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기표 2022.2

2023. 2. 16. 09:04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Signifier of freedom

 

얼마 전에 머리를 잘랐다. 원래 자르던 곳이 있었는데, 거리가 좀 멀다 보니 귀찮아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가서 깎았다. 처음 가는 미장원은 늘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 이발사가 처음부터 줄곧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어버린다. 원래 가던 곳의 이발사는 가위로 섬세하게 자르는데 말이지. 참 편리하게도 깎는구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머리를 맡겼으니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고. 머리를 다 깎은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호섭이 스타일이다. 집에서 아내가 보더니 호섭이 머리라며 놀린다. 그러면서 아들한테 “아빠가 호섭이 머리 됐다”고 말한다. 아들의 반응은 “호섭이가 누구야?”다. 아들은 호섭이를 모르기 때문에 호섭이 머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아들의 반응을 유식한 말로 표현하면, 아들에게 ‘호섭’이라는 이름은 ‘기의’로 다가가지 않는 순수한 ‘기표’다.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기호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었다. 기표(記標)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매개이고 형식이다. 소리가 대표적이다. 나무를 지시하기 위해서는 ‘나무’라는 소리를 내야 한다. ‘나무’라는 그 소리가 바로 기표다. 기의(記意)는 ‘나무’의 의미와 개념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나무라는 기호에는 ‘나무’라는 ‘소리’와 그 소리가 지시하는 나무의 ‘개념’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이 기표의 개념을 확대했다. 기표는 소리뿐만 아니라 문자이기도 하고 이미지이기도 하며 어떠한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무를 그린 그림도 그것은 진짜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지시하는 기표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이미지의 배반>이다.<사진 1> 파이프를 그려 넣은 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 놓았다. 진짜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지시하는 기표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진 1> 「이미지의 배반」 르네 마그리트, 1929년


이 그림 속의 글, 즉 문자도 기표다. 나는 사실 불어를 알지 못하므로 그 기표는 의미로 와닿지 않는다. 마치 ‘호섭이’라는 기표가 아무런 의미작용을 하지 않는 아들의 머릿속과 같다. 기표가 특정한 의미로 닿지 않는 상태에서 그 기표는 순수한 기표가 된다. 외국인들이 많아진 오늘날 특정 지역에 가면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문자로 쓰인 간판을 가끔 본다. 그 문자가 나에게 전혀 기호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의미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머릿속에 연상되는 기의가 전혀 없으므로 나에게 그 문자는 순수한 기표로만 존재한다. 그렇게 의미작용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기표는 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펼쳐 보여준다. 내 마음대로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낯선 대상에 대해서는 고정관념을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알 수 없는 그 문자는 나에게서만큼은 기의를 지시할 의무로부터 해방된 상태, 자유의 기표다.

어떤 대상을 기의로부터 해방된 기표, 자유의 기표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창조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상에 따르기 마련인 의미가 사라진 상태이므로 그 대상에 대한 고정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기표가 기의로 가닿지 않을 때 사람이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해지는지 잘 보여주는 소설이 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 <굴>이 그것이다. 모스크바로 올라와 일자리를 찾지만 몇 달 동안 굶주린 부녀가 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구걸을 시작하고 어린 딸은 식당 창문에 쓰인 ‘굴(러시아 발음으로 Ústritsy)’이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그런 단어를 태어나서 처음 본 소녀는 그것이 식당 주인의 이름인지 의심해본다.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바다 생물’이라는 답변에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굴이라는 놈을 재료로 만든 각종 요리를 상상한다. 굴 요리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그것을 맛있게 먹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러다가 아버지에게 굴 요리에 대해 물어보니 굴은 딱딱한 껍질 속에 들어있고, 산 채로 먹는다는 말에 실망하고 만다. 맛있는 요리에 대한 환상이 갑자기 사라지고 징그럽게 생긴 바다 생물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배고픔 때문에 소녀는 이내 눈과 이빨과 발이 달린 생물, 상상 속 굴을 먹는 환상에 빠져든다.

어린아이의 머릿속에서 순수한 기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아이들은 흔히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 노는 환상에 빠진다. 스스로를 바람이 되거나 기차가 되는 상상을 하며 논다. 아주 드물게 어른이 되어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길>의 주인공 젤소미나가 그런 사람이다. 젤소미나는 어린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재주가 있다. 들판에서 한 아이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걸 눈치챈 그녀는 소녀를 즐겁게 해주기로 한다. 큰 가지 하나가 옆으로 길게 뻗은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젤소미나는 자신의 팔을 뻗어 나무 흉내를 낸다.<사진 2> 그걸 본 아이가 까르르 웃는다. <길>에서 이 장면은 어른인 젤소미나가 여전히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고정하지 않고 나무로 변신하는 것, 또 나무를 보고 팔을 뻗은 사람으로 상상하는 것, 두 가지 모두 어린아이처럼 주체와 대상을 순수한 기표로 보는 태도 또는 주체와 대상을 고착된 기의로 보지 않는 태도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2> 「길」 페데리코 펠리니, 1954년


예술가들은 젤소미나의 태도를 지닌 직업인이라고 볼 수 있다. 대상을 해방된 기표로 보는 ‘유연한’ 눈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피카소의 <황소의 머리>라는 작품은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로 구성되었다.<사진 3> 피카소가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를 자유로운 기표로 보았다는 걸 보여준다. ‘안장’이라는 기표를 ‘자전거를 타는 사람의 엉덩이를 받치는 좌석’이라는 기의로 절대화한다면 안장의 변신 가능성, 그것의 창조적 잠재성은 소멸되고 만다.  

<사진 3> 「황소의 머리」 파블로 피카소, 1942년
<사진 4> 「메차드로(Mezzadro)」 아킬레 카스틸리오니, 1957년
<사진5> 「아르코(Arco)」, 아킬레 카스틸리오니, 1962년


자유로운 기표가 가진 변신 가능성을 활용하는 건 디자인의 세계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이탈리아의 아킬레 카스틸리오니가 이런 태도를 가진 대표적인 디자이너다. 그가 디자인한 메차드로는 트랙터의 좌석과 휘어진 막대기, 그리고 나무 받침대를 결합해 스툴을 만들었다.<사진 4> 그가 디자인한 스툴 역시 기존의 스툴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스툴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 즉 이 스툴 역시도 기의로 잘 가 닿지 않는 기표인 셈이다. 카스틸리오니는 그렇게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즉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모호한 디자인을 잘 한다. 그가 디자인한 아르코라는 램프가 있다.<사진 5> 이 램프는 플로어 램프인지, 펜던트인지, 테이블 램프인지 그 범주가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모호성은 기표를 고착된 기의로 확정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든다. 낯섦, 이것은 창조적인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추구하는 목표 가운데 하나다. 낯섦이란 해방된 기표, 자유로운 기표의 다른 이름이다. 

반면에 그러한 모호함보다 확고한 질서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기표는 하나의 기의로 반드시 고착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그런 태도를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문신을 생각해 보자. 문신이라는 기표는 오랫동안 ‘범죄자’, ‘야만인’이라는 기의로 곧장 날아갔다. 영화에서 흔히 목욕탕 신에 등장하는 문신한 몸은 조폭을 뜻하는 클리셰다. 하지만 최근 문신은 ‘스웩’이 되었다. 고착된 기표와 기의를 강요하는 보수주의는 새로움을 창조하기 힘들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고착되는 것은 지식이 늘어나기 때문이며, 그런 태도를 가진다는 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세상을, 이 세상의 그 수많은 대상을 순수한 기표로 바라본다는 건 불가능하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므로 이것을 알아야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상을 순수한 기표로 바라본다는 건 노력을 필요로 한다. 창조적이 된다는 건 억지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 태도를 갖는 사람은 축복을 받은 셈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