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시대의 얼굴 2021.5

2023. 2. 3. 15:01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Face, in an era of masks

 

코로나바이러스가 장기화되면서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이 아주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마스크의 기본적인 구실은 물론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런 기능은 필연적으로 얼굴의 절반 이상을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 서양에서는 마스크 쓰는 것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왜냐하면 마스크의 착용은 자신의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주지 않고 숨기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는 선글라스와 비슷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선글라스는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인 눈을 가린다. 그렇게 비열하게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은 권력자 아니면 범죄자다. 선글라스를 쓰는 것이나 마스크를 쓰는 것 모두 익명으로 악플을 다는 것만큼이나 졸렬한 행위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커다란 물질이 얼굴의 절반 이상을 덮어버리는 현상은 또 다른 효과를 낳는다. 그건 눈이 예뻐 보인다는 사실이다. 왜 눈이 예뻐 보일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마스크 위의 눈은 얼굴 전체 모습 속의 눈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얼굴 전체를 볼 때에는 얼굴의 모든 부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마, 눈썹, 눈 밑의 광대와 볼, 눈 사이에 있는 콧대, 코의 길이, 코 밑에 있는 인중과 입, 그리고 비교적 멀리 있는 턱까지도 눈에 영향을 준다. 눈은 결국 이러한 얼굴 각 부위의 관계 속에서 파악된다. 사람들은 얼굴의 눈이나 코와 같은 세부를 자세히 뜯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 부위들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전체 인상을 파악한다. 물론 그러다가 커다란 눈이나 찢어진 눈, 처진 눈, 화살코, 매부리코, 들창코 등과 같은 특정 부위의 특징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먼저 얼굴 전체의 인상을 파악한 뒤의 일이다. 

얼굴의 아름다움은 특정 부위의 독립된 아름다움에서 오지 않는다. 눈의 아름다움이 얼굴 전체의 아름다움까지 보장해주진 못한다. 얼굴 전체의 아름다움은 그 모든 부위들의 조화로운 관계가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얼굴 각 부위의 비례 관계를 수학적 질서로 파악하려 노력하고 조화로운 비례의 수치를 제시하기까지 했다. 미국의 안면외과 의사인 스티븐 마쿼트(Stephen Marquardt)는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의 비례를 탐구해 황금 비율 마스크를 개발했다. 마쿼트는 독립된 각 부위의 수치보다는 그 부위들 사이의 비율에 주목한다. 그것이 조화로운 비율을 이룰 때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는 것이다.

<사진 1> 스티븐 마쿼트가 개발한 황금 비율의 얼굴 마스 크. 얼굴의 아름다움은 각 부위의 조화로운 비례를 따른다.


하지만 마스크를 쓰게 되면 관계는 소멸되고 눈만 부각된다. 즉 비율은 얼굴의 전체 인상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 눈이 다른 부위와 조화로워야 한다는 책임으로부터 독립했으므로 눈은 그 자체로 평가받는다. 이렇게 독립된 눈은 아름답게 보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이것은 그래픽 디자인의 기법으로 비유하면 ‘누끼(ぬき)’ 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끼는 일본 인쇄 용어로 ‘제거’라는 뜻이다. 대개는 사진 속 피사체의 윤곽선을 따내서 배경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복잡한 배경이 사라지면 누끼 따낸 피사체는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부각된다. 마치 차도르를 쓴 무슬림 여인의 눈과도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사진 2> 누끼는 복잡한 배경을 제거해서 대상을 부각시키는 기법이다.
<사진 3> 영화 <사이코>의 샤워 장면. 살해된 여자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해 눈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또한 마스크를 써서 눈만 보이는 것은 클로즈업 촬영과도 비슷하다. 클로즈업은 피사체에 렌즈가 가깝게 다가감으로써 초점 심도가 매우 낮아지고, 주변의 상황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효과를 낳는다. 초점이 맞은 피사체 외에는 아웃포커싱이 됨으로써 피사체에 눈길이 가도록 강제한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감독한 영화 <사이코>의 유명한 샤워 장면에서, 살해된 여주인공 자넷 리의 얼굴이 천천히 클로즈업되고 마지막에는 커다란 눈이 스크린을 꽉 채운다. 그 눈은 공포를 주는 동시에 매력을 지니고 있다. 아무것도 비교되는 대상 없이 눈만 부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살인과 아름다운 눈이라는 대비와 역설에 혼란스러워한다. 러시아 구축주의를 대표하는 디자이너인 알렉산더 로드첸코가 디자인한 <노이비 레프(Novyi LEF)> 잡지의 표지는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된 눈을 보여준다. 그 눈은 표지를 보고 있는 독자를 노려본다. 

<사진 4> 알렉산더 로드첸코가 디자인한 <노이비 레프(Novyi LEF)> 잡지의 표지, 1928년.


누끼와 클로즈업은 모두 대상을 독립적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부각시키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맥락을 제거하는 것이다. 맥락을 제거한다는 것은 신비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맥락을 제거하면 그 대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대폭 줄어들어 그 대상이 수수께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건축이란 맥락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주변 상황을 보면서 특정 건물에 대한 이해 깊이를 더할 수 있다. 사람 역시 그를 이해하려면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의 맥락을 살려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특정 건축물, 특정 인물은 신비화되는 것이다. 아파트나 상가 건물의 분양 광고를 보면, 홍보하는 대상의 이미지를 주변의 다른 건물보다 압도적으로 크게 만드는 기법을 흔히 볼 수 있다. 실제로 그 건물이 있는 현장에 가 보면 주변이 복잡해서 광고와는 전혀 다르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니 이런 기법 역시 맥락을 약화시켜 광고하는 대상을 신비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5> 홍보하는 대상을 크게 키워 맥락을 약화 시킨 아파트 광고.


마스크 역시 그것을 쓴 사람을 신비화한다. 얼굴의 정보를 가려주기 때문이다. 원시 시대의 인류는 옷을 입지 않았다. 옷을 입는 순간부터 인류는 신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역사도 비슷한 길을 걷는다. 알몸으로 태어나지만, 옷을 입는 순간부터 자신을 신비화하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이제 얼굴마저 절반 이상을 가릴 수 있게 되었다. 맥락이 제거된 눈은 예뻐졌고, 눈으로 환원된 얼굴은 더욱 신비스러워졌다. 며칠 전 전시회에 가서 안면이 있는 작가에게 인사를 했더니, 몇 초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눈만 보이는 나는 그에게 잠시 수수께끼의 인물이 된 것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