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비평] 제따와나 선원불공(不空;amogha)의 드라마트루기 2019.1

2022. 12. 13. 09:46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ural criticism _ Jetavana temple Dramaturgy of Amogha

 

 

공간이냐, 시간이냐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집을 지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엮어서 짰다. 원시 인류는 나무를 세워서 구조를 만들고 거기에 짐승의 가죽이나 식물의 줄기와 잎을 덮어 거주했다. 나중에 동아시아에서는 이 전형을 이어 나가 ‘시간을 세우고 공간을 덮 는다’는 집의 철학을 확립했다. 가구식 구조의 가장 기본적인 구축법이 바로 기둥 을 세우고 서까래를 까는 일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시간을 세운다고 말한다. 그리 고 거기에 벽을 두르는 일을 했다. 시간(宙)과 공간(宇)이 결합해 집을 만드는 일 이다. 현대물리학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3차원공간과 시간의 차원을 더한 4차 원 시공간이라고 규정하기 훨씬 전부터 동아시아에서는 공간과 시간의 결합을 당 연한 것으로 파악했다. 『천자문』의 첫 문장이 말해주듯이 “하늘과 땅은 가물하고 누렇고, 우주는 넓고 크다(天地玄黃 宇宙洪荒)” 그리고 노자(老子)의 <도덕경 (道德經)>에서는 아예, 하늘과 땅을, 공간과 시간을 얽어버린다. 영화 제목으로 도 잘 알려진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말은 원래 ‘천구지장(天久地長)’이여야 문법적으로 맞는다. “하늘과 땅은 장구하다”는 뜻으로 天-久(오래다), 地-長(오 래다), 같은 ‘오래다’는 뜻이지만 구(久)는 시간을 뜻하고 장(長)은 공간을 뜻한 다. 그런데 <도덕경>에서는 공간과 시간을 서로 얽어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시공간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동아시아의 목조 가구식 공법은 이러한 세계관을 공통적으로 드러낸다. 조선집도 그렇다. 무엇보다도 대청마루의 단 아래서 올려다보는 천정의 서까래는 시간과 끝없는 하늘을, 공간과 드넓은 땅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집의 가장 특이 한 점은 기능에 따라 공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나눈다는 것이다. 하나의 공간을 시간에 따라 나누면서 공간의 기능이 변한다. 하나의 공간이 아침에는 식 당으로, 밤에는 거실이 되었다가 어떤 시간에는 서재가 되었다가 어떤 때는 침실 이 된다. 공간과 기능이 일대일 대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간과 기능이 관계를 맺 고 푼다. 그래서 공간은 시간과 얽혀 계속 변한다. 조선집의 이러한 특성은 오늘날 아파트에서도 지속된다.

 

 

 

가온의 드라마트루기

 

서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건축은 공간의 예술 일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세계 관으로 보면 건축은 시간의 예술이다. 공간은 변하는 시간에 따라 같이 변화하므 로 이렇다 할 대상으로 남아있게 되지 않는다. 계속 변하는 시간의 이름을 무엇이 라고 부를 수 없듯이 계속 변하는 공간의 이름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조선집은 서양의 집처럼 대상(object)이 될 수 없다.

가온건축이 시간을 바라보는 태도는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관점과도 다르고, 서양 의 그것과도 다르다. 그러나 분명 가온건축의 태도가 서양의 관점과 다르다는 점 은 분명하다. 가온건축은 시간을 철저하게 물리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벗어나 있고, 공간을 확정적으로 생각하는 서양건축의 사고에서도 벗어 나 있다.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벗어나 있음으로 해서 가온건축의 건축적 태도는 보다 정서적인 면에 치중해 있고, 서양건축의 사고에서 벗어나 있음으로 해서 가온건축의 물리적 형태는 확정적이지 않다. <금산주택>같은 경우는 <도산서당> 에 대한 오마주(Hommage)라서 그 형태가 확정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배경을 지우고 보면 그 역시 확정적이지 않다. 확정적이지 않다는 말은 우리가 특정한 형태요소가 주는 느낌을 표현할 때 흔히 쓰는 표현들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가온건축의 작업들은 그런 조형적 표현들보다 문학적 표현들이 더 적합하다. 가온건축의 작업들은 그 자체보다 관계속에서 도드라진다. 아무리 복 잡한 도심지나 전원주택 단지에 있어도 가온의 건축들은 고즈넉해 보인다. 자기 를 표현하지 않고 주변을 묵묵히 듣고 있다고 할까? 그 심심한 표정에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보면 비로소 속으로 웅얼거리고 있는 말소리가 들린다. 뭐라고 하 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조금 더 들어본다. 그러다 무엇인가에 마음을 빼앗겨 거기 정신을 쏟다보면, 그렇게 한참을 해찰이하다 보면 그 속엣말이 오히려 소음처럼 들리다가 거꾸로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해찰이가 된 것처럼 그때에야 들리기 시작한다. 가온의 작업들에서는 그런 흔치 않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운이 좋 으면 그 자리에서 아니면, 그 집을 나와서도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말을 기 억해 낸다. 아 이 말은 폐사지의 말이다. 그 지나간 시간을 새긴 홈들, 거기서 들려 오는 오래 묵은 시간들.

래서 가온건축의 형태언어들은 확정적이지 않다. 가온은 어느 장소의 시간들을 여기로 옮겨 와 심는다. 그게 그들의 건축이다. 그 시간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 들이 자기가 태어난 곳의 언어를 평생 가져가듯이 가온건축의 시간도 그렇다. 시 간이 형태의 자리에 대신함으로써 그들의 건축은 조형언어로 대신할 수 없다. 가 온의 건축은 드라마투루기(dramaturgy)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이 드라마트루 기가 깨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여지없이 물리적 형태가 조형언어를 갖 게 되는 경우다. 사람들은 비로소 그 형태를 보고 말문을 트겠지만 내면의 고즈넉 한 시간들은 텅 비게 된다.

 

제따와나의 시간

 

<금산주택>이 <도산서당>의 시간을 오마주했다면 <제따와나 선원>은 지금 남 아있는 그대로의 인도 스라바스티(Shravasti)의 <기원정사> 터와 경주 <황룡사 >터의 시간을 씨줄과 날줄로 엮었다. 스라바스티의 제따와나 터에 가면 수많은 벽 돌들이 기단 부분만 남아 있는 채 정돈이 되어있다. 그 모습은 마치 원래 그랬었던 것처럼 보이게 한다. 지금의 모습만 보면 당시에 지어진 건물들이 오롯이 서 있는 장면이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남아있는 수많은 벽돌 한 장 한 장이, 시간이 자신에게 준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듯이 새롭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황룡사>터에는 벽돌은 없다. 남아있는 것은 좌대로 삼았던 커다란 돌덩이들과 화강암 주초들이다. <기원정사>와 <황룡사>는 같은 폐허이지만 <기원정 사>는 잘 정돈된 벽돌의 폐허로 마치 원래 그렇게 계획되어진 풍요함이 있고, 황 룡사는 고즈넉하다. 거기에는 막강한 시간이 느껴진다. ‘우주홍황(宇宙洪荒)’에서 荒은 한 포기의 풀도 남기지 않고 무자비하게 존재를 쓸어버리고 가는 시간(宙)의 속성을 가르킨다. <황룡사>에는, 시간이 휩쓸고 갔고, 그것은 지금 당신이 서 있 는 그 자리도, 당신도 그 시간의 폭풍속에 있다는 걸 계속 주지시킨다. 거기에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말을 잃고 끝없는 상념에 사로잡혀 서 있을 뿐이다.

<제따와나 선원>의 40만장의 벽돌은 그렇게 고즈넉하게 서 있다.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는 <기원정사>를 재현했는데 구현 된 것은 <황룡사지>다. 선원은 세 가 지 층위로 구분되고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첫 번 째 마당은 그 다음에 펼쳐질 마당 들과 살짝 꺽여있다. 이 마당의 좌우에 배치된 벽돌군들은 너무 넓다 싶다가도 그 자리가 제자리인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만약 외부 바닥과 집의 벽의 재료가 이질재였다면 양상은 좀 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제따와나>는 벽돌 의 숲을 이룬다. 온통 벽돌이라서 바닥과 벽과 건물이 위상기하학적으로 변환하 는 것 같다. 그것은 입구에서부터 법당까지의 길도 그렇다. 그래서 <제따와나 선 원>의 주인공은 그림자다. 오직 그림자만이 이질적이다. 해가 황도를 따라서 움 직일 때마다 그림자는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은밀한 신호를 보낸다. 그것은 알 수 없는 기호다. 더군다나 이 공간의 채와 채에 들어가는 방법은 가운데 마당을 통해 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외곽으로 애둘러서 들어간다. 마당에 사람들이 야단법 석을 이뤄도 이 사뭇 다른 접근 방법은 가운데 마당을 불공(不空;amogha)한다. 불공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꽉 차있다는 말이다. 비어있음으로 꽉 찰 가능성이 더해진다.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헛깨비를 벗어 버릴 때 나는 우주와 하나가 된 다. 불가에서는 이를 흔히 고무풍선에 비유한다. 허공을 떠도는 고무풍선의 안은 사실 풍선의 바깥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풍선의 고무질 때문에 풍선의 바깥은 풍 선의 안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깨버리고 풍선의 안과 바깥이 같다는 걸 알 때 그것을 불공(不空)이라고 한다. <제따와나 선원>은 이 한 마디를 위해 존재한 다. 불공의 마당은 <황룡사>의 이야기를 <기원정사>의 벽돌로 세운 시간의 드라 마다.

 

 

 

 

글. 함성호 Haam, Seongho 본지 편집위원

 

함성호 본지 편집위원

 

1990년 <문학과 사회>여름호에 시를 발표. 1991년 <공간> 건축평론신인상. 시집으로 <56억 7천만년의 고독>, <성타즈 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가 있으며, 티베트 기행산문집 <허무의 기록>, 만화비평집 <만화당 인생>, 건축 평론집 <건축의 스트레스>, <당신을 위해 지은 집>, <철학으 로 읽는 옛집>, <반하는 건축>, <아무것도 하지않는 즐거움> 을 썼다. 현재 건축실험집단 대표

 

haamx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