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변통의 창조성 2021.12

2023. 2. 14. 09:06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Impromptu creativity

 

<사진 1> 옷걸이를 변형해 실내화 걸이로 만든 임 시변통

 

집 안에 있는 실내화가 늘 문제였다. 신지 않는 동안 실내화는 자기 자리를 잘 찾지 못한다. 거실 여기저기, 방안 여기저기에 굴러다니기 일쑤다. 시각적으로 보기 불편하다. 무엇보다 진공청소기를 돌릴 때 이놈의 실내화들이 늘 걸리적거린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실내화 걸이가 나타났다. 정식 걸이는 아니다. 아내가 옷걸이를 약간 변형해서 실내화 걸이로 용도를 변경한 것이다.<사진 1> 그걸 보니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 엄마 방에 있는 전등은 잡아당길 수 있는 얇은 끈이 켜고 끄는 기능을 담당했다. 그 끈은 일종의 공중에 매달린 스위치다. 끈의 길이는 일어나야 비로소 잡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엄마는 다리가 아파서 일어나기가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그 스위치 끈의 끝에 기다란 실을 달아 길이를 연장해 누워서도 잡을 수 있게 했다. 앉거나 누워서도 전등 불을 켜고 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진 2> 대형 물통에 물을 채워 주차장 방해물로 임시변통했다.
<사진 3> 책과 문짝을 승용차 방탄재로 임시변통한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조업체가 정식으로 생산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물을 이용해 특별한 목적을 실현하는 것을 ‘임시변통’이라고 한다. 임시변통의 사전적 의미는 “갑자기 터진 일을 우선 간단하게 둘러맞추어 처리함”이다. 이런 사례들은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도로의 지정주차구역에 다른 차가 함부로 주차하지 못하도록 막는 플라스틱 대형 물통을 들 수 있다.<사진 2> 이 물통은 휘발유를 담는 용기에서 유래해 지금은 업소용 세제, 간장 등을 담는 용기로 사용된다. 사용이 끝난 뒤 물이 채워져 주차를 막는 방해물로 임시변통되는 것이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모가디슈>에서는 자동차가 총격을 받는 것을 대비해 차의 표면을 책으로 뒤덮어 보호막으로 임시변통했다.<사진 3> 

 

<사진 4> 맥가이버칼로 알려진 스위스 아미 나이프는 임시변통을 정제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책은 빈번하게 임시변통되는 대표적인 사물이다. 책의 목적은 정보를 담고, 사람에게 읽히는 것이다. 집안에는 많은 책이 있기 마련이고, 그 책들은 대개 읽히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때로는 냄비받침으로 쓰이거나 부러진 테이블의 다리를 대체하는 용도로 임시변통되더라도 그리 나쁠 것은 없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사람들이 어떤 사물을 보고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라면을 끓여서 바닥에 놓고 먹고 싶은데, 바닥재가 상하지 않게 뭔가를 받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는데, 두툼하고 냄비보다 조금 큰 크기의 책이 눈에 띈다. 주저하지 않고 냄비받침으로 쓴다. 이런 임시변통이 실현되려면 어떠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갑작스럽게 어떤 일을 원만히 처리할 도구가 필요하다는 걸 인식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미룰 수 없이 당장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 의식 상태에서 사람은 매우 창조적으로 변화한다. 마감이 다가오면 극도로 머리를 굴리는 현상과 비슷하다. 그 창조의 힘은 특정한 용도의 사물에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예전에 이를 주제로 드라마도 만들어졌다. <맥가이버>가 그것이다. 이른바 ‘맥가이버칼’이라고 부르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는 임시변통의 아이디어를 좀 더 정제해서 상품화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진 4> 

책을 냄비받침으로 쓸 때 책에서 발견하는 사물의 가능성은 책의 평평한 면이 뭔가를 올려놓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툼한 두께가 냄비의 열을 차단한다. 책을 총알을 막는 보호막으로 사용할 때도 그 사물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원시 인류가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돌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기의 가죽을 찢는 칼로 사용한 것 역시 사물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인류는 아예 둥근 돌에서 날카로운 모서리를 만들기로 한다. 이때 돌은 다른 기능을 가진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칼로 이용될 돌이고, 하나는 칼을 다듬는 돌이며, 마지막으로 칼이 될 돌을 올려놓는 평평한 면을 가진 모루돌이다. 원시 인류는 서로 다른 돌의 모양을 보고 각각의 용도에 맞는 돌로 선택했을 것이다. 인류는 엄청난 기술 문명을 발전시켰는데, 그 시작은 바로 이런 미천해 보이는 도구들이다. 도구 창조의 원동력은 사물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는 능력이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인들도 늘 하는 임시변통이다. 

임시변통의 중요성을 역설한 사람은 영국의 건축비평가인 찰스 젠크스다. 그는 임시변통에 해당되는 영어인 ‘makeshift’라는 단어 대신 라틴어인 ‘애드호크(ad hoc)’라는 용어로 예술, 디자인, 건축 분야에서 나타나는 창조적인 즉석 제작을 설명한다. 라틴어 애드호크는 “특별한 필요와 목적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이 세상 어떤 인공적 사물이 특별한 필요와 목적을 위하지 않고 태어났겠나? 하지만 애드호크에서 젠크스가 강조하는 것은 ‘속도’와 ‘실용성’이다. 속도란 최적의 재료와 정제된 기술을 기다릴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주변에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급하게 이용하고 에너지를 아낀다는 점에서 ‘경제성’을 뜻한다. 실용성은 너무 평범해 보인다. 모든 인공적인 사물이 실용적이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공장에서 생산된 정제된 물건들은 실용성과 함께 상징성도 지니고 있다. 즉 그 물건을 소비할 타깃층에 맞게 재료와 형태, 색상과 질감이 섬세하고 세련되게 디자인된다. 그런 점에서 순수하게 실용적인 것은 아니다. 애드호크는 오로지 사물의 기능적 목적만을 지향한다. 

 

<사진 5> 병원의 이동용 수액걸이와 좌석을 결합해 움직이는 스툴로 만들었다.


내가 시장에서 발견한 스툴을 예로 들어보겠다.<사진 5> 이 애드호크적 임시변통의 사물은 앉은 채로 이동할 수 있는 스툴이다. 이 스툴은 병원에서 환자들이 사용하는 이동용 수액걸이의 바퀴 달린 받침대, 그리고 다른 의자의 좌석을 결합했다. 그 결합 상태가 거칠고 조잡하다는 점에서 이 이동용 스툴은 순수하게 목적 지향적이며 실용적이다. 이렇게 애드호크적인 사물들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물들이 결합해 특정한 목적을 이룬다. 재빠르게 목적을 실현했으므로 깔끔하고 매끄러운 마감 상태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임시변통과 애드호크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하다. 

 

<사진 6> 강철 파이프를 용접해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도록 했다
<사진 7> 좌석 위에 캐노피를 달았다.
<사진 8> 많은 철판이 결합돼 삼륜차로 변신한 오토바이


이러한 임시변통과 즉석 제작의 사례는 동대문종합시장 주변에 널려 있는 배달 오토바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 번에 많은 물건을 싣고자 짐을 싣는 뒷좌석의 받침대에 강철 파이프를 여기저기 거칠게 용접해서 높이와 길이를 연장했다.<사진 6> 어떤 오토바이는 비가 오는 것에 대비해 캐노피를 달았다.<사진 7> 어떤 오토바이는 아예 삼륜차처럼 개조하기도 했다.<사진 8> 애드호크적 조합이 매우 다양하다. 이것은 운전자가 자기 경험에 비추어 특별한 목적을 실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토바이 제조사가 이러한 다양한 요구를 모두 수용해 각기 다른 오토바이를 생산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제조사는 언제나 이윤을 위해 표준 모델을 생산한다. 거기에 더해 특별한 목적을 수용해 개조하는 것은 소비자의 몫이다. 소비자는 이를 위해 큰돈을 들일 수 없으므로 그 결합상태는 조잡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은 소비자 주권의 능동적인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옷걸이에서 실내화 걸이의 가능성을 보는 눈과 일반 오토바이를 배달에 최적화되도록 개조하는 임시변통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 능동적인 소비자들은 사물의 가능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특정 기능에 대응하는 영구적인 형태가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바로 그 점에서 창조적이다. 인류 문명의 진화 역시 이러한 태도가 만든 임시변통의 축적 과정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