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 2021.5

2023. 2. 3. 15:04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Embers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세계로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요즘, 인공지능의 창출도 대단하지만, 불(火)의 발견은 우리 인류역사에서 실로 획기적인 일대 사건이라고 되뇌지 않을 수 없다. 

불(火)을 다루는 지혜는, 신석기 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인 약 4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어느 한 시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따금 산불이나 벼락을 맞은 덤불과 나무에서 자연적으로 발화(發火)가 일어나긴 했겠지만, 불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면서부터 우리 인류의 생활은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불씨를 어느 한 곳에 모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즉각 꺼내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몸의 아랫도리나 겨우 가리고 살 정도였던 구석기인들이 우선 당장 추위를 견딜 수 있게 되었으며, 맹수의 접근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과는 달리 음식을 익혀 먹으면서 점차 인간의 수명도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로는 최첨단 기술을 습득한 셈이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불(火)이 우리의 주거공간 내부로 이입(移入)되었는데, 그게 구석기시대의 동굴이나 ‘막집’에서 신석기시대의 ‘움집’으로 이행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한 발 더 나가 청동기시대가 되고, 주거공간의 중앙 한 곳에만 머물러있던 불씨가 여기저기 분산되어 설치된 화덕에 옮겨지면서부터 우리 인류의 문명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따금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일어나던 불(火)을 주거공간의 한복판으로 끌고 들어오면서부터 인류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처럼, 세상 곳곳에 널려있는 물질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재구성함으로써 ‘공간’을 창출할 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아마 우리 인간은 인공지능에 ‘유전자 가위’로 불리는 기술을 장착(裝着)하며 신(神)의 영역까지 넘보는 싹수가 움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불(火)의 발견으로 우리 인류문명의 서막을 연 이후, 그 불씨를 모아두던 ‘움집’에서부터 시시때때로 불을 활용할 수 있게 구축된 현대건축에 이르기까지, 건축은 우리 삶의 질을 그만큼 더 다채롭고 더 풍부하게 연출해 주었다. 

그런데 태초에 불(火)은 어디에서 왔을까? 정말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신에게서 훔쳐낸 것일까? 부싯돌을 부딪쳐서 불꽃을 내고 나뭇가지를 비벼서 처음 불을 얻어냈다고는 하지만, 불의 근원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불이 일어났다고 해서 부싯돌을 깨보고, 또 불이 옮겨 붙은 나뭇가지를 벌려보고 쪼개봐도 불씨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불씨만이 아니다. 지금처럼 싹이 트고, 꽃이 피는 것도 마찬가지다. 봄이 되면 이렇게 온천지에 싹이 트고 꽃이 피면서 만물이 생동하지만, 그 씨앗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분명 거기에서는 ‘싹’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꽃에서도 마찬가지고, 머지않아 곧 다가올 여름과 가을에 여기저기 주렁주렁 열릴 과일과 곡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해마다 봄이 되면 싹이 트고, 꽃이 피며, 불(火)이 일어난다. 그게 아무리 본디 삼라만상의 운행질서(運行秩序)라고 하더라도, 참으로 오묘하고 무궁하다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고심하며 설계에 몰두하는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분명 콘크리트를 들이붓고, 벽돌을 쌓아 올렸으며, 목재를 일정한 순서대로 짜 맞췄을 뿐인데, 어느 순간 건축물로 창출된 것이다. 


콘크리트 자체가 건축은 아니며, 또 벽돌과 목재에서 건축의 조짐만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콘크리트를 제방에 들이부었으면 둑이 되었을 것이고, 도로에 뿌렸다면 포도(鋪道)가 되었을 것이다. 또 벽돌을 대지(垈地) 경계에 쌓았으면 기다란 담장이 되고, 아궁이 근처에서 쌓아 올렸으면 높이 치솟은 굴뚝이 되었을 것이다.


나무도 벌목(伐木)되지 않은 채, 숲에 더 오래 서 있었으면 무려 천년을 넘나드는 아름드리 거목이 되었을 테지만, 제 인연이 다해 목수의 손에 맡겨지면 순식간에 식탁이나 가구가 된다. 또 둥근 나무를 베어다 다듬고 깎아서 기둥과 보로 결구해놓으면, 그것은 또 어느새 어엿한 한옥 한 채로 변모되기도 한다.
 
건축은 그런 것이다. 본디, 무엇이 되고자 결정된 바 없는 자연 속 수많은 재료를 선별하여 일정한 질서와 법칙에 따라 모아놓으면 그게 건축물이 된다. 그리고 그 질서와 법칙을 구현해놓은 결정체가 설계도서이며, 그 설계도서를 작성하는 이가 바로 우리 건축사들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 건축사들의 업무는 애초부터 그리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엠에프(IMF)가 들이닥친 어느 날부터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살다가, 코로나가 창궐한 이 시대에는 맥없이 주저앉는 일이 더 빈번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뿐이랴? 이제는 물리적인 구조물이 필요한 게 아니라, 모든 것을 디지털로 압축해 놓는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굳이 벽돌을 쌓고, 콘크리트를 들이부으면서 새로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공간(cyberspace, 假想 空間)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 ‘공간’이지, 사실 가상공간은 실체가 없는 것 아니던가? 

알다시피 우리 인간 생활은 3차원의 물리적인 공간에 ‘시간’이라는 요소가 더해져야 비로소 일상적인 삶이 영위되는, 이른바 4차원의 시공(時空)에서 다양하게 벌어지고 있는 뭇 현상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처럼 가상공간에만 치중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괴이하게 비대해진 가상공간 속에 뿌려진 욕망의 덩어리들로만 남아 있게 된다. 아니, 다시 또 구석기인들처럼 움집 하나 제대로 짓지 못한 채 황량한 허허벌판 속을 떠돌아다닐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건축사들의 책무는 여전히 막중한 것 같다. 그저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은 뒤, 벽을 짜 맞춰서 물리적인 공간만 구축해오던 과거의 안일에서 벗어나, 이제 가상공간까지 끌어들일 수 있도록 ‘공간’을 재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질풍노도(疾風怒濤)처럼 번지는 최근 변화의 파고(波高) 앞에 우리 건축사의 고민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건축사들의 건투를 빈다. 이 늦은 봄날에…….

 

 

 

 

글. 최상철 Choi Sangcheol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최상철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 건축사

최상철은 전북대학교 건축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대표건축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의 건축설계 작업과정에서 현대건축의 병리현상에 주목하고, 산따라 물따라 다니며 체득한 풍수지리 등의 ‘온새미 사상’과 문화재 실측설계 현장에서 마주친 수많은 과거와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의 살터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건축’에 담겨있는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기 쉬운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저서로는 ‘내가 살던 집 그곳에서 만난 사랑’, ‘전주한옥마을’ 등이 있다.

 

ybdcs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