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한 골목길 2020.5

2023. 1. 13. 09:03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Loving Alley

 

골목은 집을 나와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여정 중 작고 좁은 길을 말한다. 일반적인 골목은 집들을 연결하는 길이므로 집으로 둘러싸여 있다. 어느 집은 큰 길에서 바로 진입하여 골목이 없을 수도 있다. 일반적인 아파트 단지는 골목 없이 단지 내 산책길 또는 보행자 도로를 이용하여 아파트 동 출입구를 통하여 현관문에서 나오고 들어간다. 그러므로 골목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집으로 둘러싸인 골목이 있는 곳은 길 곳곳마다 사연이 깃들어 있다. 나의 골목길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소녀를 처음 만난 곳은 우리 동네 골목길이었다. 검정 교복에 하얀 칼라 깃을 눈부시게 빛나게 하고 짙은 청색 가방을 든 소녀는 씩씩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우리 집은 골목 중에서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네 맨 안쪽에서 걷다 보면 우리 집을 정면으로 보고 걷는다. 그러다가 우리 집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한 번 더 삼거리를 지나고 또 좌회전하여 삼, 사십 보를 더 가야 자동차가 다니는 큰 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골목길의 특성상 동네 안쪽에서 소녀가 오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던 것인데, 그런 위치에 있는 우리 집 때문에 나는 행복해 했다. 소녀는 고교진학을 위해 농사를 짓던 자기 집을 떠나 소도시로 유학을 온 것이었다. 소녀와의 첫 만남은 골목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우리 집 구조로 인해 그렇게 눈부시게 빛났다. 

우리나라의 집은 거의 남향이다. 여름의 길고 낮게 들어오는 따갑고 더운 햇볕이 아침 동쪽과 저녁 서쪽에서 집중적으로 들어오고, 한낮에는 거의 수직으로 햇볕이 내리 쬐는 일조의 특성을 적극 집 배치에 활용한 것과, 계절에 상관없이 남북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고마운 잇점, 통풍을 활용하기에는 남향 배치가 적격이기 때문이리라. 남향 배치인 우리 집에서 소녀를 본 첫 날 아침은 동쪽으로 부터 쏟아지는 햇볕이 하얀 얼굴에 오똑 솟은 콧날을 중심으로 더욱 강한 대비를 주었고, 동그란 얼굴에 자두만한 광대는 하얀 얼굴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였다. 왼쪽 어깨에 떨어지는 빛은 검정색 교복과 하얀 칼라에 대비를 이루면서 신비스럽고 눈부신 형태로 내게 다가왔다. 빛을 받아 더욱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에서 나는 소녀가 씩씩하게 걷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걸어오는 모습을 느낄 찰라, 그녀는 옆모습을 내게 보이며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아름다움은 눈에 맺히고 영상으로 뇌리에 박힌다. 사람은 그러한 순간을 잊지 못하여 그림으로 표현하고 음악으로 표현하며 또한 글로 표현한다. 그 행위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나는 소녀에게 얼른 다가가 말을 한마디 붙여 보는 것이 일상의 큰 즐거움일 텐데, 지나가는 소녀만 그저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자취방 주인인 동네 아줌마가 우리 집 어머니에게 와서 나누는 얘기와 수다 속에서 들려 나오는 소녀에 관한 내용이 나오면 귀 세워 듣는 것도 나에겐 큰 즐거움이었다. 

 



누이가 골목에서 받아왔던 편지를 나도 한 번 써볼까 이 궁리 저 궁리를 해보았다. 그러나 워낙 책상에서 하는 행동이 다 드러나는 집안 구조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학교를 가도 마음 놓고 편지를 쓸 수도 없다. 필기 노트를 반 녀석들이 하도 빌려가고, 쉬는 시간이면 노트 구경에 열을 올리는 녀석들 때문에. 글씨체가 좋아 남의 연애편지는 잘 써주고도 진작 자기 편지는 쓰지 못하는 상황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당최 숫기가 없고 문명에 뒤진 생활을 하는 통에 말이 입에서 떨어져야 말이지……. 서울 사는 시집 간 누나에게 전화가 와도 이상하게 입이 안 열리는 경험을 했던 터라, 그저 나는 그녀를 시야와 뇌리에 담아두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어느 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여름 장마에 우리 집 앞 골목이 홍수가 났다. 골목에 위치한 배수구가 막혀 길은 이내 물 텀벙 골목이 되어 버렸다. 하교 길에 내가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동네 아저씨들은 각종 도구를 들고 배수구 주변에 서서 협동 작업하며 물이 빠지도록 애를 쓰고 있었다. 나도 얼른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고, 민소매 내의만을 걸친 채 골목 흙탕물을 빼내는 작업에 동참했다. 이윽고 물은 빠지기 시작했고 비는 하염없이 내리다 이내 약해졌지만 보람 있는 일을 한 나는 하늘을 보며 뿌듯해 했다. 그 순간 소녀가 등 뒤에 와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런 하필, 나는 얼른 벗어 놓은 녹색 교복 윗도리를 황급히 덧입었다. 그런데 소녀는 하얀 여름교복이 젖지 않은 상태로 우산을 받쳐 들면서 내게 비 맞지 말란 뜻으로 우산을 내밀었다. 나는 이 정도 쯤이야 라는 속말과 함께 씨익 웃으며 돌아서서 골목 청소를 마무리 했다. 그날 밤 나는 비를 맞으며 골목 배수 작업을 한 탓에 감기가 와서 몸살을 앓았다. 몸살은 열을 동반하고, 춥고 떨리고 입은 바짝 바짝 말랐지만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가 지어준 몸살 감기약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소녀가 내민 우산과 검은 눈동자와 하얀 이와 홍조 띤 얼굴의 미소가 겹쳐져 아른 거리는 몽롱함 때문이었으리라…….

소년은 소녀와 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둘이 지나 온 길은 동네 골목길과 큰 길을 거쳐서 길에서 길로 지나왔다.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녹음이 짙게 깔린 뚝방 길을 걸으며 소년은 소녀의 옆모습만 보고도 행복해 했다. 강 건너에 있는 포플러는 싱그런 바람에 자신의 녹색 잎을 한껏 자랑하듯 나부끼며 서 있었다. 물가에 심은 나무여서 그런지 그 싱싱함은 다른 나무보다 더 푸르름이 더 한 것 같았다. 상큼한 바람이 좌에서 우로 불어오는 것을 느낀다. 둘은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면서, 다리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고 피라미를 보면서 몇 마리가 헤엄치고 있는지 세어 보기도 한다. 둘은 강물에 비친 얼굴을 내려다보고, 그 모습이 우습다며 소녀가 웃는다. 소년은 소녀의 잘게 쪼개지는 웃음소리가 포플러 잎이 나부낄 때와 많이 닮았다고 느낀다. 하염없이 둘은 길을 가다가, 강변 풀숲 길을 걷는 순간, 갑자기 마른하늘에 홍수가 나고 강물의 파도가 고래등처럼 우리에게 몰려오고 그 파도가 우리를 덮치는 순간…….

아,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땀으로 옷을 흥건히 적신 채 어둠속에서 일어나 수건으로 땀을 닦고, 책상 위에 놓인 숭늉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다. 숭늉의 청량감은 언제 마셔도 좋다. 희미한 달빛이 창가에서 방안으로 들어온다. 골목길을 환히 비치고 있는 달과 저 무수한 별들……. 방안에 걸린 거울 속에 있는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외우고 되뇌었다.
 
“우리 기말 시험 끝나고 나면, 강변에 나가 바람 한 번 쐬고 올까?”

 

 

 

 

 

 

 

 

글. 조정만 Cho, Jeongman (주)무영씨엠 건축사사무소

 

조정만 (주)무영씨엠 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건축사·작가

건축사이자 문학작가인 조정만은 남원 성원고, 건국대학교 건 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건설경영과정 금호MCA 를 이수했다. 천일건축, 금호그룹 종합설계실, 아키플랜에서 설 계, 감리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건축사를 취득한 후 강원청암 재, 동교주상헌, 고양농경문화박물관 등 다수의 작품을 하고 있 다. 2016년에는 한국수필에 ‘방패연 사랑’과 ‘아버지와 자전거’ 로 등단하였고, 선함재건축을 7년 운영하였으며, 현재는 무영씨 엠건축 대표이사이자, 에세이 작가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imatect@mooyoungc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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