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 09:04ㆍ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There is no easy parting
큰 아이가 집을 떠났다.
발단은 우여곡절 끝에 다니게 된 회사가 집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위치한다는 사실이었다. 코피 쏟으며 출퇴근할 수는 없노라며 출근이 결정된 지 3일 만에 방을 보러 갔고, 방을 보고 3일 만에 그 방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어마어마한 월세를 내느니 나 같으면 출퇴근에 시간이 좀 걸려도 집에서 다닐 텐데, 최소한 좀 더 싼 월세를 알아보고 따져보고 움직일 텐데… 엄마의 투덜거림과 상관없이 아이의 생각은 확고했고 양보가 없었다. 속으로는 비용을 계산하면서도 지하에 있는 방이나 너무 좁은 방은 삶의 질이 많이 떨어진다고 맞장구 쳤으니 엄마인 나도 불만을 얘기할 처지는 못 된다. 1년 치 월세를 모으면 경차 한 대 살 돈이 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만의 왕궁이 생겼다는 기쁨에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갔다.
아이가 나가고 텅 빈 아이 방, 문 앞을 지나는데 ‘턱’하고 숨이 막혔다. 생살을 떼어내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학교에서 회사로 회사에서 백수로 그리고 다시 학교로 옮기며 서른이 다 되도록 제자리를 못 잡고 있는 녀석이 한심해 모진 소리를 하기도 했는데, 경제적으로 자립해 집을 나가기만 하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는데도 다시 오기 힘든 천왕성쯤에 보낸 것처럼 쓸쓸하고 허전했다. 첫사랑과 이별했을 때 이런 기분이 들었던가? 아니, 첫사랑의 이별은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아이의 빈 자리는 크고 깊었다.
그 여파일까? 새 칼럼을 준비하면서 광고 영상을 검색하는 사이트에 가서 ‘이별’을 키워드로 검색을 했다. 마치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홀맨’의 바이럴 영상이 눈길을 끌었다. 영상에서 홀맨은 스마트폰과 카카오톡이 없던 1990~2000년대를 풍미한 휴대전화 문화를 추억한다. 화면은 잔잔하게 흐르는 시엠송(CM song)을 배경으로 스마트폰 이전 피처폰과 함께하는 10대의 일상을 보여준다. 새 전화기를 받고 게임을 하고 문자를 보내고 답을 기다리고 요금이 많이 나와 엄마에게 야단을 맞기도 한다. 그러다가 스마트폰을 산 뒤 쓰던 전화를 중고로 팔고 미련 없이 이전의 전화기와 작별한다.
Song) 지우면 사라지는 일기처럼
태우면 사라지는 사진처럼
적시면 사라지는 추억처럼
서로 잊는 건 정말 쉬워
밤이면 사라지는 햇빛처럼
잠 깨면 사라지는 그 꿈처럼
바람 불면 사라지는 온기처럼
흘러가는 건 정말 쉬워
비 지나가면 첫눈이 오고
눈 녹아 가면 들꽃이 피어도
흘러도 흘러도 흘러도
지나간 추억은 진하게 남아
쉬워 잊는 건 쉬워, 쉬워
흘러가는 것은 쉽게 잊어도
S.E) 삐 삐 삐 삐익---
Song) 기억할 거니까 쉬운 이별
홀맨_쉬운 이별 편_인터넷 바이럴_2021
홀맨은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에서 출시한 ‘카이 홀맨’ 폴더폰의 마스코트였다. 1995년 탄생했다가 2002년 자취를 감춘 캐릭터가 2020년 여름 갑자기 온라인 세상에서 부활한 것이다. 홀맨을 부활시킨 주체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베일에 쌓여있다. 애초에 카이홀맨 마케팅을 전개한 브랜드가 LG텔레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LG유플러스가 전개하는 복고 마케팅의 주인공이 아닐까 추측된다.
홀맨의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20여 년 전 우리가 사용했던 문자메시지 모양의 창이 가득하다. ‘당신들은 촉촉했던 문자 감성을 잃었다’, ‘요즘은 이모티콘을 돈 주고 산다던데’라며 카카오톡을 저격하기도 한다. 돌이켜 보니 그때는 문자메시지가 허용하는 80바이트(byte)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기 위해 문장을 압축하고 다듬어야 했다. 우리는 압축 표현의 달인이 되어 보고 싶다는 말도, 헤어지자는 얘기도 80바이트에 담아 한 편의 詩로 만들 수 있었다. 이모티콘 대신 글자만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광고물에 달린 댓글을 보면 10대 시절 홀맨을 쓰다가 30대가 된 사람들의 반응이 뜨겁다.
스킵 버튼을 못 누르고 끝까지 본 광고
요금 끊기면 편의점에서 충전하고
핸드폰 키보드 닳아서 숫자 안 보일 때까지 쓰고 그랬는데
이제 딱 35살. 7살 아들 키우는 엄마가 되었는데 이 광고 보고 10대 중고딩 때로 돌아갔다. 그리고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 시절 풍경, 향기, 친구들, 왁자지껄 했던 교실, 선생님의 잔소리 등등 너무 그리워서 미칠 거 같다.
모든 것이 알고 싶었던 그때와 차라리 가끔은 모르고 싶은 지금, 부모님이 한없이 무서웠던 그때와 그들의 약한 모습에 가슴 아파오는 지금
시간이 흐르면 참 멋진 어른을 상상했지만 이상하게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것 같은 나
그들은 디지털 시대를 살면서 지나간 디지털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손편지가 아니라 80바이트 문자 시절을 추억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으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긴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이 대부분이던 우리 부모님과는 달리, 나의 고향은 대도시의 아파트가 된 지 오래이니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겠다.
지난 설날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러 갔다. 세배를 하고 얄팍한 봉투를 드리고 겨우 떡국 한 끼를 같이 먹고는 서둘러 돌아왔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는 엄마 집에서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고, 써야 할 원고가 마음을 무겁게 했기 때문이다. 4남매를 낳아 기른 울 엄마, 설날에도 혼자 주무셨다. 나는, 아들의 빈방은 허전해 하면서도 엄마 옆에서 하룻밤 자는 건 불편한, 못된 딸이다. 엄마는 4인 이상 집합금지 때문에 각자 따로 와서는 겨우 몇 시간 앉았다가 일어서는 자식들을 아마도 아쉽게 떠나보내셨을 게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이나 주차장에서 자식들과 작별을 할 때마다 엄마도 생살을 떼어내는 것처럼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엄마는 돌아서는 자식들을 단 한 번도 잡지 않으셨다, 지금 내가 아이를 순순히 보내는 것처럼….
세상에 쉬운 이별은 없다. 의미 없는 이별도 없다. 짧은 이별이든 영원한 작별이든 헤어짐은 누구에게나 때로는 슬픔을 때로는 그리움을 남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별은 해방감과 설렘을 주기도 한다.
아이의 분가가 어쩌면 낡은 휴대전화와 이별하는 일과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내 삶의 한 막이 끝나고 조금은 다른 일상을 사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립지만 아쉽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문자가 80바이트로 제한되었던 2G시절로도 그리고 아이와 종일 붙어있어야 했던 아들의 어린 시절로도…
누구에게도 쉬운 이별은 없다, 돌이킬 수 있는 이별도 없다! 작별한 그 자리에서 다른 만남, 다른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며칠 동안 혼자 연기했던 신파극의 막을 내리고 홀가분한 명랑 드라마를 새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40kmOZ7cdg
홀맨_쉬운 이별 편_인터넷 바이럴_2021_유튜브 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 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 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 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 >(2019), <똑똑, 성교육동화>시리즈(2019)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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