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 09:21ㆍ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ure Criticism
Yongin House; Double variation of filling and emptying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름다운 어느 봄날, 건축사 황준과 함께 용인의 주택을 답사했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뒤로하는 비는 이 땅을 정화하는 하나의 치유제이다. 집도 때로는 그러하다. 세상을 방황하고 세파(世波)에 시달리고 힘든 일에 땀을 흘리고 난 후 지친 무릎이 돌아갈 곳은 자신의 집이다. 그곳에서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난한 혹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집이란, 건축이란 부동산이고, 부동산이고, 부동산이다. 아파트이고, 아파트이고, 아파트이다. 꽉 찬 용적률과 건폐율을 부르짖는 물질적 가치일 뿐이다. 피난처(shelter)이자 삶을 담는 그릇이자 거주의 장소이자 우주의 기운과 사람의 기가 소통하는 매개체인 집은 옛 골동품이거나 박물관의 유물이거나 사라진 희미한 추억이 되었다.
매우 물질적인 우리의 현재 모습을 바라보면 “사람이 건축을 만들지만 이후에는 건축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금언이 사실을 넘어 진실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에는 사라졌던 집이, 건축이 부활하는 현상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어 매우 기쁘고 감사하다. 이런 집-주택 설계의 한자리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것이 건축사 황준이다. 사무소를 개설한 지 16여 년 동안 그는 주로 주택설계를 해오고 있고, 무수한 계획안 중에 약 20여 개의 집이 지어졌다. 이 용인 주택은 50대 중반을 바라보는 건축사가 하나의 정점을 찍은 작품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제 구체적으로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장소 - 자리 잡기와 관계 맺기의 틀
대지는 용인 처인구 사암리의 주택단지 내에 위치한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건축사들의 작품이 즐비한 단지 내에서도 이 집은 그리 빛을 잃지 않는다. 전통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귿자(ㄷ)형 배치는 주변의 나지막한 산세, 구릉지와 더불어 안성맞춤이다. 남향의 전면에 수직 이동 스크린 장치를 결합한 거실과 식당을 구성하고, 후면인 북쪽에 주출입구를 배치한 것은 조용하고 프라이버시를 원했던 건축주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다소곳한 대지의 요구에 호응하는 좋은 선택이다. 잘 채우는 것과 더불어 잘 비우길 원했던 우리 조상들의 귀한 가르침은 이곳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진다. ㄷ자형 건축의 가운데(중심)에 위치하는 것은 ‘비움’의 마당이다. 이곳으로 인해 빛이, 바람이, 비가 자연스럽게 이 집을 찾아온다. ‘채움’에서는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가치의 회복이다. 작은 숨결 같은 바람에서 주변의 자연 산세로 이어지고 가히 우주의 기운으로까지 확장되는 무의 공간의 성공적인 현대적 재현이다. 채움과 비움과 채움이라는 ㄷ자형 구성의 전개가 갖는 진정한 힘은 이곳에서 다시 대타자(대우주, 무, 조물주, 신 등)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에 있기 때문이다.
형태 - 시각적 평화를 이루어 내는 단순미와 소박함
황준 건축사의 스승은 누구일까. 아마도 건축을 깊게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미스 반 데어 로에와 안도 다다오, 그리고 요시오 다니구치가 떠오를 것이다. 그는 형태적으로 순수 기하학의 세계에만 머물렀던 이 계열의 거장의 범주를 벗어나길 원하지 않는다. 시대가 아무리 비정형 형태와 컴퓨터의 요란한 조작능력을 뽐내더라도 그는 곁눈질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세태의 화려함에 우리가 서서히 지쳐갈 때, 그의 형태는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가 그리는 언덕 위의 하얀 집은 박공지붕이 아니라 언제나 박스 형태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일까 아니면 건축 수법이 다양해져서일까. 1층 전면의 철재 수직 스크린 차양과 2층의 철골 파골라가 미니멀한 박스 형태에 풍요로움을 더한다. 철과 콘크리트, 채움과 비움의 이중적 변주가 형태에도 일관되게 연주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그의 변화 혹은 성숙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몸짓으로 보고 싶다.
공간 - 다양한 크기의 공간의 변주와 조화
필자는 용인 주택을 방문 시 건축주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답사 후 차를 한 잔 마시며 필자에게 질문해왔다.
“이 집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건축에 대해 여러 가지 표현을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 집에 대해 공간이 예쁜 집, 공간 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형태를 주로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의식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공간은 집의 존재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집의 내부 공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건축사의 공간에 대한 집착과 애정을 알 수 있다.
북측 진입 순으로 보면(평면도 및 스케치 참조) 현관홀은 건축의 도입부부터 이 집의 공간성을 예시하려는 건축사의 야심찬 구성이다. 즉 우측 신발장 공간의 수평성과 좌측의 메인 계단 공간의 수직성이 슬라이딩 목재 중문으로 입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신발을 벗고 중문을 지나면, 전면의 거실로 향하는 긴 통로와 좌측면의 게스트 룸으로 향하는 또 다른 복도가 방문객의 선택을 요구한다. 모서리의 일부 벽 측면으로 중심부의 비움의 공간(마당)이 잠시 어리둥절하는 방문객을 환대한다. 마당에 쏟아지는 하늘빛과 봄비와 주변 풍광은 하나의 은총이다. 채움에 익숙해 있는 현대인에게 중심부의 비움은 낯설지만 소중하기 때문이다. 거실/식당은 이 집 공간의 또 다른 백미이다. 폭 3.6미터, 길이 12미터, 높이 2.55미터의 너른 공간이 배후의 중앙 마당과 전면의 철제 스크린을 통한 앞마당의 호위를 받으며 펼쳐지는 것이다. 크지만 과대하지 않고 시원하지만 과시하지 않는 공간이 심미적 쾌감을 선사한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또 다른 세계로 이행하는 장치이자 초대장이다. 2층의 부부침실과 자녀방, 외부 휴게 마당은 통로와 적절히 조절된 창들로 인해 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도 가족의 공동체성과 주변과의 맥락을 지혜롭게 연결시킨다. 2층에는 실제로 두 개의 빈 마당이 존재하게 된다. 1, 2층을 관통하는 중심부 마당과 거실 상부의 파골라 마당 공간이 그것이다. 실로 채움과 비움 공간의 적절한 조화가 이 집의 공간미를 구축한다.
디테일 - 보이지 않는 공간을 위한 치밀한 디테일들
황준 건축사는 디테일이 건축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생각한다. 용인 주택의 디테일은 황준 건축의 한 정점이라 할 만하다. 그동안 경험했던 수많은 시행착오의 수정이자 성취의 결과이다. 재료와 재료가, 면과 면이 만나는 부분을 별도의 장치 없이 직접 만나는 디테일은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사례이다. 그는 이것을 “1:1로 만난다”라고 표현한다. 벽과 바닥은 그냥 바로 만난다. 소위 걸레받이가 없다(단지 벽을 10밀리미터 띄우는 마감을 할 뿐이다.). 천장과 벽도 같은 개념이다. 슬라이딩 도어와 유리벽의 모든 프레임이 천장 속과 바닥 속에 숨겨져 있다. 이 모든 것은 디테일에 대한 탐구와 시공자와의 분투 속에 이루어진 성취이다. 사실 건축에 있어 단순하게 보이는 디테일일수록 수많은 노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잡함 속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건축주와 헤어지며 덕담을 나눴다.
“이 집에 살면서 삶이 바뀌었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으로 변한 것이죠. 집과 공간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 집이 잘 유지되어 먼 미래에 추사고택이나 윤선도 고택같이 문화재가 되었으면 합니다.”
괜한 공치사가 아니라 실제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마도 이 주택이 지금 이 시대에 한국 현대 주택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건축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건축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건축이 사람을 만들고 또한 역사의 한 장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글. 황철호 Hwang, Chulho (주)에이프러스씨엠 건축사사무소 · 건축사
황철호 (주)에이프러스씨엠 건축사사무소·건축사
(주)에이프러스씨엠 건축사사무소에 대표 건축사로 재직 중이며, 연세대학교 겸임교수 및 서울시 건축심위위원이다. 네덜란드 델프트대학에서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연세대학교·인하대학교·세종대학교 등에 출강했고, 연세대학교 및 광주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주요작품으로는 교보생명 생명보험 일산사옥, 유한대학 타워, 국제 수돗물 종합검사센터, 교원대학교 교육자료박물관(안), 수도권 수도통합운영센터, TEPIA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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