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6. 09:03ㆍ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Joint and fit
사랑은, 서로 맞춰나가는 일이다. 방향을 맞추고, 높이를 맞추고, 또 생각을 맞추다가 마침내 마음마저 맞춰내는 숭고한 작업(?), 그게 사랑이란다. 그게 만만했더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사랑타령이 요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굳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서로 다른 존재끼리 ‘잇고 맞추는’ 것 자체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인가 보다.
우리 한옥에도 그 흔적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본디 한옥은 톱으로 잘리고, 자귀로 깎이고, 끌로 도려내지다가, 또 때가 되면 메로 흠씬 두들겨 맞는 과정을 거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참으로 기구한 팔자를 지녔다지만, 그 구성 부재들의 결구부(結構)를 볼 때마다 적잖은 전율이 느껴지곤 한다.
결구(結構)
무엇이든 완전체 하나로 존재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세상 이치는 그런 게 아닌가 보다. 서로 잇고, 맞잡고, 합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또 변화는 피치 못할 건널목이 되었다.
그런데 변화에는 항시 이도 저도 아닌, 그저 모호한 중간단계가 웅크리고 있기 마련이다. 아침 해가 밝아오기 직전에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저 어슴푸레한 새벽이 기다리고 있고,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긴 겨울이 지나고 나면, 그 사이에는 다시 환절기라고 하는 어중간한 단계를 거쳐야만 비로소 봄을 맞을 수 있다.
그래서 그랬던지 예로부터 변화를 살피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변화를 다루는 책(The Book of Change)”으로 널리 알려진 주역(周易)이 통용되는 게 그렇고, 또 사시사철 절기(節氣)와 천문(天文)을 짚어보는 풍습이 여전히 존속되어 내려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보통 변화가 이뤄지다 보면, 그 중간의 짧은 전이(轉移) 단계에서는 곧잘 말썽이 생기곤 한다. 감기도 매서운 겨울보다는 정작 환절기(換節期)에 더 잘 걸리게 되고 노인들도 봄, 여름, 가을, 겨울보다는 간절기(間節氣) 때 쉬이 생명의 끈을 놓게 되며, 우리 아이들도 유년 시절보다는 질풍노도의 사춘기 때 인생의 갈림길에 더 자주 직면하게 된다.
아니, 자연 생태계의 순환 질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건축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속되는 면(面)이나 선(線)보다는, 그 연결부에서 자주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른바 ‘집’을 잘 둘러보려면, 시선이 먼저 닿는 데보다는 저 후미진 모서리와 구석 접합부부터 제대로 가리고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다들 한옥은 알면 알수록 더 어렵다고들 입을 모은다. 이음과 맞춤 결구부(結構部)가 유난히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기법(技法)이 결구부마다 또 도편수마다 조금씩 다르게 창출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우리 한옥의 결구부는 마치 새끼손가락 걸며 내일을 약속하는 소년 소녀들 같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헤어지기 싫어서 꽉 끌어안은 채 영원히 풀어놓을 줄 모르는 어느 연인들의 애틋한 포옹 장면 같기도 하다가, 또 때로는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흔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리 그래도,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생면부지의 목수(木手) 손에 이끌려, 때로는 희멀건 제 속살을 모조리 다 드러내놓았다가 또 때로는 아낌없이 잘리고, 패이고, 깎이고, 바숴지게 되는 과정에 수없이 내몰린 연후에야, 비로소 서로 이어지고 맞춰지게 된 ‘주먹장 이음’이나 ‘엇걸이 이음’ 그리고 ‘연귀 맞춤’이나 ‘숭어턱 맞춤’을 제 몸에 받아들이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옛날 우리네 한옥에는 그렇게 이음과 맞춤 마디마다 서로 먼저 제 살을 덜어내고, 또 그 덜어낸 만큼 상대를 받아들일 줄 알았던 기둥과 보, 도리, 장여의 헌신(獻身)이 밑바닥에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 ‘이음’과 ‘맞춤’이라는 사랑의 행위로 인하여, 마침내 방과 대청(大廳)이라는 우리들의 생활공간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렝이질
흔히 가장 튼튼한 구조물로 알고 있는, 철근콘크리트구조나 철골구조의 기둥은, 보통 기초에 단단하게 정착되게 된다. 시쳇말로 기초와 기둥은 죽어도 같이 죽고, 흔들려도 같이 흔들리는 운명공동체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한옥은 그렇지 않았다. 기초가 되는 주춧돌과 기둥은 애초부터 하나가 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기둥이 주춧돌 위에 생긴 그대로 가만히 얹힐 수만도 없는 일이고, 신석기시대의 움집처럼 기둥이 그냥 맨땅에 처박혀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긴 게 ‘그렝이질’이라고 하는 결구(結構) 방식이었다. 저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기둥이 주춧돌에게 의탁하여 이른바 상생(相生)의 도(道)를 찾아낸 셈이다.
그래도 기둥은 그렇게 몰염치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나 보다. 그냥 다짜고짜 들이댄 것이 아니라, 제 몸부터 주춧돌의 형태에 맞게 도려내지는 아픔을 감행하고 나섰다. 그러니 주춧돌도 차마 거절(?)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주춧돌 윗면의 굴곡진 형태에 따라 줄(線)이 그려지고, 그 줄에 맞춰 목수가 ‘기둥 밑 부분’을 정성껏 도려내 놓는 단장(斷腸)의 과정을 거쳐서, 주춧돌과 기둥은 마침내 한옥 한 채를 거뜬히 받힐 수 있게 되었다.
사랑
가끔 한옥이 지어지는 과정을 살펴볼 때마다, 그때마다 우리네 세상살이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다른 게 있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가 되기 위해서’ 기둥이나 보, 도리처럼 먼저 깎이고 먼저 바숴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구부가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그때마다 서로 상대부터 탓하고 책망하기 일쑤다.
이른바 광화문 집회가 그렇고, 굽힐 줄 모르고 실시간 오르내리는 SNS 상의 일방적인 주장과 댓글이 그렇다. 어디 하나 접점이나 여지는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서슬 퍼렇던 독재의 질곡에서 벗어나 이제 비로소 말문이 트이는 시대를 맞이하니,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이들의 구업(口業)만이 더 횡행(橫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때로는 양보할 때 쉽게 양보할 줄 알고 또 덜어내 줘야 할 때, 한꺼번에 모두 다 덜어내 버리는 저 무심한 기둥과 보, 그리고 추녀와 사래에 이렇게 자꾸만 더 눈길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 최상철 Choi Sangcheol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최상철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 건축사
이 글을 쓴 최상철은 전북대학교 건축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 정을 마치고, 현재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대표건축사로 활동 하고 있다. 그 동안의 건축설계 작업과정에서 현대건축의 병리 현상에 주목하고, 산 따라 물 따라 다니며 체득한 풍수지리 등 의 ‘온새미 사상’과 문화재 실측설계 현장에서 마주친 수많은 과거와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의 살터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 보면서, ‘건축’에 담겨있는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기 쉬운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저서로는 ‘내가 살던 집 그곳에서 만 난 사랑’, ‘전주한옥마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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