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3. 09:07ㆍ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KIRASEOUL Mountaineering Club's Special Hiking
Hiking notes of Seoraksan Mountain Gongnyong Ridge
Mesmerized by the mystical scenery while climbing the Gongnyong Ridge
까마득히 오래전 젊은 시절에 올라보고 처음인 공룡능선. 산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지만, 설악산은 물론 우리나라 산 중에서도 가장 난코스로 알려진 곳이다. 산행 전날인 10월 8일 오후 서울시건축사회 등산동호회 25명의 회원들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설악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속초에 있는 친구에게 확인해 보니 사흘 째 계속 비가 내리고 있고 다음 날도 비 예보가 있어 조금은 걱정이 됐다.
다음 날 새벽 2시에 기상. 예상보다 더 많은 비가 주룩주룩 쏟아진다. 백두산 종주 때의 악몽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 포기할 수는 없다. 동료들과 함께하니 서로 의지가 된다. 우중산행 준비를 갖추고 3시에 소공원 매표소를 통과하면서 본격 산행을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계곡물 소리가 우레처럼 들리고 빗물이 넘쳐 길을 막는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길은 막을 수 없다.
3.7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걸어와 4시에 비선대 갈림길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마등령 삼거리까지 3.5킬로미터 구간의 가파르고 거친 돌길을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오른다. 헤드랜턴 불빛과 스틱에 의지하면서 한발 한발 조심조심 걷는다. 여기서 속도조절을 잘못하면 공룡능선 완주가 어렵다. 산행에서는 처음이 힘들고 중요한데, 이 구간이 가장 힘들다고 다들 입을 모은다. 그래도 나는 평소의 단련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날이 밝아 온다. 다행스럽게도 비가 조금씩 잦아들면서 서편 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인다. 지리산에서 새벽에 보았던 금성이다. 그리고 운무에 휩싸인 암봉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아!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그것도 잠시뿐 다시 구름에 가리고 비가 온다. 계속되는 폭우 속에서 잠깐이나마 보여준 백두산 천지의 모습도 그랬다. 하늘은 뿌연 곰탕이고 길은 죽탕이다. 등산화는 이미 속까지 젖어있고 골짜기마다 빗물이 모여 폭포를 이룬다. 6시 10분, 동료들과 모여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먹었다. 다시 출발하여 얼굴 형상의 큰 바위가 마주 보고 있는 금강문을 지났다. 마등령에 오르는 마지막 계단, 길옆으로 마가목 붉은 열매가 눈길을 끌며 단풍을 대신한다. 고도를 높일수록 서늘한 기운이 에워싼다. 비에 젖은 몸은 점점 더 무겁지만 마음은 바람처럼 가볍다. 걸을수록 몸이 깨어나고 생각은 맑아진다. 오감이 깨어나는 즐거움이다. 자연과의 깊은 교감은 그대로 충만한 기쁨이 된다.
7시 30분, 마등령 삼거리에 도착하여 오세암 가는 쪽 공터에서 김밥으로 아침을 먹었다. 다행히 비가 멈춰주었다. 그러나 기온이 떨어지고 추워 다시 바람막이 옷을 꺼내 입으려니 빗물과 땀에 젖어 있다. 여기서 후미를 기다렸다가 합류하여 단체사진을 찍고 8시 10분에 비로소 공룡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마등령 삼거리에서~ 나한봉~ 큰새봉~
1275봉 넘어 신선대로
마등령 삼거리에서 시작되는 공룡능선은 무너미고개까지 5.1킬로미터인데, 처음엔 비교적 순탄한 편이나 갈수록 험해진다. 첫 번째 봉우리인 나한봉을 향해 가면서 너덜길 위 작은 고개에 올라서니 산 아래로 운해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가히 선경이다. 구름바다 위에서 내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기분이다. 다시 내려가다가 흰색 빛이 감도는 바위에서 사진을 찍으러 올라갔던 여자분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는데, 다행히 배낭을 메고 있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벌써 단풍은 지고 낙엽이 되어 고목 아래 쌓인 채 비를 맞고 있다. 9시 40분에 나한봉(?)을 지난다. 그리고 10시에 일행들과 합류하여 길목에서 잠시 쉬며 간식을 먹고 이동, 20여 분 후 킹콩바위 앞에 서게 되었다. 바위의 형상이 거대한 킹콩을 닮은 암벽을 오르며 바위와 한 몸이 되어보기도 했다. 울퉁불퉁 제멋대로 솟은 바윗길 걸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모습의 능선길에서 수문장 같은 바위 사이를 지나자 멋진 비경이 펼쳐진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옹골찬 바위에서 견뎌온 세월의 아득함이 느껴진다.
1217미터 고개를 넘은 다음 11시에 공룡능선의 최고봉인 1275봉에 도착했다. 1275봉은 공룡등뼈의 중심이며 공룡의 맹주로 불린다. 전체 거리상 중간 지점에 해당하고, 오르내림의 연속 중간에 쉬거나 빠져나갈 길이 없다. 거친 듯하면서도 절묘한 모습의 웅장한 자태, 강인함 가운데도 기품이 서려있다. 신성하고 신령스러운 설악산은 월출, 주왕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암산으로 꼽힌다. 깊고 가파른 험준한 산세에 격렬한 몸짓의 암릉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1275봉을 지나고 600미터 정도를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야 한다. 신선대까지는 먼 거리다. 얼마쯤 내려가다 보니 마치 촛대처럼 솟은 바위 옆을 지나게 되었다. 이쪽은 다른 곳보다 골이 깊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다. 물이 흐르는 급경사 내리막길 암반 옆으로 난간대가 설치되어 있다. 다시 위로 올라갔다 내려가는데 위험 구간이다. 이렇게 중간중간에 위험한 구간이 많다. 철재 난간대가 있긴 하지만 경사가 급하고 빗길이라 미끄러운 바위를 조심해서 넘어야 했다. 11시 40분, 고사목이 누워있는 길목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주변에 멋진 자태의 소나무 한 그루와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산봉우리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다시 이동하면서 불쑥 솟은 바위와 의자처럼 생긴 바위에도 올라가 보았다.
다시 또 걷다 보니 보이는 것마다 절경이다. 앞을 보면 비경이요, 돌아보면 선경이다. 고사목이 길을 막고 있는 곳을 빠져나와 다시 내리막길을 걷는다. 공룡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의 바위를 보며 내려가던 중 앞에 가는 우리 일행 두 명이 동시에 낙상 사고를 당하는 불상사가 발행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벼운 타박상에 그쳤지만, 이번 산행의 유일한 안전사고다. 작은 봉우리를 또 한 번 오르내린 다음 이제 신선대를 코앞에 두고 가파른 마지막 오르막이다. 아무리 멀고 힘든 길도 한발 한발 내딛다 보니 어느새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공룡능선의 최고 비경 신선대에 오르다
(국립공원에서 뽑은 경치 100선 중 공룡이 제1경)
오후 2시, 드디어 공룡능선의 시작이자 끝인 신선대 정상(1,242미터)에 올랐다. 신선이 산다는 이름대로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온통 사방이 운무에 쌓여 있는 가운데 언뜻언뜻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마치 거창한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 설악산 최고의 비경이자 대한민국 제1경에 손색이 없다. 맞은편의 1275봉 뒤로 마등령, 세존봉, 천화대의 준령 범봉 등 기암들이 구름에 가려 있지만 그래도 긴장과 희열로 짜릿한 순간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자연도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을 때가 더 신비로운 법이다. 흐르는 구름 따라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산속에 산이 있고 그 속에 내가 있다.
감격스러운 멋진 풍광은 최고의 보상이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눈도 커지고 생각도 커지고 마음도 커진다. 끝없이 굽이치는 장대한 산줄기, 저 첩첩이 이어지는 산 뒤로 펼쳐지는 구름 사이에 솟은 산봉우리들… 이런 곳이 바로 신선의 세계(仙界) 아니겠는가? 이건 하늘이 준 선물이요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이다. 현실과 이상세계를 넘나드는 자연의 경이로움이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그러하듯 행복 또한 바로 지금(now) 여기(here)에 있다.
이제 공룡능선 산행의 마무리를 위해 아쉬움을 뒤로하고 무너미고개로 향한다. 오르고 내리는 재미가 있는 공룡능선 끝 지점 무너미고개(1,110미터)에서 가파르게 내려오는 5.5킬로미터 구간의 천불동계곡은 지리산 칠선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함께 국내 3대 계곡에 속한다. 계곡 일대에 펼쳐진 바위가 천 개의 불상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산이 1만 2천봉이라면 설악산은 1만 2천골이다. 그만큼 골이 깊고 계곡이 많다. 세월이 흘러도 멎지 않고 흐르는 계곡물소리, 그리고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듯 우렁차고 장쾌한 천당폭포 앞에 서니 지친 몸의 피로가 씻기고 머리가 맑아진다. 이렇듯 산에서는 영혼을 위로받고 마음에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주변은 여기저기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소신공양 같은 붉은 단풍, 가을 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느낌이다. 단풍은 바람 따라 흐르고 낙엽은 이리저리 흩어진다. 바람에 가을 냄새가 묻어난다. 봄이 희망이라면 가을은 역사다.
왼편으로 보이는 양폭대피소 이후부터는 비교적 평탄하지만 비선대(오후 5시 25분)까지 내려오는 동안에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전에 같았으면 귀면암, 장군바위 같은 것을 보고 감탄을 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더 늦기 전에 빨리 내려가는 게 능사다. 꼭두새벽에 처음 출발(오전 3시)했던 소공원 쪽으로 서둘러 내려오니 어둠이 내린 저녁(오후 6시)이었다. 약 23킬로미터 거리를 장장 15시간 걸은 것이다. 1시간 이상 후미를 기다렸다가 저녁도 못 먹고 귀경길에 올라야 했다.
산행을 마치고 나서
실패한 여행은 기억이 안 나는 여행이라고 했듯이 산행 또한 그렇다. 오래전 동료 건축사들과 함께한 폭우 속의 일본 북알프스 종주와 눈보라 치는 설원 속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특별한 산행이었다.
‘위험한 인생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인생’ 이라고 했던가. 흔들린 순간, 고통스런 시간도 있었지만 동료들과 함께 서로 격려하면서 묵묵히 걷다 보니 모두 낙오자 없이 완주를 하게 되었다. 일곱 개의 크고 작은 고개를 넘으며 그 과정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섭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생길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다. 이 한 걸음이 인생의 한순간이 될 수 있는 소중한 시작이자 새로운 충전의 시간이었다. 경험의 폭이 행복의 깊이를 결정하고 고통의 폭만큼 인생의 폭도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산행이었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반면에 얼마나 강인해질 수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공룡능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인 공룡능선, 지나온 생각만으로도 아득하고 또다시 설레는 공룡능선이었다. 마치 공룡이 살아 꿈틀대는 듯한 암봉들의 연속, 하늘과 맞닿은 듯한 봉우리에 올라섰는가 하면 다시 깎아지른 벼랑길을 내려가야 했던 기억. 거대한 공룡의 등줄기 한가운데 거친 등위에 올라 바라보던 풍경이 그립고 암릉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공룡능선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글. 이종호 Lee, Jongho 시원 건축사사무소
이종호 시원 건축사사무소·건축사
연세대 공학대학원을 졸업(공학석사)했다. 현재 시원건축사 사무소 대표이자 서울특별시건축사회 풍수지리연구회 회장 을 맡고 있다. 서울특별시건축사회·대한건축사협회 등산동 호회 회장을 역임했다. 제1회 간향건축문학상 수상 및 행정 중심복합도시(세종특별자치시) 수필 공모전에서 당선(국무 총리상)하였고, 노원문화정보센터 등의 현상설계에 당선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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