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5. 09:23ㆍ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건축담론 Architecture Discussion
매년 상당히 많은 국가예산이 투입되어 소규모 리모델링 프로젝트부터 대규모 신축 프로젝트까지 다양한 공공건축이 실행된다. 뛰어난 계획안으로 설계공모에 당선되어 기대가 큰 프로젝트라 할지라도 국민들에게 최종 선보이는 준공건물은 기대 이하였던 경우가 많다. 간혹 좋은 작품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결과가 유난히 좋았던 작품의 경우 건축사의 끊임없는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왜 공공건축은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 예산임에도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가? 공공건축 용역에 수많은 인원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과연 어떤 부분들이 문제인가? 최근 들어 놀랄만한 결과물을 보여 주고 있는 중국의 공공건축을 보면 우리도 하루빨리 문제점을 개선하고 재정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건축사들이 공통된 이야기를 한다. 설계공모 당선 후 발주처에 의해 원안은 심하게 난도질당하고, 책임을 피하기 위한 면피용 자문과 심의만 존재한다고. 계획안에서 실시설계까지의 과정은 기존 설계를 더 구체적으로 다듬고 현실화시켜 구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건축사의 아이디어나 새로운 시도는 묵살된다. 기존 프로세스화 된 관공서 매뉴얼에 트집 잡히지 않고 무사히 통과만 하기 위한 과정으로 변질되었다. 자문과 심의를 통해 기존 계획안보다 더 좋게 발전되기는커녕 이것저것 삭제되고 수정되어 예전보다 한참 못 미치게 다운그레이드 된다. 늘어나는 용역기간과 추가업무 요청, 건축에 대한 이해가 없는 발주부서의 무리한 요구 및 불합리한 인증 절차 등도 발생한다. 하물며 수의계약의 경우는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일명 설계비 후려치기를 통한 저가 발주로 국가 스스로 공공건축물을 싸구려로 전락시킨다.
공공건축 분야는 오랜 시간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러한 부당한 현실 속에서도 많은 건축사들은 공공건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제 건축사들 스스로 약자가 되지 않아야 하며 정확하고 일관되게 명확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더 이상 공공건축물은 눈 먼 돈으로 진행되는 주인 없는 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건축계에서 자체적으로 나서 공공건축 전담 청을 설치하여 형식적 심의 및 자문은 폐지하고, 억지스러운 각종 인증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월간 건축사 10월호에서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수많은 문제점과 개선해야 할 요소들에 대해 전문가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해 보았다.
글. 이중희 투엠투건축사사무소·건축사
01 Young architect's 'public building'
사무소를 개소한 지 5년 차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여전히, 초기의 믿음을 지키며 일하고 있다. 그것은 건축설계를 통해 공공건축과 민간건축 두 영역의 특성과 장점을 선순환시키는 것이 사회에 기여하고 스스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는 믿음이다.
개소 당시, 서울시 공공건축가에 발탁돼 다양한 소규모 공공건축설계를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찾아가는 동사무소 리모델링, 도시건축센터 라운지 리모델링, 서계동 빌라집 리모델링 등이 그것이다. 교육청에서 기획하는 ‘꿈을 담은 교실’과 메이커스페이스 리모델링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설계공모를 통해 작년에 준공한 중학교 체육관 증축설계에 참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구청로비 증축설계의 실시설계 납품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외에도 당선작으로 연결되진 못했지만 수차례 공공건축 설계공모에 지명 및 일반공모 형식으로 참여한 경험도 있다. 작은 규모의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몇 차례 경험하면서 2020년 한국땅에서 ‘제대로 공공건축하기’가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매순간 느낀다. 현장의 어려움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설계자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지켜내기 힘든 부분은, 제대로 된 설계비를 받는 것이다. 설계계약을 할 때, 발주처에서 설계비 산정근거를 공개하지 않거나 제대로 된 근거 없이 임의로 산정한 설계비를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최근 들어 건축설계에 요구되는 부가적인 업무가 증가하는 추세임에도 그에 따른 추가 용역비를 산정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혹은 전체 공사비에 대비해서 설계비가 산정되는 점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공사비를 적게 산정하고, 설계 계약 후 공사비를 증액하는 악의적인 경우도 경험해 보았다.
건축사법에 따르면, 리모델링이나 인테리어의 설계대가 산정근거는 기본설계비의 1.5배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기본설계가 필요 없다고 치부하고 기본설계비보다 더 적은 액수를 지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형사무소가 아닌 중·소규모 건축사사무소의 경우엔 계약 상 많은 의무사항들에 대한 법적 검토가 쉽지 않고 대응방안의 프로토콜도 없어 난감할 때가 많다. 발주처와 갈등을 겪을 때, 건축사의 이익을 대변하고 갈등을 중재하거나 해결방안을 조언해 줄 대상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렇게 어찌어찌 계약을 하고 나면 공공건축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차례의 심의·자문·심사 프로세스가 남아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지는 공공건축이다보니, 설계자와 발주처가 단독으로 사업의 취지와 진행을 폭주하지 못하도록 견제장치를 두는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설계자로서 여러 차례 이런 자리에 참여해보니 고압적인 분위기라 취조당하는 기분을 느낄 때가 많았다. 설계자가 마치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몰아붙이고, 질책하고, 훈계를 한다. 건축설계는 세부와 전체를 모두 생각하며 반응해야 하는 포괄적(holistic)이면서 조심스러운 작업이지만, 외부자들은 그 당시 문제되는 일부 사항만을 고려해 난폭하게 설계안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또한, 전문가인 설계자가 공모전이라는 절차를 통해 시민들로부터 설계권을 위임받은 사실을 잊고, 마치 자신들의 단독주택을 설계하듯이 개인적인 취향이나 의견을 반영하라는 발주처도 있었다. 견제를 위해 설정한 촘촘한 프로세스는 최악의 건물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진 모르지만 그것으로 최선의 건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계를 진행하면서 발생되는 수많은 보고와 그에 따른 변경절차를 거치다보면 내실 있는 설계에 집중하기 어렵다. 행정업무를 보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 버리고 만다.
최근 들어 설계의도 구현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법적으로 설계자의 권리를 보장해주려는 움직임이 생기고 있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설계자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사회는 그러한 설계자를 전문가로 인정하고 믿어주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수차례의 설계 검토 시스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계자가 기술적인, 시공적인 영역에서 도움을 받고 싶을 때는 슬프게도 공식적으로 기댈 수 있는 곳이 없다. 예를 들어, 주민센터를 처음으로 설계해보는 경우, 주민센터 공공건축의 지식과 노하우가 공유돼 있지 않은 탓에 설계자가 알음알음 스스로 알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전국에 이미 수천 개의 주민센터가 지어졌음에도 말이다. 설계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못한 부분들은 하자로 남거나 혹은 시공 중 설계변경을 하고 그에 대한 비용을 치루는 결과로 이어진다.
심의·자문·심사 등 외부 견제용 프로세스가 설계자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강압적인 방식이 아니라, 설계자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경험을 공유하고 격려해주는 절차로 바뀐다면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설계자로서 가장 좌절할 때는 능력도 의지도 없는 시공사를 만났을 때다. 소규모 공공건축에선 드문 경우는 아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모두 가격입찰-형식적 공정성은 확보할 수 있지만 실질적 공정성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방식으로 시공사를 선정한다. 공공건축에 선정된 시공사는 민간공사의 시공사처럼 현 공사의 품질관리가 다음의 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쟁력이 확보되기 어렵다.
같은 맥락으로, 일정 공사비 이상의 공사에서 4천만 원 이상 공사물품을 사용하거나 가구 및 제품을 구입하는 경우 중소기업제품 구매촉진을 위해 조달청 등록 제품을 쓰도록 되어 있다. 조달청 등록 제품은 경쟁에 의해 가격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보니, 품질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 또한 몹시 낙후된 조달청 구매 홈페이지를 이용하여 적정한 제품을 검색하는 것은 중노동에 가깝다.
설계 상 꼭 필요한 부분이라 하더라도 원하는 제품을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설계자가 특정제품을 밀어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계도서에 제품의 이름을 표기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작 가구는 공사비처럼 객관적인 금액을 정해놓기가 어려운 품목이고 만듦새에 따라 단가가 천차만별이지만 설계자는 좋은 가구제작자를 선정할 방법이 없다. 어떤 업체가 들어올지 알 수 없으므로, 평균 혹은 최소의 제작비용을 산정해 내역을 제출할 뿐이다.
좋은 건물을 만들고 싶다는 설계자의 사명감 하나로 이러한 과정을 헤쳐 나가기에 그것들은 여러모로 버겁고 귀찮은 절차들이다. 그렇게 해서 도서를 납품하더라도 좋은 시공자, 제작자를 만나는 것은 그저 운에 맡겨야 할 뿐이다. 형식적인 공정성을 획득하고자 결과물의 퀄리티가 하락하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시스템을 유지할 것인가. 혹은 열심히 잘 하는 업체에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도록 시공 퀄리티를 높일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것인가. 어려운 문제이다. 입찰계약이 아닌 수의계약이나 PQ방식의 계약(입찰참가자격 사전심사제도)은 자칫 부정한 계약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명예시스템(honor system)’이 작동하는 사회가 더 건강하고, 나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현상은 현장에서 좋은 공공건축을 만들고자 하는 설계자와 발주처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시와 불신을 근간으로 하는 공공건축 시스템은 여전하고, 그것은 설계자가 능동적 에너지를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건축사로서 맡은 일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지치지 않고 꾸준히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 건축의 퀄리티를 생각하기 어려웠던 시대를 지나, 건축이 문화로 자리를 잡고 또 건축사가 우리 사회의 문화를 담당하는 전문가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는 그날을 위해.
글. 조윤희 Cho, Yoonhee 구보건축사사무소·건축사
조윤희 구보건축사사무소·건축사·미국 건축사
조윤희는 2015년부터 구보건축을 설립하여 건축설계작업을 진행 중이다. 서울대와 MIT 건축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의 이 로재와 미국 보스턴의 Howeler+Yoon Architecture에서 실 무경험을 쌓아왔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시선으로 바라 보는 도시 만들기에 관심을 두고 있다. 서울대, 성균관대에서 설계스튜디오를 운영했으며, 2016년부터 서울시 공공건축가 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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