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9. 09:29ㆍ아티클 | Article/에디터스레터 | Editor's Letter
Masters of the modern architecture, and their words
대한민국에서 건축의 사회적 위상은 어떨까? 1960년대 협회지를 찾아보면 당시에도 이런 질문이 있었던 듯하다.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중후반에 기성 건축사들이나 대학의 교수님들께도 수도 없이 들었던 자조 섞인 질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기성세대가 되고, 나도 어느새 윗세대보다 아랫세대가 많은 건축동네에 서 있다. 그리고 편집장으로서 매달 한 번씩 쓰는 글에도 이런 의미와 주제가 여러 번 다뤄졌다.
과거의 여러 자료를 곰곰이 보다가 새삼 느낀 것이 있다. 우리 건축계 인사들이 사회적 발언을 너무 안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몇몇 분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각종 언론을 통해 발언해왔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신문이나 다큐 등에서 간간이 발언을 노출해왔다. 하지만 보다 조직적이고 규모 있게 발언한 적이 거의 없다. 협회의 성명도 대체로 우리 생업과 관련된 내용들을 가지고 했지, 사회·정치적 어젠다(agenda)나 미래 비전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건축의 역사를 보면, 서구 사회의 건축계에서 발언한 거시적이고 확장된 내용의 주장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때로는 한쪽으로 치우쳐서 위험한 경우도 있었고, 사회의 균형을 언급한 것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런 시도들로 인해 그 사회에서 건축의 존재가, 의미가, 가치가 공유되고 인식된다는 점이다.
고전건축에서 현대건축으로 사고와 건축의 틀 자체를 바꿔버린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의 건축 거장들만 해도 그렇다.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르 꼬르뷔지에는 유명한 사회주의 이념가로 건축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주장했다. 그의 수많은 건축적 논리와 주장, 결과들은 그런 정치철학적 성과물이다. 그가 이념적 이유로 미국을 방문하지 못했다는 점은 유명한 사실이다. 또 오스카 니마이어는 어떤가? 동의하거나 말거나 그의 정치 철학적 주장과 사회적 발언들은 브라질 독재로부터 망명의 시간을 보내게 만들었다. 바우하우스의 발터 그로피우스 역시 마찬가지다. 히틀러의 파시즘은 그로 하여금 본의 아니게 망명 아닌 망명으로 미국 현대 건축을 성장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흐름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의 수상작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역주의적 노력을 한 중국 왕슈의 수상부터 조금씩 관점을 이동시켜온 프리츠커상은 최근 사회적 시각에 더 주목하고 있다. 알렉한드로 아라베나의 사회 참여적·발언적 작가주의에 주목하고, 역사와 지역에 침착한 RCR건축이 수상했다. 최근에는 일종의 재생자원에 주목한 지역 건축하는 프랑스의 안 라카통, 장필리프 바살이 공동 수상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의 건축은 어떤가?
왜 국내 건축상들은 권위를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상이 아닌 건축을 하는 이들, 건축사를 비롯한 건축 교육학자들을 왜 주목하지 않는가? 왜 건축을 주제로 하는 건축 언론인들은 사회의 화자로 주목받지 못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미래를 준비하는, 공감을 얻을 만한 주제와 이슈를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발언하지 않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서 술집에서 한두 명이 넋두리하듯 하지 마라!
좀 더 크게, 좀 더 멀리, 좀 더 확실하게 발언해도 된다. 안 다친다.
발언하자, 건축 인싸(insider)들이여.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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