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집 이야기 2021.2

2023. 1. 31. 09:08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Many house stories 

 

누군가에게 집은 달콤한 로맨스가 펼쳐지는 매력적인 장소이기도 하고, 어쩌면 두렵고 무서운 곳이기도 하다. 같은 집에서 서로 다른 추억과 기억을 공유하기도 하고, 일평생을 살아온 집은 그 자체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영화 <업> 포스터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집’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오래전부터 애증의 관계가 형성된 삶터이다. 다른 말로 하면 부동산. 이 단어로 전환되는 순간 사람들의 애증과 희로애락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한숨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자고 나면 집값이 오르는 통에 부동산은 1960년대 정치적 사회 문제의 주제가 되었고, 1970년대와 1980년대도, 1990년대를 지나 2020년대에도 여전히 핫이슈다. 부동산과 집이라는 단어는 분명 서로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동일한 건축 형식을 띈다. 그러나 사용되는 단어에 따라 이 동일한 건축을 대하는 시선과 태도는 판이하다.

산업화 시대를 지나서 4차 산업 혁명의 시대에 들어선 지금도 부동산 이슈는 여전하고, 오히려 정치적 주제로까지 확산되었다. 심지어는 없어도 될 심리적 계급 갈등의 출발지가 되기도 한다. 집은 과연 무엇일까? 집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비판적 시각으로 본 재테크 수단으로써의 부동산인 집과, 동시에 아련한 정서적 대상으로서의 집이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건축을 달리 바라보는 시각이다. 감정과 이성으로 봐야 할지, 물욕과 서정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집이 이렇게 우리 삶을 휘두르는 것은, 어쩌면 집이 그만큼 중요한 대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건축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삶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설명하곤 했다. 이는 서구나 우리나 매일반인 듯하다.

 

영화 <업>의 한 장면. 아무리 낡고 오래된 집이라도, 주인공에게는 일평생 희로애락을 함께한 시간과 추억이 깃든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집은 인간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축인 동시에 잉여 자산으로써의 재테크 수단이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상이기 때문에 항상 수요가 있는 것이고, 수요를 맞추지 못하기 때문에 가격이 오르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기대를 채워가는 상품으로써 수요를 자극해서 구매 희망자를 늘리고 이를 통해서 집값이 다시 오르는 원리가 작동되고 있다. 그런 대상이 바로 집이다. 때문에 마냥 집을 서정적이고 아련하게만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하게 생각하거나, 불온시할 이유는 없다. 왜냐면 그런 현상 자체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삶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속 한편에는 뭔가 집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그것은 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시간 때문인 것 같다.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으면 사회적 관심 소재가 건축으로 나타난다는 말처럼, 최근 유독 방송에서 건축을 소개하는 코너가 늘어났다. 건축의 수많은 유형 중에 집이 중심이 된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집은 우리에게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 매체에서는 집을 주제로 한 여러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특히 EBS의 ‘건축탐구-집’이라는 프로그램은 그동안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정서적인 집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삶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에 수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 반응하기 시작했고, 상당한 시청률이 나오면서 장수프로그램화 되고 있다.

우연히, 즐겨보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강원도 고성의 화재가 발생한 동네에 직접 설계한 집을 소개하게 되었다. 내가 고스란히 설계한 집 외에도 불탄 이후 재건된 고성의 여러 집과 함께 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여러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문득 2009년의 만화 영화 <업>이 떠올랐다. 재개발한 복판에 고집스럽게 버티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 영화로,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진지한 질문을 주제로 담고 있다.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주인공의 집은 사별한 아내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단지 목재와 기와, 페인트로 마무리된 건물이 아니라 매 순간의 다양한 기억을 함께 한 동반자인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만나고, 아이를 갖지 못하는 시련을 겪고, 웃고 떠들다 세월이 지나 홀로된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그곳은 하룻밤 머물며 자는 호텔이 아닌,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그곳은 기억이며 존재 자체다. 그러니 개발 업자들이 아무리 팔라고 해도 팔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팔라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업>의 이런 스토리는 이성적으로 충분히 이해되지만, 평균 정주기간이 4.5년인 우리나라 동시대 사람으로서 뼛속까지 전달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고성에서 만난 몇 분의 집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정말 집은 동반자이고 자식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태어나 결혼하고, 자녀를 장성시키고, 손자를 보는 70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온 집. 그 집이 불타 사라질 때 느꼈던 심정적 아픔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절절했다. 외아들을 잃고 떠나온 새로운 동네에 정착한 노부부, 타지로 떠나 자수성가해서 본인의 고향 근처로 온 노부부, 모두의 이야기는 <업>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멋지고 깔끔한 새집이 주어진다 해도 아련한 시간과 기억이 있는 낡고 오래된 집과 같은 감정이입은 쉽지 않았다. 
아! 집은 이런 것이었다. 정체성 그 자체인 셈이다.

<시월애>의 한 장면. 주인공들은 같은 장소, 다른 시공간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호숫가에 거 대하게 지어진 화려하고 세련된 집은 허무한 곳이다
<작은 아씨들>에서의 집은 네 자매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놀면서 웃고 떠들고, 때로 싸우 기도 하는 등 성장기를 거치며 서로 같은 경험, 또는 다른 기억을 쌓아올린 장소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집은 허무하고 허전한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는 삶과도 같다. 이룰 수 없는 시간의 사랑을 다룬 판타지 영화 <시월애>처럼 멋진 곳이지만 만날 수 없는 운명의 그 또는 그녀가 존재하는 공간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호숫가에 거대하게 지어진 화려하고 세련된 집은 허무한 곳이다. 
똑같은 호숫가 또는 바닷가인지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누군가의 집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달콤한 곳이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집은 달콤한 로맨스가 펼쳐지는 곳이다. 사랑과 기대의 로맨스가 넘치는 곳일 경우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곳이 집이다.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 배경 역시 집이 중심이다. 따뜻한 벽난로에 옹기종기 모여서 왁자지껄 떠드는 곳이다. 사람의 감정은 다양하고, 삶이 다양한 것만큼 집 역시 다양하다. 백인백색(各人各色)의 이야기와 표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집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집이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섣부르다.

집이 항상 아름답고 로맨틱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의 삶이 고통스럽고 힘든 것만큼 그들의 집 역시 마찬가지다. 때로는 두렵고, 무섭기도 하다. <양들의 침묵>에서 나오는 집은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하고 멋진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잔혹하고 끔찍한 곳이다. 집이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이유로,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잘 노출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가정에서의 끔찍한 아동 학대 사건들이 뉴스에 나오고 있다. 이런 대부분의 학대 중 70%가 친부모 가정에서 벌어진다고 한다. 가장 안전하고 쉴 곳이라 생각했던 집이 가장 두려운 공간이 되는 순간이다.
집은 사회의 축소판을 보여주기도 한다. 재작년 전 세계적인 화제 속에 흥행에 성공한 우리 영화 <기생충> 역시 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하녀>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영화에서, 집은 거대한 사회의 축소판이면서 사회의 계급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계급 공간이다.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영화에서 거대한 저택은 철저한 계급으로 구성된 공간을 보여준다. 지하에 있는 하녀들과 집사들의 공간은 그들만의 분리된 세계로 지상과는 철저히 다른 작업 동선이 구성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든 지상층에 있는 위 계급이 부르면 달려갈 수 있도록. 사실 계급적 시각에서 이런 공간 구성을 보기 때문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이지, 서비스를 받는 사람과 서비스를 하는 사람의 동선으로 본다면 당연한 구성인지도 모른다. 미술관이나 백화점이 작업 동선과 관람객과 소비자의 동선을 겹치지 않게 구성하는 것과 동일하다. 미술관이나 백화점의 서비스 동선은 벽으로 구성되어 관람객이나 소비자들이 발견하기 어렵다. 이런 형식은 디즈니랜드의 배치에서도 나타난다. 디즈니랜드의 작업 동선은 철저하게 관람객과 마주치지 않도록,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등장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양들의 침묵>에 나온 집에서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영화를 떠나서, 누군가에게는 집이 두려운 공간이 될 수도 있다. ⓒ 오라이언 픽처스

이렇게 본다면 <기생충>의 지하와 반지하는 당연한 곳일 수 있다. 그것은 위생 배관처럼 필요하지만 드러날 필요 없는 서비스 공간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일하는 또는 보여주는 주방은 화려하고 세련되었다. 주인이 세련된 주방에서 얼마나 일을 할까? <기생충>에서 불을 다루는 사람은 가정부이고, <남아 있는 나날>의 주방 역시 하녀들이 일하는 곳이다.
이렇게 공간의 이면들을 생각하다 보면 양반집의 구조도 생각하게 된다. 고위직 양반의 가옥에서 부엌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온갖 노동의 일선에는 하인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본다면 뒷간처럼 냄새나고 복잡한 곳은 한편으로 외진 곳에 있거나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다. 우아한 정경부인이 매번 팔을 걷어붙이고 아침 저녁상을 만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이런 시선으로 한옥을 보니 새삼 다르게 보인다. 우리가 그토록 멋지고 우아하게 보던 매력적인 한옥은 노동이 배제된 지적 유희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물론 다수의 사람은 그 안에서 노동을 했을 터이지만…….

이번 고성 화재를 겪은 한 집은 1944년 지어진 한옥이었다. 솜씨 좋은 할아버지가 직접 목수들과 만든 집으로 집주인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할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태어난 어르신은 자신의 대에서 불타버린 집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이야기 도중에 눈물을 보였다. 반면에 평생을 노동하고 소여물을 주며 고생했던 아주머니는 그런 그리움보다는 새로 지은 주택의 편리함과 따뜻함에 감사하고 있었다. 대조적인 이 두 사람의 모습은 인터뷰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멋진 새집에 있으면서, 불타 사라진 집의 스케치를 드리자 눈물을 보이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집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집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
어쩌면 정의를 내리는 것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영화 속 배경으로 나오는 집들의 다양함과 다양한 역할처럼, 집도 수백만 가지의 모습과 정의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집은 집이다. 그게 맞는 말 같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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