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비평] 주제의 삶 – 이로재김효만의 건축 2021.6

2023. 2. 6. 09:20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ure Criticism
Stellafiore -The Life of a Theme. The Architecture of IROJEKHM

 

스텔라피오레? 
화헌, 그리고 최근 경독재- 이들 건축물의 이름은 지금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이들이 전통에서 온 것이라고 여기더라도 그 모습은 예상과 달랐다. 주변의 현장 건축과는 다르게 다들 초연한 자태였다. 이들을 보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환원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스텔라피오레’는 새롭게 기대하지 못한 방식의 충격을 한층 더했다. 19채의 단지를 위한 별과 꽃의 주제어, 주제의 직유라고 해야 옳을 것 같은 외관, 그리고 다양한 색채. 세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진 주거와 건축물보다 훨씬 높이 솟아 있는 소나무들, 자전거를 타고 있는 꼬마들, 그 뒤에서 함께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또, 주말이면 찾아와 이곳저곳을 보살피는 시공사 주인 내외. 반면 선입관, 아니 편견을 갖도록 하는 공식 사진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깊이 자연 속으로 파고든 색조, 그리고 공간들. 이 모두가 머물 곳은 어디일지….

김효만 건축사를 두 번 보았다. 2015년 겨울과 2020년 겨울. 그와 나눈 대화의 중심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개념어들이 있었다. 전통과 현대, 도시와 자연, 율동감, 시간적 장치, 공간 등…. 그리고 나중에는 “건축의 표피에 자연을 피복화하기, 건축 속에서 자연 만지기” 등의 수사가 사용된, 그가 직접 지은 문장도 읽을 수 있었다. 비평가들과의 집담회에서 랜드마크 개념(아키피오레, 화이트보트, 포토피아 처럼)을 말할 때는 조형에 대한 의지도 분명했다.

그런데 ‘수사’와 ‘의지’가 건축사를 만든다면, 아마도 건축은 건축이론가들이 대신했을 것이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피터 아이젠만 건축사의 경우를 보면 이 아이러니가 보인다. 그는 건축물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을 이론가로, 이론에 문제가 생기면 건축사로 자신을 포장한다. 뫼비우스 띠 건축물(Reinhardt Haus)이나 이중시대정신(Double Zeitgeist) 등을 둘러싼 그의 입장이 그렇다. 이는 단지 그럴듯할 뿐이다. 이들이 책임져야 할 것을 붙잡으려고 하면, 그 노력은 허무해진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생길까? 건축에 대한 애정이, 어떻게 애정이 되는지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

 

스텔라피오레 ⓒ Sergio Pirrone


김효만의 건축을 자세히 보았다. 그의 창작과 과정은 가까이에서, 그리고 이들의 의미의 층위와 이 의미가 머물 영역은 먼 시점에서 보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건축에서 ‘시간’을 보았고, ‘공간’의 구조를 알게 되었다. 어쩌면, “공간의 진실은 시간으로(Die Wahrheit des Raumes wird die Zeit)”있게 된다는 어느 철학자(헤겔, 엔치클로페디아)의 테제가, 어렴풋한 하나의 상으로 그려질 정도였다. 이 테제를 붙잡고 오랫동안 씨름했을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의 건축은 시간을 초월했기에 시간을 애써 볼 이유가 없고, 시간을 보이도록 시도했던 한스 샤룬(Hans Scharoun)의 건축은 오히려 공간을 전면에 드러내고 말았다. 19세기와 20세기, 수많은 문헌이 시간과 공간, 인간의 주제를 수많은 언사로 다루었지만, 대부분의 결과는 복잡하여 명료한 성격을 띠지는 않는 듯하다. 그 유명한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간은 시간, 공간은 공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50년 후(1830년)에 헤겔은 이를 염두에 두고, 표상에서는 공간과 시간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공간을 먼저, 그러고 나서 ‘또한’ 시간을 ‘소유’한다고 했으니… 우리의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건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두 철학자(이들 사이에서 쇼펜하우어는 또 다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5. 건축론)도 서로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헤겔은 이어서 “바로 이 ‘또한’을 가지고 철학은 서로 다툰다”고 했다. 

 

스텔라피오레 ⓒ Sergio Pirrone
스텔라피오레 ⓒ Sergio Pirrone
스텔라피오레 ⓒ 김영철


그런데 학문의 진보는 이 ‘또한’이 어떤 구조인지 적어도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물리 영역의 ‘시공간’, 회화와 건축예술에서의 시간, 음악에서의 공간 등. 쇼펜하우어는 “건축이 얼어있는 음악이라니, 시답지 않은 허튼소리다”라고 이 비유를 부정했지만, 어느덧 이 표제어는 셸링부터 괴테를 거쳐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지적 자산이 되었다. 

우리의 자산? 김효만의 건축이 다루고 있을 자산?
그렇다. 그의 화헌이 그랬고, 스텔라피오레도 그렇다. 스킵플로어 구성, 실내의 중심에 위치한 계단의 2박 구성, 입면의 3박 형식들. 근대 건축사들이 기하학의 질서라는 명분으로 고집해왔던 사면 구성이 아닌, 오히려 이를 넘어 중세 석공 장인들이 비밀스럽게 사용했던 삼각도법 식의 입면 구성. 천공된 바닥의 계단들, 육신의 중압을 무색하게 하는 새로운 시야의 유혹. 가까이 또 멀리, 그리고 높은 곳을 알리는 시상들, 움직임을 멈춰도 가두는 것이 아니라 감싸는 영역들. 이리저리 둘러보아야 알 것만 같은 불편의 구조가 아니라, 우리의 내적·심적 구조를 대변하는 요소들, 곧 벽면과 빛. 이들이 우리를 마주한다. 

그의 건축은 어느 정도의 자유도를 보장하는가? 어떤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눈을 가리게 하고 내부의 여러 곳을 안내할 때 마치 자신이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훌륭한 건축이라고 했다(괴테, 건축론, 1795). 
나와 스텔라피오레에 동행했던 이도 세 번째 유형을 보는 과정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나는 한 수 더 떠서 주제넘게 우리의 음악 형식인 ‘산조’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도입, 혹은 엇모리부터 중모리, 휘몰이의 장단까지 나의 육신뿐만 아니라 감정들, 그리고 내 생각도 자연스레 펼쳐졌다. 마치 가야금산조 명인 함동정월과 그의 고수 김명환의 연주를 건축에서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나는 이미 음악학 연구자를 통해 우리의 산조와 서양의 소나타가 동서의 지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에 생겨난 같은 형식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왜 음악과 건축이 함께 해야 하는가? 구조라는 이름의 형식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조는 공간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시간 개념도 책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또한’의 의미와 가치를 ‘음악의 건축’이, 그리고 ‘건축의 음악’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 건축에서는 공간의 성격상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어서인지 공간을 허와 무 등으로 번역해서 이 주제를 다투어 왔다. 그런데 나는 공간의 근본을 마당이나, 혹은 흔히 보는 것처럼 기능으로 정의하는 일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공간은 한정된 것도, 형식의 결과를 위한 이름도 아니기 때문이며, 정의될 수도 없고, 정의되더라도 지속적이지 않은, 조건이며 선험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스텔라피오레 ⓒ Sergio Pirrone
스텔라피오레 ⓒ Sergio Pirrone


그리고 그의 건축은 지금까지 많이 회자하던 ‘한국성’의 건축 주제를 답보 상태에서 비약적인 위치로 끌어올렸다. 김효만 건축의 가치가 그렇고, 그의 건축을 둘러싼 논의가 그렇다. 김효만의 건축이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던 곳에서, 이 주제는 한쪽에서는 정신적 성분(빈자, 허 등의 개념을 생각한다)으로 내용을 구성하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재료의 진정성, 형태의 모방, 기능 개념의 전승, 혹은 기술의 주체로 한정된 작용인 등을 논구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채워왔다. 그런데 그 결과는 대부분 동의하기 어려운 분산의 성격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김효만의 건축 세계를 더 논구하고, 그 세계를 더욱 펼쳐내고, 그 가치를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김효만 건축사는 가야금 명인 함동정월과 같다. 함동정월은 ‘가락이 힘차고, 구성미가 뛰어난 최옥삼류 가야금산조’를 다시 태어나게 했던 장본인이었고, 천하의 명고수 일산(一山) 김명환이 그와 함께 했다. 그런데 김효만의 고수 역할은 누가 하는지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사실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스텔라피오레를 보았기에 상상을 떠올릴 수 있다. 어디선가 읽었던 구절이면 설명은 충분할 것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Der bestirnte Himmel über mir und das moralische Gesetz in mir.)

 

 

 

 

글. 김영철 Kim, Youngcheol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김영철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현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교양교육부 조교수. 고려대학 교와 동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베를린 공과대 학교 건축학과 건축이론연구소에서 예술학 체계와 건축론을 새로 정초한 아우구스트 슈마르조를 연구하였다.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지적 성장과 건축론을 다룬 노이마이어의 『꾸 밈 없는 언어』와 베를라헤의 저서 『강연과 논문』을 번역했다. 2012년부터 ‘토요건축강독’을 진행하였고, 2021년에 강독 참 여자들과 『건축의 이론과 실천(1993-2009)』을 번역하였다.

 

fran_you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