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 그리고 ‘홍등’ 2020.3

2023. 1. 11. 09:05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The Man Standing Next’ and ‘Raise The Red Lantern’

 

 

영화 속 공간은 단지 아름다운 무대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내용을 보완하고 때로는 더 강력한 역할을 하는 제3의 주연일 때도 있다. 문득 2000년 즈음에 대한건축사협회가 주최한 건축영화제 토론회에서 들었던 패널의 발언이 생각난다. 미술감독이었던 그는 영화와 건축은 별개고 영화에서는 건축적 언어를 크게 다루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화 속 건축에 대해 책도 내고 이곳저곳에서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던 내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다. 그의 말대로 영화 속에서 공간이나 건축은 그저 액세서리로 다뤄지는 걸까. 당시에는 영화 시나리오의 짜임새도 약하고 자본이 취약한 시기였다. 미장센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되는 일도 적었다. 때문에 책을 쓰면서 한국 영화를 소재로 사용할 때 거의 발굴 수준의 노력을 해야 했다. 주로 60~70년대 몇몇 영화, 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영화들, 예를 들어 이장희, 임권택,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을 주로 다뤘다.
월간 건축사에 글을 연재하며 돌이켜보니 벌써 23년 전의 이야기다. 그 사이 한국 영화는 장족의 발전을 이뤘고, 영화는 더 정밀해졌다. 이야기 구조가 디테일해지고, 아무 의미 없이 등장하는 컷들이 적어졌다는 의미다. 하나하나가 은유고, 대사와 표정 외의 다른 장치들도 이야기를 완성하는 도구들로서의 제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영화가 ‘기생충’이다. 이미 사지에 다룬 바 있지만, 이 영화에서 공간은 이야기 전체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일종의 시놉시스같은 역할을 한다. ‘기생충’을 보면서 1997년에 책을 쓸 당시 공부하듯이 보았던 히치콕의 공간과 장예모의 공간을 떠올렸다.

 


최근 정치 느와르의 영화 한편도 공간적 관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최근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영화다. 서울 태생으로 70~80년대 청소년기를 종로 한복판에서 보낸 내 입장에서 이 영화는 지독히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1970년대 말에는 밤 12시가 넘어 통행금지가 시작되면 창덕궁에서부터 이화동 로터리를 지나 대학로 방향으로 탱크가 이동했다. 그 소리가 하도 크고 진동이 있어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집에서 시험공부를 하는 나에게까지 전달되곤 했다. 창문을 열면 이동하는 탱크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남산의 부장들’은 그 당시 어른들이 겪었던 시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궁정동 안가로 통하던 첩첩 요새의 공간은 창덕궁 옆 중학교를 다니던 나에게는 소문으로만 듣던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당시에는 권력의 중압감에 밀려 말조차 함부로 하기 어려운 시대였으니, 그곳은 비밀스러운 듯 비밀스럽지 않은 곳이었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중학생이란 신체 변화만이 아니라 생각에 있어서도 세상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하는 시기다. 그때 나는 어른들의 세상이 궁금했고, 대학교를 다니던 형들의 대화도 신기했다. 학교에서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학교 선생님을 비롯해서 수많은 어른들은 겁을 주며 비밀스런 이야기를 못하게 했다.
말하기 어려운 중압감이라고 할까? 그런 중압감은 경복궁 담벼락만큼 높았고, 또 조심스러웠다. 아마도 그런 것이 스케일이 주는 심리적 압박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위압감일 것이다. 비밀과 보이지 않는 압력. 어쩌면 그것이 1970년대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이런 시대의 압박과 무게를 잘 표현했다. 카메라가 공간의 켜, 담과 담 사이를 서서히 이동한다. 담이라는 것은 안과 밖의 경계인 동시에 아무에게나 개방되지 않은 그들만의 영역이다. 켜가 많을수록 쉽게 다가가기가 어렵고 통제된 사회다. 그 안에 자리 잡은 집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의 고향 같은 포근한 곳이 아니다. 집의 형태를 취한 비밀스러운 이들의 장소다. 수많은 켜들은 소리도 차단하고 사람들도 차단한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켜 바깥을 지난다 한들, 높은 담벼락 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기에 비밀스런 일을 하는 공간들은 가려진다. 수동형을 쓰는 이유는 이것이 숨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자랑스럽다면, 그러니까 최소한 과시욕이라면 오히려 드러내려 할 것이다. 비밀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말이고, 은밀하게 해야 하는 행동은 숨을 곳을 찾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릴만한 건축의 요소들을 사용한다. 담을 쌓고, 해자를 파고, 길을 우회하고……. 이런 방식들은 인간의 역사와도 함께하는 건축적 테크닉이다.
남산 한켠에 있었던 중앙정보부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남산 터널을 지나 명동성당 방향에서 과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세월이 흘러 누구나 사용하는 평범한 용도의 공간으로 바뀌었지만 도로를 향해서 조금 열려있는 그 시절의 창문은 한때는 두려움과 공포의 공간이었다. 1970년 남산을 간다는 것은 정보부 요원이 회사로 가는 길이었고, 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은 인생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주는 잔인한 곳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남산의 두려움을 누누이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지만 죽음을 불사하는 곳이었음은 막연하게나마 알았다.
‘남산의 부장들’은 마피아 조직의 잔인함과 폭력을 다룬 영화 ‘대부’처럼 채도를 높여 표현했다. 다소 낡은 듯한 화면 색상은 당시 공포와 위협을 한발 떨어져서 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들 마피아와 남산의 공포주의 정치를 주도하는 비밀요원들이 같은 행보를 보이고, 그들의 공간 또한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남산의 부장들’은 공간의 구성과 배치뿐만 아니라 색의 사용에 있어서도 굉장히 건축적이다. 영상을 지나치게 선명하게 묘사했다면 감정이 잘 이입돼 공포를 느꼈을 것 같다. 바로 이 점에서 ‘남산의 부장들’이 영악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한발 물러선 관찰자의 시각으로 그 시대를 감상토록 했다. 이는 퇴색한 고성의 흔적을 보았을 때 느끼는 제 3자의 객관적인 시선과 비슷하다. 
먼지가 쌓임으로써 건물의 색이 무채화되는 모양새에서 우리는 과거의 시간을 느끼고 관찰하게 된다. 의도치 않았더라도 이 영화 역시 그와 동일한 감성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영악하다. 지나친 감정이입은 영화를 영화로 보기보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정치적 영화로 보여지는 순간, 영화의 가치는 평가 절하된다.

 


이 영화의 미장센을 보면서 권력과 암투, 질투와 폭력, 그리고 이런 저급한 동물적 경쟁을 다룬 영화가 중첩돼 떠올랐다. 그것은 장예모 감독이 만든 영화 ‘홍등’이다. ‘남산의 부장들’을 보는 내내 ‘홍등’이 연상된 까닭은 등장인물과 시대, 내용은 달랐지만 실제 은유하고자 한 핵심 내용은 유사했기 때문이다. 영화 ‘홍등’은 여주인공이 거대한 저택에 부잣집의 첩으로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송련은 대학까지 나온 여자지만 당시의 시대 풍습과 문화를 이기지 못하고 떠밀리듯이 첩이 된다. 신여성들이 어떻게 이런 환경에 떠밀릴까 의문스럽지만 당시에 우리나라나 아시아권 여성들이 학교를 다니고 사회적 활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인식도 좋지 못해서, 상류층 여성들이 오히려 거부하곤 했다. 덕분에 첩의 딸이나 기방 여성들이 그 혜택을 누리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고, 교육을 통해 본인들의 신분을 벗어나는 일도 있었다. 송련의 배경이 설명되지 않아서 그녀가 부자의 첩으로 들어간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면 그녀 역시 신분이 높지 않았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문제는 그녀가 네 번째 부인이라는 점이다. 송련은 집주인의 하룻밤을 놓고 다른 여인들과 경쟁하는 처지가 된다.
배운 여성이든 배우지 못한 여성이든 그녀들에겐 아무런 권한이 없었고, 시중을 드는 하녀와 다름없었다. 더 낮은 계급의 하녀들 역시 집주인의 선택을 받는 순간 그녀들과 동등해지는 상황이 되고, 그들이 아들이라도 낳게 되면 권력의 중심이 됐다. 홍등의 여자들은 누구도 이 구조를 깨려 하지 않았고, 구조에 갇혀 있는 여자들과 경쟁했다. 겹겹의 담벼락과 집 구조는 이 같은 사회 시스템을 깰 수 없는 상황임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카메라를 통해 조감도처럼 보이는 뷰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높은 담 아래 사람들은 이처럼 전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회 시스템이나 구조를 벗어날 생각을 못한다. 기껏 해야 눈앞의 경쟁자만 볼 뿐이다. 
어마어마한 궁궐 같은 집은 쉽게 나가고 들어가기 어려운 켜의 중첩으로 되어 있다. 이 집의 주인을 만나는 것은 그가 신호를 보내고 찾아올 때만 가능하다. 선택권이 없다. 그렇기에 집주인의 선택을 받기 위한 첩들의 생존을 건 투쟁은 가히 필사적이다. 집주인의 선택을 받기 위한 첩의 몸부림은 한 국가 권력자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애쓰는 부장들처럼 보인다. 그들의 시선은 다른 곳은 향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 명의 권력자를 향할 뿐이다. 도덕과 절차, 정당함 따위는 이들에게 의미가 없다.
홍등의 거대 저택은 ‘사합원’이라는 중국의 전통 주거 방식 중 하나다. 중국 베이징의 오래된 건물들이 왜 회색빛으로 채워져 있는 줄 아는가? 색은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제한된 색 외의 다양하고 화려한 색을 사용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도전이고 반역이었다. 엄격하게 제한된 황제의 색인 자주와 붉은 톤이 섞인 오묘한 보랏빛 색과 유사해서도 안 됐다. 베이징의 전통가옥과 거리가 온통 회색인 이유는 반역의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다. 회색은 자기주장이 없는 색이다.
자기주장이 없을 수 있을까? 인간은 욕망의 존재다. 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자기 목소리를 숨기는 것이고, 그것은 공포의 결과다. 높다란 담을 쌓는 것은 보호의 목적도 하지만 자기를 숨기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베이징의 오래된 전통 건축들의 내실로 들어가면 회색을 벗고, 붉은색과 황금색 등 화려한 색들이 나타난다. 방으로 들어가면 온갖 색들로 화려한 그림과 색들이 가득하다. 외부의 억압에 대응하는 욕망의 표출이다.

 


영화 ‘홍등’을 보면 봉건사회의 여자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 시대의 그녀들을 불쌍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남산의 부장들’과 놓고 보면 남자들 또한 권력자들 앞에서 마찬가지의 처지임을 알 수 있다. 일반 국민들 앞에서 ‘남산의 부장들’은 무섭고 두려운 존재지만 달리 보면 그들 역시 홍등에 등장하는 여러 부인들과 같은 처지다. 좀 더 뒤로 가서 크게 보고 내려다보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런 문제의 구조를 벗어날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홍등’과 궤를 같이 하는 건축적 영화로, 공간의 사회적 상징과 의미를 곱씹게 되는 영화다.
사실 건축은 정치와는 상관이 없다. 권력과도 상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은 정치와 권력에 활용되기는 한다. 감옥과 학교, 그리고 병원의 건축 구조는 유사하고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법원과 교회, 강당은 건축 평면의 뿌리가 같다. 시장과 거대 강당의 건축 구조는 유사하다. 사회가 변할수록 건축이 기능을 갖추면서 진화되고 세부 기능들은 가감되면서 변화한다. 현재의 구조가 정답이라고 하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다. 사회적 변화만큼 세부 기능들이 바뀌면서 건축의 기능 역시 변한다.
그렇지만 건축을 사용하는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건축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생각을 자유롭게 만들기도 또는 경직되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건축과 공간의 영향이다.

 


참고
영화 ‘남산의 부장들’ https://g.co/kgs/vsHoFb, 
영화 ‘홍등’ https://g.co/kgs/GahC3q

 

 

 

 

글. 홍성용Hong, Sungyong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