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 09:08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House on Wheels, Nomad Vs Diaspora
기독교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십계(1962)>를 보면 수많은 유대인이 고대 이집트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이들은 고향을 뒤로 하고 이집트의 노예로 끌려와 수많은 인구를 형성하면서 각종 노역에 동원된다.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가 된 단어로, 원래는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고대 이스라엘민족이 바빌로니아나 로마제국에 의해 해외로 흩어진 현상을 언급하면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어느 문화, 어느 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존재했던 현상이다. 강한 정복욕과 지배력을 가진 민족이 존재했고, 그런 왕조들이 있었다. 이들은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점령지를 운영하기 위한 전략을 폈다. 새로 만들기보다는 점령지를 활용하는 전략으로, 정복한 지역의 노동력이나 자원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로마는 한 술 더 떠서 전쟁에 동원될 군인도 이런 식으로 흡수했다. 점령지 사람이라도, 로마 군인으로 복무하면 그 다음 세대나 가족에게도 로마인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로마의 이런 확장과 흡수 전략은 역사 속의 여러 나라에서 펼쳤던 정책이기도 하다. 이들 나라 대부분은 사회 시스템의 기반을 작동하는 노동력을 필요로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 지적자산이나 시스템을 가져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지식계급의 활용도 있었다.
징기스칸의 원나라 같은 경우도 이러한 대표적 국가였다. 끝없는 침략과 정복을 통해 인구를 늘리고, 영토를 늘렸다. 거대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다양한 인적 자원을 재분배 했고, 활용했다. 당장 고려시대에 우리나라를 침공한 몽고는 수많은 사람들을 데려가 노동착취에 활용했고, 일부 지배계층은 그들의 부족한 관료조직에 흡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점령지 사람들의 유랑 같은 이주 생활이 만들어졌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은 서구 역사 내내 떠돌아다니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성경 신명기에 나온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역사가 어떨지 알 수 있다.
유대인에게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이런 디아스포라 현상은 거의 전 문화권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이주해온 자들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다수의 주류 문화권에 형성된 이질적인 소수 문화적 공동체 집단의 모습으로 가시화된다. 서구 역사 내내 따로국밥처럼 존재한 유대인들의 게토(ghetto)가 대표적이다. 다만 조금 혼돈스러운 것은 디아스포라와 피난 난민·해외이주민들에 대한 정의인데, 학술 자료나 연구들을 보면 서로 구분하고 있다.
학자들에 따라 디아스포라의 정의를 위한 조건을 언급하는데, 대략 내용을 보면 △원래의 본원지에서 두 개 이상의 지역이나 해외로 흩어짐 △집합적인 기억과 신화의 보유 △현 거주지와 다른 정서와 문화적 이질감 또는 소외감 △돌아가야 할 고향에 대한 희망 △본원지 유지와 복구에 대한 기대 △본원지와의 유대관계를 통한 공동체 의식과 단결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이런 내용을 보면 피난 난민이나 해외 문화에 흡수되는 해외 이주민은 별개로 보여진다.
흡수되지 않은 디아스포라 문화들은 도시나 장소에서 시각적으로 확연히 분리되기도 한다. 냄새나 소리뿐만 아니라 언어와 생활 양식, 무엇보다 공간적인 구분이 명확하다. 거리의 색이나 건축 양식이 특히 그렇다. 대표적으로 전 세계 어느 곳에나 있는 차이나타운을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 이런 공간들은 다양한 영화에서 등장한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부정적 의미의 <차이나타운(2015)>은 이국적이고 흥분되는 공간이 아닌 공포스러운 갱스터의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영화 속 배경의 도시 공간은 매우 일상적인 우리네 도시 풍경이다. 전형적 성장 도시에서 일군 소자본가들의 경제적 건축물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때로는 벽돌로 때로는 타일로 마감된 말 그대로 서민 동네를 형상화 하고 있는 건물들이다. 특정 시기에 구할 수 있는 외장재로 가장 경제적인 비용으로 지어진 통상의 건물들은 그 자체로는 문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철저한 경제적 논리로 지어진 일상적 건물군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들은 이렇게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는, 경제성으로 지어진 수익건축이 태반이다. 이런 무성격의 도시 풍경은 사실 어떤 디테일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백지와도 같다.
영화의 전체적인 어두운 이야기 구조와 맞물려, 중국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가로는 우리에게 부정적 시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들 또한 잠시 머물 공간이기 때문에 동화될 의지가 전혀 없다. 잠시간 머물려 하는 무의식은 정착을 위한 동화를 막는 역할을 한다. 바로 그것이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날 지라도 결코 동화되지 않는 고유의 정서적·문화적 고립을 이끄는 원동력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불편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다양성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차이나타운이 시각적으로 분리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런 시각적 분리는 때때로 집단 거주지에서 벗어나 지역 문화에 동화된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고향 역할을 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이 다른 나라들의 식민지로 점령되어 강제로 끌려갔다기보다도 어찌 보면 근현대의 개념인 이민자처럼 떠나 다른 나라에 그들의 생활권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역 문화에 쉽게 동화되지 않고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이식하고 있다. 그들의 정착지는 새로운 생태적 고향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굳이 중국이 아니어도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이 고향의 역할을 한다. 일본 요코하마의 경우도, 미국 맨해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이 럭 클럽(1993)>은 몇 대에 걸쳐 미국인으로 동화된 중국계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전히 중국어를 사용하고, 읽을 수 있지만 그들은 미국 문화에 정서적으로 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본토의 중국인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 한편에서는 또 다른 중국으로 여겨지는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을 찾는다. 조이 럭 클럽의 미국태생 중국인들에게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은 고향이다. 그들에겐 이 공간이 어찌 보면 디아스포라의 분점이라고나 할까?
거리의 상점 쇼윈도에 어떤 물건들이 진열되고, 어떤 색과 빛으로 연출되느냐에 따라 거리의 문화적 풍경은 확 달라진다. 가로의 정체성은 의외의 덧씌워짐으로 이질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시각화된 간판들과 문자들이다. 하얀색 바탕의 붉은 한자어나 유행이 한물간 네온사인들로 채워진 거리는 분명 우리 도시의 한 장소일 뿐인데, 매우 낯설다. 소품처럼 구성된 상점들의 진열과 상품들, 그리고 디테일로 구분되지 않는 냄새와 연기 등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이질적인 중국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런 현상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나타나며, 적어도 영화에서는 강력한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민족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나 그리스 등 서구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경우다. 이탈리아 특유의 악센트와 음식 문화는 같은 유럽 출신과 명확히 분리된 공간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맨해튼 인근의 이탈리아 거주지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탈리아 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그들 고유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시리즈로 나온 <대부(1972)>의 이탈리아인들은 그들의 출신을 그대로 시각화한 공간에서 거주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이탈리아식 인테리어를 하고, 이탈리아식 장식을 한 주택에서 거주한다. 이탈리아 음식으로 비즈니스를 하고, 이탈리아 출신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시리즈에서는 떠나온 이탈리아의 남부, 시칠리아를 찾아간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보면, 도시와 건축에서 문화적 정서와 공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장치들은 결국 시각화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거리를 공간으로 만드는 여러 요소 중 간판이나 벽면의 사인 등으로 시각화되는 문자는 공간을 특정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문자는 문화의 다름을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읽게 만드는 요소다. 그리고 가로의 건축 입면을 구성하는 장식적 요소들도 중요한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창문의 디테일, 구성, 출입문의 구성과 재료, 입면의 장식적 요소들은 특정 문화권을 시각화한다.
이런 장치들은 LA의 코리아타운 역시 마찬가지다. 차이나타운만큼 시각적 지역성을 드러내진 않지만, 거리의 입면 요소로 작동하는 한글 표기야말로 사람들에게 공간과 장소적 경계를 손쉽게 느끼게 해준다. <깊고 푸른 밤(1985)>의 두 주인공이 떠도는 공간이 실제 미국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돌아갈 한국에 대한 그리움의 공간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지 않을 이국에서의 정착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민이라고 하는 행위는 돌아가지 않을 타향살이를 선택하는 개념이다. 적어도 <미나리(2020)>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한국인 가족은 디아스포라적으로 보기보다는 유목적 삶, 유목적 정착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왜냐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보유는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나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을 떠나진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바로 영화에서 나온 ‘바퀴 달린 집’이라는 표현이다.
영화 속에서 이민 계기가 드러나진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이민자들의 시작이 그렇듯 휴전으로 잠시 전쟁을 멈춘 국가에서 삶의 불안정함을 느끼고 시도된 이민행렬들이다. 일종의 선택인 셈인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교포 2~3세로 불리면서 현지화하고 있다. 이들 교포 2세 또는 3세, 더 나아가서 4세 등으로 내려갈수록, 문화적 동질감을 가진 하나의 민족성을 확보하기보다는 점차 미국의 수많은 인종 퍼즐 중 하나로 동화된다. 즉,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 이들은 아시안이라는 타이틀로 우리나라에서 벗어나기를 시작한다. 한국계 미국인이면서 동시에 아시안 아메리칸(Asian American)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당연히 미국인이 될 것이다.
인종적 식별이 확연한 외모로 완전한 미국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고 상대적으로 인종의 비율이 균등해지면 의미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 <미나리>에서는 아직 그런 심리적 갈등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꼬마 데이빗의 발언을 통해 문화적 단절 또는 거리감을 예측할 수 있다. 집은 바닥에 정착되어 있는 것을 기초 상식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미나리>의 바퀴 달린 집은 낯설고 어색하다.
이런 형식의 집들이 다른 국가에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몽골 유목민의 이동식 주거공간인 게르의 현대 버전같이 보인다. 거대한 텐트이면서 동시에 유목민의 주거공간인 게르는 어느 장소에서나 쉽게 만들고 해체할 수 있다. 장소의 고유성이나 정착성은 의미가 없고, 언제 어디든지 해체와 조립이 가능해야 한다. 그것은 유목민의 삶이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에는 버젓이 이런 이동식 주거가 가능한 집들의 군락이 존재한다. 미국의 공인중개사 사이트를 찾아가면 이런 집을 소개하고 중개하는 코너가 상당히 많다. 이른바 조립식 또는 이동식 주택이 공식적인 주거 유형으로 매매되고, 중개도 되고 있다.
이런 주택들은 당연히 일반 주택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권리가 복잡한 경우도 많다. 다만, 미국에서 이런 이동식 주택에 거주하는 것은 그만큼 생계가 불안정한, 저소득층인 경우가 많다. 물론 그동안 그랬다는 것이고, 지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이라는 도시의 경우 최근 모바일 주택이 5~6억을 넘는 경우도 많다.
영화처럼 바퀴 달린 집이 멀쩡히 도시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 언제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이동식 주택은 캠핑카처럼 제한적인 공간에서 방이나 거실 등이 분할되고 나눠지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풍요롭진 않다. 1950~1960년대 새로운 건축에 대한 다양한 발상과 제안이 넘치던 시절 이런 이동식 주택은 공장에서 제조·생산될 수 있는 재화로 제안되기도 했다. 공장 생산을 통해 안정성과 경제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되었고, 주거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해법의 하나로 보았다. 하지만 이런 이동식, 또는 조립식 주택은 생각만큼 만족스러운 품질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개인의 취향에 맞춘 단독주택이 많은 미국 시장에서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선호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미나리>의 바퀴 달린 집은 유목적 삶의 거처로, 때로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장소를 위한 주택으로 등장한다. 그런 만큼 적응력 또한 중요하다. 영화 제목처럼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 같이 어디서든 정착의 노력과 노고를 마다 않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바퀴 달린 집은 잠시나마 그들을 위로하는 위안의 공간으로 제공된다. 과연 21세기에 이런 바퀴 달린 집만 그럴까?
프랑스의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가 분석한 것처럼 경제적 이유로 노동 이동의 유목적 삶을 향한 노동자들이 있는 반면, 경제적 자유도와 성취를 위한 유목적 삶을 영위하는 부르주아 기업가 또는 활동가들이 있다. 유목적 삶의 이주 노동자들은 이동식 주택이나 컨테이너 주택, 때로는 비닐하우스에 머물며 디아스포라적 회귀를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스나 독일처럼 이주 장소를 그들의 고향 또는 고국으로 삼아 프랑스인인 중동 민족이나 독일인인 터키혈통이 될 가능성도 높다. 반면에 유목적 삶을 영위하는 부루주아 기업가 또는 활동가들에게 바퀴 달린 집은 고급 호텔이다. 또는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결정 자유도가 있는 공유주택에 거주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경제 구조에서는 같은 유목적 삶이 아니고, 같은 디아스포라적 환경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거주 배경으로 건축의 유동성, 공유적 시각의 새로운 대안이 요구되는 시대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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