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인공 뒷배경, 내 자리는 언제나 가장자리” 2018.04

2022. 12. 1. 10:06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I'm the background of the main character, and my seat is always the edge”

 

지나고 보면 춥지 않았던 겨울이 어디 있었을까마는 지난 겨울은 유난스레 추웠다. 영하로 내려간 수은주는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쳤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벤치 파카를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다. 멀리서 보면 옷이 걷는 것처럼 보였다. 잔뜩 껴입은 내 모습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든든한 창문이 찬바람을 막아주는 베란다에서 생수가 얼고 세탁기의 호스가 얼어 며칠씩 빨래를 미뤘다. 여기 저기서 수도 계량기 동파 소식이 들렸고 부쩍 부모님들의 부고가 전화기를 울렸다. 실제 한 달의 사망자 수도 통계를 내기 시작한 후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 1월 우리나라의 사망자 수는 31600,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2.0% 증가했는데 강추위가 고령자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지 싶다.

1월 한파에 얼었던 몸과 마음은 2월이 지나고 3월이 되어도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달력에 표시된 입춘과 우수 절기를 보면서도 도무지 봄이 올 것 같지 않은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덥다. 불과 두어 주 전에 주저주저 하며 겨울 코트를 벗었는데 어느새 겉옷을 벗어 들고 걷고 있다. 도대체 봄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일까? 어김없이 찾아온 봄을 맞으니 덜컥 가슴이 내려 앉는다. 이 봄 나는 어느 땅에 어떤 씨앗을 뿌려야 할까 아무런 야무진 다짐도 없는 인생이 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씨 뿌리는 부지런보다는 봄바람 맞는 호사가 훨씬 더 유혹적인 법이다. 4월의 첫 날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었다. 80년 넘은 전나무 1800여 그루가 콸콸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늠름하게 서있었다. 발 밑에 깔린 보드라운 황톳길을 밟으며 천천히 걸었다. 귀를 기울이면 꽝꽝 얼었던 땅이 녹는 은근한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같이 간 동생이 꽃을 보자며 옆길로 이끌었다. 내 눈에는 지난 가을 떨어져 쌓인 낙엽과 나뭇가지들만 보이는데 눈 밝은 동생이 꿩의 바람꽃을 찾아 보여주었다. 겨우 발목 정도 높이에서 엄지 손톱보다 조금 더 큰 하얀 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가르쳐주기 전에는 절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여린 꽃. 봄의 주인공은 한 번도 된 적 없지만 봄마다 피어나 발 밑을 환하게 밝혀주는 꽃.

다리를 접고 앉아서 보니 볕을 따라 꽃잎을 반쯤 오무리거나 활짝 편 꿩의 바람꽃이 여러 송이 보였다. 부는 바람에 부들부들 떨고 섰는 모양이 발레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백조들처럼 보였다. 주인공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독무를 추는 동안 팔과 다리를 올리고 미동도 하지 않고 서있는 코르드발레(corps de ballet)단의 무용수들! 발레단 중에서 솔로를 추지 않는 무용수들을 집단적으로 부르는 명칭이 코르드발레라고 한다. 코르드발레의 발레리나들은 같은 순간에 같은 스텝을 추며 일사불란한 균형 잡힌 동작을 전개하는 일이 많으며, 솔리스트나 다른 발레리나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꼼짝 안하고 포즈를 취하고 서있는 동안에 그들의 온몸이 아프고 부들부들 떨린다는 사실을 최근 전파를 탄 KBS캠페인에서 알게 되었다.

 

   이가영O.V)  저는 유니버셜 발레단 코르드발레 22살 이가영입니다.

                       코드발레는 주역이 채우지 못하는 남은 2%, 3%를 채워주는 뭐 배우로 따지면 엑스트라죠.

                       작품 끝나고 나서 커튼콜을 정말 부들부들 떨면서 2분동안 버티고 있어요.

                       무릎이랑 발목이랑 허리랑 목이랑 다 아파요.

                       군무하면 30명, 남들이 보면 병풍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튈 수 있는 사람은 한두 명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코드단원들이 아 ‘난 안 될 거야’

                       이렇게 생각을 했으면 코르드발레가 아예 없었을 거예요.

   (KBS 캠페인_한국사람_코르드발레리나 편_2018_카피①)

 

KBS 캠페인_한국사람_코르드발레리나 편_2018_스토리보드①

 

KBS는 작년 여름부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망을 담는국민의 마음이라는 캠페인을 제작해 방송하고 있다. 어머니, 환경미화원, 소방구조대, 음악선생님, 아파트 경비원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작가가 흑백으로 찍은 사진을 편집해서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평범하지만 자기만의 사연이 있고 스스로 선택한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다. 통상 방송사의 캠페인은 상업광고보다 시간이 길고 긍정적이고 공익적인 내용을 담게 마련이다. ‘국민의 마음캠페인도 너무 당연한 결론, 착한 이야기만 모아 놓아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걸 알면서도 캠페인이 보여주는 주인공 아닌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눈가가 젖기도 한다.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가영O.V)  내가 지금 이 무대에 서 있는 게 행복하고 공연하게 된 게 너무 행복한 거예요.

                       이 관객석에서 박수가 내려오는 느낌, 그 압도감을 잊지 못해요.

                       조연한테도 그만큼 큰 박수가 오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거든요.

                       저는 주인공보다는 주인공처럼 빛날 수 있는 조연이 되고 싶습니다.

   (KBS 캠페인_한국사람_코르드발레리나 편_2018_카피②)

 

KBS 캠페인_한국사람_코르드발레리나 편_2018_스토리보드②

 

   자막)            코드 발레리나 이가영(22) 서울특별시

                       나는 주인공 뒷배경춤추고 싶지만 뒤틀린 몸으로 서 있어야 하는 내 자리는 언제나 가장자리

                       주인공에 가려져 나조차 나를 찾기 힘들지만 그래도 무대에 오르면 언제나 꿈을 꾸는 나                       

                       결국 쏟아지는 모든 박수는 내 것이 된다

                       자리가 어디든 어떤 배역이든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나는 언제나 주인공이다

   (KBS 캠페인_한국사람_코르드발레리나 편_2018_카피③)

 

KBS ‘국민의 마음캠페인 중 다른 하나인 박영관의 스토리는 조연이 결국 주인공이라는 뻔하지만 당연한 진실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박영관은 30년 동안 이발소 없는 산골마을에 한 달에 한 번 찾아가 이발봉사를 하고 있는 50년차 이발사이다.

 

박영관O.V) 더덕 캐러 갔어요, 산에.

                       그 산골짜기가 아주 깊더라고요.

                       머리 막 이렇게 지고 막 완전 산적 같더라고요.

                       참 보기가 딱 안타까워가지고 내가 머리를 함 깎아보자…

                       애들까지도 줄 서 가지고 머리 깎을라고. 그래 그 국수도 해먹고 비빔밥도 해가지고 고맙다 하면서…

                       시초할 때는 한 50명 가까이 됐어요.

                       지금은 다 돌아가시고 사람 한 대여섯 명 밖에 없어요.

                       그게 참 진짜 안타까워요.

                       비가오나 눈이오나 뭐 진짜 꾸준히 저걸 했어요.

                       봉사라고 뭐 그렇게 생각 안 하고 내가 좋아서 계속 하고 있습니다.

                       딴 건 없습니다.

   (KBS 캠페인_한국사람_50년차 이발사 편_2017_카피①)

 

KBS 캠페인_한국사람_50년차 이발사 편_2017_스토리보드①

 

   자막)            50년차 이발사 박영관(63) 대구광역시

                       30년 전 운명처럼 만난 가위손과 산골 손님

                       한 달에 한 번 산골 이발소가 문을 엽니다이발이 끝나면 마을에 피는 꽃 미남

                       세월도 가고, 사람도 가고 나도 가겠지요

   (KBS 캠페인_한국사람_50년차 이발사 편_2017_카피②)

 

KBS 캠페인_한국사람_50년차 이발사 편_2017_스토리보드②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던 때가 있었다. 봄이 오면 와글와글 피어나는 봄 꽃들이 내 모습 같던적이 내게도, 있었다. 가요 프로그램 순위에 오르는 곡들을 가사까지 모두 알고 잘 나가는 연예인들 이름을 줄줄이 외우던 시절. 유행이나 트렌드가 뭔지 굳이 의식하지 않던, 세상이 변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두려울 것 없던, 스무 살 시절지나고 보니 이제 알겠다. 그 때 나는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도 스스로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는 것을. 그 시절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나는 군무를 추는 코르드발레의 발레리나처럼 엑스트라가 되었다. 지금 나는 반짝이는 20대를 살고 있는 내 아이들의 조연이고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엑스트라다. 나이 든 나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분들이나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열정을 다하는 이들 뒤에 병풍처럼 서있는 이름없는 무용수가 되었다.

봄이 되면 화사한 개나리나 진달래, 벚꽃 아래에 있는 아주 작은 바람꽃이나 괭이눈, 현호색에 눈길을 주게 되었다. 그 낮고 소박한 야생화처럼 나도 내세울 지위나 자랑할 재산도 없는 조연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명 발레리나처럼 넘어지지 않으려고 부들부들 떨기도 하면서 착실하게 서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Jpy0ZF999s

(KBS 캠페인_한국사람_코르드발레리나 편_2018_유튜브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t9YrjyIHZmM

(KBS 캠페인_한국사람_50년차 이발사 편_2017_ 유튜브링크)

http://koreanarchive.kbs.co.kr/?mobile#person1

(KBS ‘국민의 마음캠페인 공식 홈페이지)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주)프랜티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