얹혀 있다. 처마는 지나치게 높지 않고 건물은 수평으로 길게 뻗는다. 성당이라는 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강화의 어느 오래된 고택이나 관아 건축을 떠올릴 수도 있을 만큼 친숙한 실루엣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전통 한옥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예배를 위해 요구되는 분명한 방향이 있다. 성당의 긴 축을 따라 공간이 이어지고 그 끝에는 제단이 놓인다. 서양 교회가 오랫동안 발전시켜 온 ‘제단을 향하는 공간’이 우리 전통 목조건축의 ‘칸’이라는 질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온수리성당의 건축적 가치가 또렷해진다. 서양식 성당을 먼저 설계한 뒤 그 표면에 기와를 씌운 것이 아니라, 한국 목조건축의 구조체계 자체를 이용해 교회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외부에서는 읽기 어려웠던 구조가 드러난다. 건물은 2고주 5량가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부에는 높은 목재기둥이 두 줄로 이어지는데 모두 14개다. 이 기둥들은 단순히 지붕을 떠받치는 구조부재에 그치지 않는다. 반복되는 기둥 사이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이동하며, 내부공간에 일정한 박자를 만들어낸다.
건축에서 구조는 때때로 가장 강력한 장식이 된다. 온수리성당에서는 특히 그렇다. 별도의 화려한 장식 없이도 기둥과 보, 지붕틀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면서 공간에 깊이를 만든다. 성당 내부를 바라보고 있으면 서양 바실리카 교회의 열주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 재료와 결구방식은 분명 한국의 목조건축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이곳의 내부는 어느 한쪽의 건축으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 기둥이 만드는 ‘칸’은 한국적이고, 그 칸들이 향하는 목적지는 서양의 교회공간이다. 성당을 둘러보다 보면 옆에 자리한 종루에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간다. 이 작은 건축물 역시 온수리성당의 성격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아래를 통과해 성당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상부에는 종을 두었다.
흥미로운 것은 종을 걸기 위해 서양식 종탑을 별도로 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 전통건축에서 익숙한 문루와 같은 형식을 빌려 그 안에 교회의 종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담았다. 이러한 방식은 건축이 한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낯선 문화를 받아들일 때 반드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미 존재하는 공간의 문법 안에 새로운 기능을 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해답이 된다. 온수리성당은 그 가능성을 백여 년 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오늘의 성당이 1906년 준공 당시 모습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목조건축은 시간과 함께 움직인다. 비와 습기를 견디며 기둥은 약해지고 벽체는 손을 보아야 한다. 온수리성당 역시 오랜 기간 사용되는 동안 기둥 하부와 벽체 일부가 보수되었고, 조적재료가 새롭게 사용된 부분도 있다. 종루에도 여러 차례 손이 갔다.
문화유산을 바라볼 때 우리는 흔히 ‘원형’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실제 건축은 사진 속 한 순간에 멈추어 있지 않는다. 사람이 사용하는 한 건물은 끊임없이 고쳐지고 적응하며 다음 시대로 넘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온수리성당에 남아 있는 보수의 흔적 역시 이 건물의 역사다.

1906년의 시간만이 아니라 이후 이곳을 지킨 사람들의 시간까지 건축 속에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이다.
이 성당은 현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유산으로서 중요한 이유는 오래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 서양의 종교와 문화가 유입되던 시기에 외래의 건축형식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고, 지역의 재료와 기술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실제로 이곳을 찾아가 보면 그러한 역사적 설명보다 먼저 다가오는 것은 의외로 소박한 풍경이다.
성당 마당에는 거대한 기념건축물이 주는 위압감이 없다. 기와 끝에서 떨어지는 빛, 처마 아래 드리운 그림자, 나뭇결이 드러난 기둥이 주변의 마을 풍경과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성당은 자신이 특별한 건축물임을 크게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집처럼 마을 속에 조용히 앉아 있다.
한옥의 지붕 위에 놓인 십자가를 다시 바라본다.
처음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요소다. 하나는 오랜 시간 이 땅의 집과 사찰, 관아를 덮어왔던 기와지붕이고, 다른 하나는 바다를 건너온 종교의 상징이다. 그런데 백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두 요소 사이에서 더 이상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면 어느 한쪽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좋은 건축은 때로 둘 사이에 제3의 공간을 만든다.
온수리성당이 바로 그런 건축이다. 서양의 신앙은 한국의 지붕 아래 자리를 얻었고, 우리의 목조건축은 그 안에서 새로운 기능을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어느 한쪽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강화의 오후 햇살이 성당의 긴 처마 끝에 머문다. 낡은 목재의 표면에는 백 년이 넘는 시간이 보이고, 지붕 위 작은 십자가는 그 시간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온수리성당을 떠나며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본다.
그곳에는 동양도 서양도 아닌, 그렇다고 어느 쪽도 잃지 않은 한 채의 건축물이 서 있다.
건축이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를 이어주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온수리성당은 지금도 아주 조용한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다.


글·사진. 고수일 Go soo il
플러스 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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