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자” 2021.8

2023. 2. 8. 09:05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Let’s run away”

 

한여름에 집에 오시는 손님은 대개 커다란 수박 한 덩이를 사 왔다. 시장에서부터 한참을 들고 온 그 수박의 꼭지 옆에는 세모 모양의 칼자국이 있었다. 수박이 잘 익었는지 잘라서 속을 보고 맛까지 확인한 흔적이었다. 엄마는 커다란 대야에 펌프의 물을 길어 올려 수박을 담가 놓고는 동생을 얼음 가게로 심부름 보냈다. 동네마다 있었던 얼음 가게 미닫이 유리문에는 얼음 氷자와 ‘어름’이라는 글자가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커다란 쇠톱으로 잘라서 주는 얼음을 동생은 어떻게 들고 왔을까? 비닐백도 에코백도 없던 시절, 냄비를 들고 가서 받아왔던가?
삼촌은 얼음집에서 사온 ‘어름’을 송곳과 망치로 조각냈다. 이리저리 튀는 얼음조각을 우리 형제들은 앞다투어 주워 입에 넣었다. 수박을 반 갈라 속을 파내고, 빈 수박 껍질을 그릇 삼아 얼음을 넣고 사이다 한 병을 부으면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화채가 되었다. 배꼬래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나와 동생들은 마룻바닥에 깐 차가운 화문석 돗자리에 엎드려 달디단 낮잠에 빠져들었다. 
매미소리는 소란하지 않았고, 파란 하늘 뭉게구름만 한가롭던 아주 오래된 여름날의 풍경이다.   
그때는 분명히 나도 여름을 기다렸다. 여름방학, 게으른 늦잠과 노곤한 한낮의 꿈, 모깃불의 풀냄새와 몽환적인 연기를 내뿜는 소독차를 따라 달리던 아이들 그리고 여름밤 슬라브 옥상으로 뛰어들던 별똥별… 여름이 시작되면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가슴은 콩닥거렸다. 지구는 잠시 천천히 돌고 사람들은 느릿느릿 양산을 펴고 걸었다. 말랑말랑해진 아스팔트 위로 살랑살랑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손바람을 불어주었다. 지금은 그리워할 수도 없을 만큼 꿈처럼 아득히 먼 날이 되어버렸다.  

지난 수십 년, 지구가 변했고 여름이 변했다. 밤에도 식을 줄 모르는 더위, 아무 때나 내리는 소나기, 비 없는 마른 장마, 아스팔트와 빌딩과 실외기에서 뿜어대는 열기로 숨 막히는 여름이 이어지고 있다. 도망칠 수만 있다면 어디에라도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힘든 여름을 겨우 견디고 있는 내 귀에 광고 속 한마디가 쏙 들어와 박혔다. 
“도망가자!”
숙박 중개 애플리케이션 ‘여기어때’ 광고의 메인 카피다. 
영상의 첫머리에는 힘든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새벽 6시 알람에 이불을 뒤집어쓰는 여자, 만원 지하철 사람들 틈에 끼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남자, 도로는 꽉 막혀 있는데 뒤에 태운 아이는 울고 있는 난처한 아빠, 아이의 방해에 안절부절하는 재택근무 엄마….
그들의 귓가에 소곤대듯 유혹의 노래가 들린다. 도망가자고!

 

Song)         도망가자.
Na)             도망가자.
                   도망가자.
Song)         가 보는 거야. 달려도 볼까.
Na)             가서는 네가 좋아하는 곳에서
                  하고 싶은 것만 하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너의 맘 편할 수 있는 곳
                  어디든 가보는 거야.
                  그런데 일단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도망가자.
                  여기서 행복하자.
                  여기 어때?


도망가자는 유혹에 화면은 시원한 바다와 상쾌한 숲으로 바뀐다. 도시에서 지친 사람들은 바다에 뛰어들고, 숲 속을 걷고, 노을을 보고, 낯선 잠자리의 커튼을 열어젖히며 잠시 팍팍한 일상을 잊는다. 그들이 도망쳐서 가고 싶은 곳은 ‘아무도 날 찾지 않는 곳’이고, ‘부딪힐 일 없는 곳’, ‘편히 숨 쉴 수 있는 곳’이다. 

여기어때_도망가자_바이럴영상_2021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 두어 주일 전부터 허리가 아프다. X선 사진을 찍으니 다행히 디스크는 아니라고 한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은데 사무실 의자에만 앉으면 꾀병처럼 다시 아프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정형외과에 가서 약을 짓고 물리치료를 받아도 별로 차도가 없다. 아무래도 도망이나 가야 나을 병인가 싶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도망갈 수 있으면. 코로나19와 마스크로부터, 숨 막히는 지옥철, 끝없는 보고서와 경쟁 피티로부터, 해도 해도 늘지 않는 엄마 노릇 딸 노릇으로부터 그리고 점점 더 뜨거워지는 8월로부터! 
도망가서 실컷 먹고 웃고 쉬고 잊고, 그런 뒤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가 도망쳤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 모두가 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신기한 마법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름휴가가 필요한 이유다. 가을이 간절히 기다려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 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너라서 나는 충분해
나를 봐 눈 맞춰 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_선우정아 작사, 작곡, 노래_가사 일부

 

 

 

https://www.youtube.com/watch?v=4G3DA_0dirs

여기어때_도망가자_바이럴영상_2021_유튜브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 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 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 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 >(2019), <똑똑, 성교육동화>시리즈(2019)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