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건축의 미부(美浮)- 두 사람의 작가 2019.4

2022. 12. 17. 15:42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Emergence of beauty in Korean contemporary architecture - Two artists

 


편집국장 註

 

1974년 10월 ‘월간 건축사’에 글이 하나 실렸다. 건축 작품이 정치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섰던 최초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던가 싶은 김수근의 <부여 박 물관>에 대한 일본풍 논쟁이었다. 논쟁의 발단은 한참 선배인 김중업의 언급에서 시작됐다. 한국 현대 건축의 시작점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일 본을 거쳐 배운 김수근과 유럽의 르 코르뷔지에 말년 3년을 같이 한 김중업의 논쟁이었다. 일본풍은 <왜색>이라는 자극적 표현 때문에, 독립된 지 얼마 안 된 우리 정서로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었고 사회적으로 파란이 일었다. 여러 사람들이 논쟁에 가담했었는데, 이런 논쟁이 단 몇 차례로 끝나고 이어지 지 않은 것은 우리 건축계를 위해선 안타까운 일이었다.

1974년 10월 ‘월간 건축사’에 글이 하나 실렸다. 건축 작품이 정치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섰던 최초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던가 싶은 김수근의 <부여 박 물관>에 대한 일본풍 논쟁이었다. 논쟁의 발단은 한참 선배인 김중업의 언급에서 시작됐다. 한국 현대 건축의 시작점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일 본을 거쳐 배운 김수근과 유럽의 르 코르뷔지에 말년 3년을 같이 한 김중업의 논쟁이었다. 일본풍은 <왜색>이라는 자극적 표현 때문에, 독립된 지 얼마 안 된 우리 정서로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었고 사회적으로 파란이 일었다. 여러 사람들이 논쟁에 가담했었는데, 이런 논쟁이 단 몇 차례로 끝나고 이어지 지 않은 것은 우리 건축계를 위해선 안타까운 일이었다.

원문을 거의 그대로 옮긴다. 다만 한자 표현이나 이해 어려운 문장은 다소 변환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보시길... 1974년 10월 두 귀화인의 논쟁 에 대한 학문적 비판글.


 

1940년대 박길룡씨의 간접문화시대를 어떻게 지양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상 오늘의 우리 작가에게 부과될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다. 그것은 비단 건축에 있 어서만 아니다. 모든 예술과 사회전반에 걸쳐 제기되어 왔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것〉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 것〉의 문제는 모든 유럽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제기 되는 현상으로써 일차적으로 그것은 〈유럽 문명에 대한 우리〉라는 자각으로부터 출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차적 문제의 제기가 1940년대의 박길룡씨는 일본을 통한 간접 문화라는 기형적인 공간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우리 것〉에 대한 정립은 우선 유럽문명에 대한 추체험(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의 체험처럼 느끼 는 일)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해방 후 외래문화의 수입선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결국 간접문 화가 직접수입의 형태로 바뀌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사태가 〈우리 것〉의 정 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뒤에 이야기 될 것이지만, 우선 유 럽문화의 추체험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생각된 다. 다만 이러한 기회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떻게 활용되어 왔는가, 또한 어떻게 활용되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김중업 씨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된다.

 

과연 김중업씨는 무엇을 가져왔으며, 어떻게 그것을 옮겨 놓았는가? 그가 도불 하여 르 꼬르뷔지에의 문하생이 된 것은 1952년이며 귀국한 것은 1956년으로 약 3년간에 걸쳐서 르 꼬르뷔지에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다. 만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꼬 르뷔지에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 현대건축의 정신을 충분하게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곳 현장에 서 왔다는 사실 하나만 으로 서도 충분한 흥미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출면점(出免点)에서의 조용 한 막상(膜想)〉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명 - 나 이전에 존재하는 대자연의 의지

그렇기에

사명을 위하여 창조되어야 하는 대자연의 소산

나는 고로 존재한다.

 

존재되기 위하여 〈나〉의 의지가 주어진다.

대자연과 〈나〉 - 인간의 에고(ego)

이 두 의지사이의

신비에 찬 에-코(Echo)

그것은 비극 이전에 위(魏)의 이전에

영겁을 동한 모든 것의 본원이리

 

생은 아름다운 것인 것을 생은 희열에 찬 것을 -

오로지 대자연의 의지를 탐낼 때 비극과 추가 있으리니

 

이 아포리즘은 그가 본질적으로 르 꼬르뷔지에의 원리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생명, 나 이전에 존재하는 대자연의 의지/ 대자연과 나-인간 의 에고, 두 의지사이의 신비에 찬 에-코/영겁을 통한 모든 것이 본원이리라/에 서 선언하고 있는 사상은 나(ego)가 모든 것의 본원인 대자연의 의지 속에 종속 되어 있다. 근대적 자아를 폐함으로써 얻어낸 아르누보의 예술원리 바로 그 자체 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대자연과 나와의 의지적 에-코를 말 할 때에 도 그것은 결코 대자연과 자아가 대등한 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더욱 자아 를 대자연의 의지보다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즉, 이 아포리즘에는 영감을 봉한 본원의 정체, 이른바 <없음 無〉에 대한 요해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없음 無〉에 대한 발견은 결국 근대합리주의적 자아를 버 리는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며, 이 지점에서부터 유럽의 정신은 현대라는 새 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건축에 있어서 이러한 정신을 선언한 것이 아르누보라면 우리는 김중업씨의 아 포리즘에서 간단없이 그것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아르누보의 테제는 헤겔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그것은 마루쿠제의 지적과 같이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했던 <이성>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말을 바꾸면 그것은 산업혁명이 후에 등장한 상업도시, 문화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아 르누보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공업도시형 문화를 예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이성>이 주도가 되었던 상업도시의 문화로부터 기계가 그 사회의 중심이 되는 공업도시, 이른바 기능적인 원리는 인간의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그것은 자연에 본원적으로 있어진 것. 즉 존재적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신즉물주의가 그것이다. 일찍이 이러한 원리는 비 유럽, 특히 고대 그리스나 아시아에 있었던 것으로 결코 아르누보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다. 다 만 그들이 자기시대의 새로운 비전에 그러한 낡은 시대의 원리가 맞았기 때문이 다. 우리는 인상파 시대의 화가나 아르누보의 예술가들이 반드시 지중해문화나 아시아, 아프리카의 토착문화에 그 영감을 얻어냈던 사실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 것은 <이성>, 이른바 <대자(對自, Fürsich)>의 노출이 없이 사회를 민주적으로 원만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원리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노력은 아르누보, 이른바 르 꼬르뷔지에,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기디온을 중심으로 하는 C.I.A.A.에 의해 건축적으로 활발하게 표현되었다. 즉 그것은 외형적으로는 재래적인 양식으로부터 기능적 상징주의로 완전하게 전환 되는 결과가 되었으며 구조적으로는 본원적인 <없음 無>, 이른바 기능적인 원리 는 가장 간명하게 효율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낡은 시대의 계층적 건 축 미학을 완전하게 청산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아르누보가 민주주의시대, 공업 화 시대, 국제화 시대를 열어놓았던 문화적 원동력이었다. 새로운 건축 미학을 펼쳐놓을 수 있었던 기능적인 원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르 꼬르뷔지에가 자기의 원리를 시적으로 표현하여 태양과 바람과 물이라 고 할 때, 그것은 연금술의 어떤 기본적인 재료이지 그 자체가 원리는 아닌 것이 다. 피카소나 쁘라크의 입체, 혹은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의 기본형태는 그것이 르 꼬르뷔지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금술 이전의 것이며 기본언어를 구사하는 자체(작품)가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구현되는 건축이 등장한다 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업 도시 문화의 실 현을 뜻하는 것이지만 존재론적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을 단순히 기계적 존재로 경화시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C.I.A.M 이후의 작가들이 예리하 게 지적하고 있고 또 스스로 지양하고 있으나 김중업씨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 이 상 언급하지 않아도 족할 것이다. 그럴 것이 김중업씨의 문제는 르 꼬르뷔지에 의 테두리에 한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말해서 김중업씨가 약 3 년간 르 꼬르뷔지에의 문하에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를 만나고 왔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김중업씨를 말할 때 이러한 눈으로 바라보아 야 한다.

 

흔히 김중업씨의 작품을 두고 전통적인 조형성이라거나, 혹은 민족적이라고 평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조형성이 인정된다면 김중업씨의 문제는 한결 복잡해지게 된다. 그럴 것이 본질적으로 아르누보의 기능주의라는 것은 민족성이나 지방성은 물론 고전적 장식성을 거부함으로써 인터내셔널 스타 일을 형성하는 것이다.

 

만일 자기의 작품을 스승의 정신, 기능적 원리에 의해 제작하였다면 결코 민족적 인 조형의 의식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의 작가정신과 본질적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적인 조형이 성립된다면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런 현상은 그가 르 꼬르뷔지에의 패반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주한 프랑스대사관 <김중업 건축사 작품>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헛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작품 <프랑스 대사관>의 지붕. 또 를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지붕이 가지는 장식성을 완전히 박탈하고 단순히 기본적인 포름만을 추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붕을 <떠받이式〉으로 만 들어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르 꼬르뷔지에게 있어서 그것은 기능적 원리를 상징화하며, 그 상징적 조형을 일 차적(자연적)인 것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말을 바꾸면 자기의 조형에 실존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적인 조형이 지붕이라는 것의 확대 로 대표될 수 있는 것인가?

르 꼬르뷔지에게 있어서 그것은 기능적 원리를 상징화하며, 그 상징적 조형을 일 차적(자연적)인 것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말을 바꾸면 자기의 조형에 실존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적인 조형이 지붕이라는 것의 확대 로 대표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김중업씨의 일련의 지붕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기능적인 조형성 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르 꼬르뷔지에의 시각으로서 우리의 지붕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우리의 지붕은 하나의 소재로서 쓰여진 데 불 과한 것이지 결코 우리의 지붕이 가진 예술성을 재생산한 것이 아니다.

그 단적인 증거로서 나는 상기한 그의 두 지붕이 우리의 미래적인 장식성을 완전 히 추상시켰다는 점을 들려고 한다.

김중업씨의 문제를 생각할 때 중요한 문제는 지엽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보다 근 원적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즉 그가 몰고 왔던 아르누보 양식 의 건축이 ‘우리의 도시에 그대로 이식되어도 좋은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물음은 앞에서도 제기되었던 것인데, 이는 건축이 단순히 물리 적인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서두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개인과 집단의 의식을 한정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즉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이 우리 도시에 이 식된다는 것은 곧 우리들의 도시가 산업형 도시에서 공업형 도시로 바뀐다는 것 을 뜻하며, 문화적으로는 계층에서 민주화, 획일화, 이성적인 것에서 다수(민상) 의 시대로 전환한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우리의 도시는 엄밀하게 말해서 아직도 농업형, 상업형, 공업형이 공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아직 우리의 도시는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 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르 꼬르뷔지에는 자기의 아포리즘에서 도시 계획 없이 새로운 건축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때 그가 말한 도시계획이란 무엇을 뜻 하는가? 그것은 공간의 변혁, 즉 새로운 개인, 새로운 집단의식을 형성한다는 것 을 뜻하는 것이다. 이토록 엄청난 혁신의 의지가 우리에게 있어보지 못했다는 것 은 어제 오늘 깨달은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주어진 한정 내에서라도 변혁을 시 도하는 것이 우리 작가가 처한 조건이라면 김중업씨의 의의는 매우 훌륭한 것이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이러한 부분수정은 오히려 한국의 건축 상황을 더욱 혼란하게 만드는 결과가 될 것이며, 설사 그것이 어떤 효용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여전히 비평적 대상으로서의 기능주의가 가진 안티 휴머니즘의 문제는 남는 것이다

 

CIAM의 해체가 아르누보의 패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변형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es)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변형의 모습을 바우하우스에서 본다. 어떤 의미에서 바우하우스는 아르누보와 표현주의의 결혼식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아르누보의 즉물주의에 표현주의 정신이 가미됨으로써 기능화시대가 만들어낸 창백한 분위기에서 인간 적인 것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그러한 작품들을 로에, 미로, 클레, 칸딘스 키에서 볼 수 있게 되지만, 예술은 도리어 당대의 유럽적인 위기를 더욱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까닭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왜 인간적인 것을 옹호하려던 예술이 도리어 비인간적인 것을 조장하게 되었는가. 이러한 아이러니는 본질적 으로 유럽의 예술이 가지는 자기모순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유럽의 예술 은 이미 기반을 상실한 곳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술이 결코 사회와의 결별에서 이루어지는 아니라는 원리를 재확인하게 되며 건축 에 있어서 공간개념의 도입이 없이 참다운 건축이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 닫게 해주는 말이 된다.

사실 바우하우스 시대의 유럽이란 자본주의 문화 최악의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 다. 그러므로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미국으로 옮겨갔다는 것은 자기 예술이 서식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우리의 눈은 미국 속에서 의 ‘로에’에게로 가게 된다. 그러나 당대의 미국은 본질적으로 얼마나 유럽과 다 른 것이었는가. 물론 미국에는 민주주의가 있었다. 그것이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등장하여 양극화되던 당대의 유럽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 만 미국의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유럽 전통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라이트’의 이야기를 해야 된다. 그는 유럽의 전통에 대해서 저 항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로에’와 ‘라이트’의 대비는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현대예술의 새 지평을 보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렇다면 ‘라이트’의 예 술이란 무엇인가. 아르누보의 시대를 존재적 실재의 탐구로 규정짓는다면 라이 트의 출현은 존재론적 실재의 탐구로 규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라이트의 아르누보가 가지는 인터내셔널 스타일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는 새로운 예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즉 그는 실재를 대상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자 기 안에서 구한 것이다. 아르누보의 실재가 <기능>이라면 그는 그러한 기능의 원리를 <자기 안에 있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라이트에서 있어서도 르 꼬 르뷔지에나 로에와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자아는 그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유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아르누보의 기능적 원리가 근대적 자아 즉, <이성>을 대신한 것이라면 ‘라이트’는 그 모든 것을 자기 안에 삼켜 버린다 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자기라는 것은 범아(Super Ego)이며 라이트에 게 있어서는 자연 즉, 자기와 자연과의 혼연의 상태를 뜻한다.

말을 바꾸면 아무것도 없게 하려는 상태, 그것이 라이트의 실재인 것이다. 작품으 로 말하자면 그것은 돋보이는 것(떠받이식)에 대한 숨기려는 경향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로소 공간의 사상을 그에게서 발견하게 되며, 건축이 점 존재로서 독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라이트의 유기성은 건축과 자연과의 관계, 즉 자연 환경과 건축과의 유기적 인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유기성은 결국 공간 개념의 중요성을 환기 시키는 것이었으며, 오래지 아니하여 도시 건축에 있어서도 공간 개념을 자각하 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트의 예술은 일본의 전통건축의 샘플 없이는 성숙되지 못하였다는 주장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 축적 전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일본 전통건축의 구법이었다. 이를 말하는 것 같다.)

 

김수근씨의 문제를 말하려고 할 때, 무엇보다도 라이트와 일본건축의 관계가 중요하다.

라이트가 일본건축의 샘플을 본 것은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때가 처음이고 직접 보게 된 것은 그가 제국 호텔을 짓기 위해 일본에 왔을 때였다. 그때 그가 일 본의 재래건축을 대하고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였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극단하 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가 일본 건축을 본 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말해온 유럽 예술사의 변천과정에서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의 건축이야 말 로 유럽예술이 앓고 있었던 병인을 치료할 수 있는 <그 무엇>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라이트의 사랑을 일본건축에서 재확인하게 된 것이다. 따라 서 그는 일본 건축이 지니는 체계를 만난 것이 아니라, 어떤 도시성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인상파 시대의 화가들이 호쿠사이를 만났던 것과 마찬가지다. 즉 호쿠사 이가 일본의 전부를 통시적으로 나타내는 화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부르노 타우트가 일본의 이세신궁과 계이궁(가쓰라리큐)에 보낸 찬사를 기억하 고 있지만, 그것은 동아시아가 아니라, 서구의 어법으로 만난 자기 확인의 기록이 다. 이점에 대한 반성은 보다 심각한 문제로 우리에게 제기되는 것이지만, 여기에 선 더 이야기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수근씨의 문제는 동아시아가 아니라, 서구의 문맥으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김수근씨의 세계에서 배어나오는 일본적인 것은 본래적인 일본이 아니라, 미국인 라이트나 독일인 타우트가 서구적 어법으로 확인한 새로운 예술 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령 피카소가 아프리카의 목각 인형을 자기의 어법으 로 재창조했다는 것으로도 능히 이해가 될 만하다. 아프리카의 목우를 소재로 만 든 피카소의 작품을 두고 아프리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김수근씨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 라이트를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김수근 예술의 토양은 요시 무라(吉材)와 일본건축이지만 그 예술의 발생법이나 어법은 라이트로 연결된 다.(*편집자주: 요시무라 준조는 김수근이 일본 유학당시 배운 스승)

이제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이 점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1960년에 당선된 그의 처녀작품 〈국회의사당〉은 바로 라이트의 어법으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 기 때문이다. 즉 땅속으로 기어들어가려는 납작한 형태(수평선)는 라이트의 〈숨기려는〉 어법으로 그것은 아르누보 계열의 〈돋보기〉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 이해 되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바와 같이 라이트의 그러한 어법은 자연 속 에 자기를 투기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자기를 비우고 자연성을 그 속에 채움으로 써 결론적으로 자기와 자연이 하나의 흐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우리는 존재론적 실재의 탐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김수근씨의 문제는 결국 존재론적 미학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존재론의 전개는 모든 대상을 <만남>의 시간으로 환원케 함으로써 대상 이 가지는 역사적인 현실성을 배제해 버린다. 그러므로 그 납작한 수평선의 미감 이 호쿠사이의 판화와 같다거나 혹은 계이궁의 형태와 같다고 지적된다 하더라 도 그것을 일본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낱 웃음꺼리가 될 뿐이다. 또한 작 품 <국회의사당>의 벽면은 계이궁의 검은색 기둥과 흰벽의 모티브가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점 또한 라이트가 즐겨 다루고 있는 몬드리안 스타일의 디자인과 같은 어법으로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 <국회의사당>은 유럽 예 술사의 문맥을 쫓아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 수근씨의 작품은 김중업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귀화인의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 김중업씨의 존재적 실재의 전개나 김수근씨의 존재론적 실재의 전개는 제들마이어가 지적한 것처럼 양극화의 현상으로 오로지 유럽 문 명이 낳은 비극적인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과거에 있어서는 그러한 양극화의 전통은 보기 힘들었으며 모 든 것이 중용을 이상으로 하였다. 이점은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계이궁이 나 이세신궁, 그리고 동조궁은 부르노 타우트의 지적처럼 그것이 각기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동시대적으로 하나의 체계 즉 아시아적 공 간 개념(만다라)에 의해 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즉 타우트가 동조궁(도쇼구)보다 계이궁이 더 훌륭하다고 주장한 것은 그들이 유럽적인 양극화의 발상법으로 재단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수 근씨의 예술이 결코 일본적인 것이 아니라, 유럽 귀화인의 것이었다는 사실에 더 욱 확증을 얻게 된다.

이러한 논법으로 작품 <부여 박물관>에 접근해 본다. 아니 작품 <부여 박물관> 은 그러한 문맥으로서만 작가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즉 그 작품에 나타난 이세신궁의 형태, 이른바 도리의 모티브도 앞에서 언급했던 작품 <국회 의사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현실을 배제하는 것 으로부터 출발하였던 유럽의 현대 예술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해 야 옳다. 말하자면 김중업씨의 <프랑스 대사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리> 나 <합장지붕>의 형태가 소재로서 징발당한 것이지 일본이라는 특수성이 표현된 것은 아니다. 이점은 역시 피카소와 아프리카의 목각인형, 혹은 마티스와 일 본 판화의 예와 다를 바 없다. 

 

부여박물관 <김수근 건축사 작품>

그러므로 <부여 박물관>에 대한 김중업씨의 비난은 외형적으로 보면 귀화인끼리의 싸움으로 보아야 하며 내용적으로는 로에와 라이트의 쟁점이 재연되는 것 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였다. 즉 <부여 박물관>에 대한 왜색시비는 예술에 대한 시비가 아니었으며 그럼으로 하여 작가와는 아무 런 관계가 없는 한낱 사회적인 사건에 불과했다. 그럴 것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 은 왜색이 아니라 바로 귀화인의 예술,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여 박물관>에 대한 김중업씨의 비난은 외형적으로 보면 귀화인끼 리의 싸움으로 보아야 하며 내용적으로는 로에와 라이트의 쟁점이 재연되는 것 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였다. 즉 <부여 박물관>에 대한 왜색시비는 예술에 대한 시비가 아니었으며 그럼으로 하여 작가와는 아무 런 관계가 없는 한낱 사회적인 사건에 불과했다. 그럴 것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 은 왜색이 아니라 바로 귀화인의 예술,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는 그러한 서구적 사회변천의 리듬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 므로 현시점에 있어서 국제주의적 예술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귀화인의 예술 이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김수근씨는 하나의 시대적 모순을 안고 건축계에 등 장하였으며 그러한 결과는 무단히 작가와 사회 간에 일어나는 특수한 마찰계수 를 의식하게 하였다. 그 실례를 들어보자.

작품 <국회의사당>은 라이트 어법으로 이해되는 작품이다. 즉 건축이 단순히 < 인간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그릇>이다. 그렇기 때문 에 그러한 그릇은 단순히 기능적인 그릇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존재론적 그릇이 자연환경과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환경이야 말로 라이 트에게 있어서는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영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이트의 작품은 미국의 기성도시에서가 아니라 초원에서 실현되기를 원하였으 며, 또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의 기성도시는 이미 자연환경이 깡그리 파괴되 었기 때문이다. 라이트 건축의 어법이 이러하다면 김수근씨에게 있어서도 마찬 가지다. 과연 작품 <국회의사당>은 자연과의 유기적인 조화라는 입장에서 합당 한 것이었는가. 또한 <국회의사당>이라는 주제가 본질적으로 라이트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던가. 만일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남산에 세워 진다는 것은 라이트의 어법과 모순된다. 그럴 것이 이 건축은 자연 환경 속에서 두드러지면 안 되는 것이며, 어디까지나 언덕 위에 외롭게 서 있는 하나의 거목에 그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남산위에 세워지는 작품 <국회의사당〉은 어떻 게 되는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김수근 씨의 예술이 일으키는 마찰계수를 측정 하계 된다. 즉 그의 예술이 라이트의 어법을 고수하는 한, 우리의 도시에는 그의 작품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글. 박용숙 Park, Yongsook 1974년 당시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