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 2019.6

2022. 12. 22. 10:35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그림 1) 도동서원에서 모든 건물은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다.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드디어 ‘한국의 서원’ 9곳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 재가 확실시되었다는 것. 조선시대 성리학의 전파를 이끌고 건축의 정형성을 갖 추었다는 점이 서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로 제시됐다. 한국의 서원은 유생들에게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삶을 가르치고자 했다. 그리고 제 향자의 정신을 건축으로 구현해 유생들이 공간 속에서 그의 삶과 사상을 체험하 게 했다.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이 ‘정신 위에 지은 공간’의 가치를 전 세계에 인정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서원 건축을 주도한 성리학자들은 서원을 단순한 교육 공간이 아니라 천인합일 의 경지에 이르는 수양처로 이해했다. 그들이 설계한 서원은 크게 유식과 강학, 제향 공간으로 구분된다. 유식 공간은 자연의 변화를 느끼며 심신을 이완하는 곳, 강학 공간은 경서를 탐독하며 심신을 긴장하는 곳, 제향 공간은 스승의 학덕 을 기리며 스스로 학문의 방향을 찾아가는 곳이다. 이 세 공간은 별개의 프로그램이 아닌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시스템이다.

 

유교에서 중용中庸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점을 의미한다. 이처럼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간 질서를 대칭 구조라 하는데, 사람의 골격과 같이 건축 공간 역시 중심축을 따라 대칭을 이루며 균형을 유지한다. 도동서원道東書院의 누각, 중문, 강당, 내삼문, 사당은 중심축을 따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게 줄 을 서고 있다. (그림1) 주요 건물이 중심축을 따라 대칭을 이루고, 좁은 길과 계단 도 축선에 놓여 이를 강조한다. 도동서원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중심축은 나머 지 여덟 개 서원에서도 나타나지만 그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기본적으로 중심축 을 따르지만 대지의 여건과 제향자의 사상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유연함이 한국의 서원 건축의 매력이다. 모든 터가 대칭과 중심축을 구현 하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중심축과 대칭을 무리하게 강요하면 오히려 어색해 질 수 있다. 한국의 서원은 산과 구릉이 많은 지형 조건에서는 개념적으로 중심축 을 받아들이되 부분적으로 축을 비틀고 깨뜨리며 조화를 꾀했다. 이렇듯 전체적 인 구도를 유지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축에서 자유로운 균형의 건축을 시중時中의 건축이라 부른다.

틀 속에서 변화를 수용하는 순간 공간에 생동감이 살아났다. 주변 환경에 맞추어 원칙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 람이 없다”고 하는 중中의 본래적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전체적인 구도를 유 지하면서 부분적으로 축에서 자유로운 균형의 건축, 시중의 건축은 한국 서원의 진정한 매력이다.

그림 2)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사방으로 트여 온몸으로 병산을 품는다.

지형 조건을 극복하는 누각_병산서원 만대루 (그림2)

 

누각은 선비들이 학문의 긴장에서 벗어나 자연을 바라보며 심신을 고양하는 유 식 공간이다. 주로 2층이며 사방으로 트여 주변 자연과 교섭하며 천인합일의 정 신을 함양한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의 만대루晩對樓는 이러한 누각 본연의 기능을 다할 뿐만 아 니라 불리한 지형 조건을 건축으로 훌륭하게 승화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병 산과 수 세기 동안 운명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병산서원은 강 건너 산 살이 막고 있어서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서원의 입지로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만대 루가 구조적, 공간적, 예술적으로 완벽하게 위치하여 이를 병산서원만의 독창성 으로 승화한다.

자연 축대 위로 웅장하게 선 만대루는 건물의 골격만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특별한 장식 없이 골격만으로도 담백하고 장엄하다. 거대한 붓으로 자연 위에 일 자를 그어놓은 듯하다. 투박한 원형기둥들이 생긴 모습 그대로 덤벙주초 위에 올 라타 있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마루를 받치는 1층 공간에 18개의 구불텅한 나무기둥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무익공 3량가구의 만대루 1층 기둥을 노출한 것 은 병산의 압력에 무모하게 대항하지 않으려는 뜻으로 읽힌다. 기둥 사이의 공간 을 막아 헛간으로 쓰거나 그 흔한 삼문조차 달지 않은 것은 산살에 맞서지 않고 자신을 비우려는 것이다.

만대루의 2층 누각은 기둥과 난간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칸막이도 설치하지 않고속이 훤히 드러나는 들보로 팔작지붕을 받치고 있다. 기둥 밖으로 계자각 난간을 두르고 사방을 뻥 뚫어 놓아도 허전하기는커녕 자연으로 넉넉하다.

만대루는 지형의 단점을 장점으로 치환한 공간이다. 벽과 창호 없이 개방된 7칸 규모의 누각은 수 세기 동안 병산의 살기를 걸러낸 거름막이었다. 만대루는 잘 걸 러낸 생기를 강학 공간에 쉼 없이 불어넣는다. 어설픈 차경이 아니라 7폭 병풍으 로 병산의 파노라마를 두르고 강당을 품고 있다.

 

그림 3) 옥산서원의 무변루는 돌아 앉은 모습이다. 진입로 쪽을 판벽으로 막아두고, 강당으로 향하는 반대편을 활짝 열어 두었다.

클라이맥스를 위한 극적 장치_옥산서원 무변루 (그림3)

 

누각은 자연을 감상하는 곳이기에 자연경관을 향해 뻥 뚫린 것이 일반적이다. 하 지만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무변루無邊樓는 서원으로 들어서는 방문객의 시선을 막아선다.

옥산서원에 들어서면 2층으로 된 무변루가 전면 기둥에 삼문을 닫아걸고 덮칠 듯 마당의 목을 조인다. 가운데 3칸에는 삼문을 달고 좌우 1칸은 벽으로 막아 아 궁이를 설치했다. 양쪽 끝 1칸에는 덤벙주초 위로 기둥을 세웠지만 개방감은 턱 없이 모자란다. 무변루 2층 누각은 1층 벽면의 연장이다. 삼문의 상부는 대청마 루가, 좌우 아궁이의 상부는 온돌방이 되었다. 양 끝의 마루에는 처마 선에 맞추 어 부섭지붕을 달아 하늘로 열린 장대함을 눌렀다. 자계로 향하는 대청마루의 서 쪽은 판벽으로 막되 창문을 설치했다. 이는 서향 햇살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마당을 둥지처럼 둘러싸기 위함이다.

역락문에서 무변루를 바라보면 2층의 7칸 건물이지만 마당에서 바라보면 민구 재敏求齋와 암수재闇修齋에 가려 다리가 짧은 5칸 건물로 보인다. 마당을 틀어 막기 위해 5칸의 누각으로 벽을 쌓은 무변루는 자계 방향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이는 옥산서원의 공간이 자계로부터 철저하게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듭해서 막은 후 마지막에 시선을 열어두어, 대청마루에 오르면 마침내 자옥산의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 결말을 강조하 기 위해 극적인 장치를 숨겨둔 것과 같다. 옥산서원은 이언적선생의 사상을 시적 으로 풀어낸 공간이다.

 

그림 4) 필암서원의 확연루 또한 평소엔 창문을 닫아걸고 자연이 아닌 반대편의 사당을 바라본다.

 

반만 열고 반은 닫은 누각_필암서원 확연루 (그림4)

 

앞서 말했듯 한국의 서원에서 누각은 자연으로 열리고 강당 쪽으로 막힌 것이 일 반적이다. 하지만 필암서원筆巖書院의 누각인 확연루는 강당 쪽으로 활짝 열린 반면 남쪽으로는 판벽에 창문을 뚫어 자연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확연루廓然樓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한 2층 건물이다. 2층 누각의 들판을 향한 남쪽 벽은 판벽으로 막혀 있다. 동서쪽 벽은 2/3는 판벽으로 막은 뒤 창문을 설치했고 1/3은 계자난간으로 개방했다. 반면 사당을 바라보는 북쪽 은 계자난간으로 완전히 열려 있다. 누각은 들판을 바라보는 듯하지만 공간적으 로는 사당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는 김인후 선생이 평소 주창한 예의 공간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반쯤 막은 누 각인 확연루는 옥산서원의 무변루와 닮았으나 위압적인 느낌은 없다. 유식 공간 의 본질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사당으로 예를 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 김희곤 Kim, Heegon 건축사

김희곤 건축사

 

마흔이 넘어 스페인으로 떠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건축물을 돌아보았다. 스페인 마드리드건축대학교에서 복원 과 재생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명하며 성 균관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 의했다. 문화부 장관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건축대전 심사위 원, FIKA 국제위원회 자문위원, 2017 UIA 서울 유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건축은 미래로 열린 창이자 창조의 근원이라는 믿 음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세계의 문화유적과 도시 답사를 계속하며 글쓰기와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스페 인은 건축이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정신 위에 지은 공 간, 한국의 서원』이 있다.

paco994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