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6. 17:29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Identity of the City ②
I. Seoul City, traces of the past to the present in history
‘도시 서울, 역사 이전의 흔적부터 지금까지’는 위에서 이야기한 세 개의 코어를 전제로, 그 결과로써 도시가 만들어진 세 개의 시기로 나누어서 전개하고자 한다. 첫 시기는 도시 서울의 원형이 만들어지기 이전, 두 번째 시기는 조선시대의 수도로서 도시 원형이 구축되고 그 원형의 구조 안에서 자기 진화가 진행된 500여 년의 고전시대, 세 번째 시기는 근 현대 시대로, 20세기 100년의 시간 동안 진행된 도시의 변형, 근대화 및 현재의 모습이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이 시대들의 비교는 도시 서울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물리적 형상으로서의 존재에서, 형이상학적 원리와 자연에 순응하는 원칙이 부여된 도시로 만들어지고, 500년을 지속하고, 이후 100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전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알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며, 또한 미래를 열어야 하는 지금, 도시 서울이 어떠한 과제를 직면하고 있는지 또는 직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남긴다.
1. 조선시대 이전, 한반도 중앙의 지리적 위치와 한강의 존재로 중요했던 서울
기원전부터 조선시대가 시작되는 14세기 전까지 한반도에서 개별 왕조국가들의 영역 변화는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이 수도였던 적은 없었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 3개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영토 영역의 변화를 살펴보면, 한반도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위치와 타 지역과의 연결을 위한 자원인 한강의 존재로 서울은 항상 중요하게 고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울에는 이 기간 동안의 흔적으로 동측에 백제시대, 4대문 안에 고려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2. 조선시대, 수도로서의 도시 한양 500년
■ 도시계획의 원칙들
‘수도로서의 도시, 한양’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측면에서의 계획적 기준이 적용되었다. 적용된 기준은 오랜 시간 중국과의 교류에서 한국에 전파된 유교(주례고공기, 음양오행설)와 도교(풍수지리, 도참사상)의 원리들로 각 사상의 원칙들은 서로 연계되어, 추상적 우주론과 자연관을 추구하던 한국과 고대 중국의 철학적 접근이 종합적으로 결합된 것이었다.
첫 번째 원칙, 철학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 입지의 선정, 주요 기능의 배치, 현대 도시와 그 속성에서 가장 구분되는 형이상학적 도시로서 완성된 상징체계에 관한 기준
풍수(風水), 한국의 전통적인 지구관이 자연을 생명체로 보는 철학적 은유였다면, 풍수는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발견하여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과학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두 가지 사상의 결합, 즉 자연에 대한 한국의 전통 철학적 요소에 산, 물, 땅, 인간을 다루는 풍수는 우주의 움직임을 위해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원칙을 도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풍수의 원칙에 따르면 서울은 명당이자, 왕궁이 입지하는 수도로서 가장 좋은 장소로 고려될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였다. 우선, 산의 존재였다. 북쪽과 남쪽 산이 주요 산으로 간주되고, 도심에 모여서 내상수(청계천)가 되는 물이 외상수(한강)로 흐르고, 내사산, 외사산이라 불리는 두 겹의 산지 지형 구조를 볼 때 내사산 북쪽 산기슭에 있는 곳이 ‘혈’이고 이 지점과 내상수 사이는 왕궁을 건축하기에 충분히 좋은 곳이었다. 모든 조건이 부합했지만, 풍수의 명당 원칙 중 부합하지 못했던 왕궁 주변의 ‘물(水)’의 부재는 인위적으로 금천(禁川) 만들어서 풍수의 원칙을 충족하도록 하였다.
주례 고공기는 주요 도시 기능의 위치, 방향, 도시 기능들의 관계를 결정했다. 정사각형의 도시는 2개의 수직선과 2개의 수평선으로 9개의 사분면으로 나뉘고, 중앙의 정사각형 영역은 왕의 영역, 북쪽은 시장, 왕궁의 오른쪽에는 종묘, 왼쪽에는 사직이 있는 구조이다. 주례 고공기의 원칙들은 한양에서는 풍수지리에 따른 왕궁의 위치, 지형적 상황에 맞게 조정되었다. 풍수의 원칙에 따라 선택된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대지는 산의 북쪽 아래에 있는 왕궁의 위치로 인해, 북측 시장입지가 어려웠고, 한양에서의 시장 영역인 종로는 도심의 중심영역 동-서 방향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은 도시의 상징체계를 완성하였다. 유교의 다섯 지향점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에 의해 인도되는 사회적 관습에 따라 동문(興仁門)은 나무와 인내, 서문(敦義門)은 금속과 선함, 남문(숭례문, 崇禮門)은 불과 예절, 북문(숙정문, 肅淸門)은 물과 지혜, 종로의 보신각(普信閣)은 땅과 정절, 로 도시적으로 귀속된 주요 요소에는 특정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두 번째 원칙, 도시의 기능적 역할에 관한 것으로 지형적 조건과 지리적 위치에 대한 고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토 정복 전쟁이 만연했던 고전시대의 모든 도시들은 특정한 방어 수단을 찾아 도시를 건설했다. 한국의 산악 지형은 방어력이 뛰어난 도시 건설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한국의 고대 도시들은 대부분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건설되었다. 풍수지리의 명당 조건이었던 서울의 내사산, 외사산의 존재는 전쟁 시 도시의 이중 방어막 역할을 하였으며, 능선을 따라 쌓은 성벽은 도시의 경계가 되었다.
또한 한양은 수도와 타 지역 간의 편리한 연결성을 보장할 수 있는 도시의 지리적 위치 측면에서도 고려되었다. 중앙 집권적 왕조시대의 수도로서 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의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양은 수로로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한강의 존재와 한반도의 중심적 위치라는 두 가지 장점이 있었다.
■ 도시의 형성
• 도시 영역
도시를 둘러싼 내사산은 도시의 경계가 되었다. 내사산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성벽 안의 면적은 17.9㎢로 조선 초기의 행정구역은 5부와 52방으로 나뉘었으며, 외곽을 포함한 도시권역은 도성의 경계로부터 10리인 4㎞ 거리, 면적 250㎢로 성저십리에 형성되었다.
• 공간 구조
행정도시이자 수도인 한양의 주요 기능은 궁궐과 인접하여 배치된 일련의 관아들, 종교적이고 철학적 의미에서의 조상과의 관계를 공간적으로 재현한 종묘와 사직, 소비와 교환이 그 원동력인 도시의 주요 기능, 시장의 배치가 풍수지리와 주례 고공기에 의해 우선 배치되었다. 주작대로 앞의 경복궁, 종로에서 연결되는 동대문, 남대문로에서 연결되는 남대문 등 각 방향의 상징적 건축물들은 거리의 공간성을 완성한다. 이 3개의 요소에 의한 T자형 도로 형태는 주요 도로와 보조 도로, 보조 도로 사이의 만남과 좁은 길들과 만나며 거리와 비율에 따라 반복된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도시에는 청계천과 한강으로 이어지는 소하천과 물길이 많아 서울은 ‘물길의 도시’였다고 정의할 수 있다. 수많은 물길들은 그 옆의 길들과 평행하게 도시를 흐르며 물길만큼의 다리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 청계천과 종로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수많은 남북축의 물길과 그 옆의 좁은 길들이 연결되는 핵심 영역으로 도시의 동서 축을 강화하고 이후 도시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도시 구조를 완성한다.
• 공간 유형
주요 기능과 그 기능들을 연결하는 도로의 배치에 의해 도시의 구조가 결정되고, 도시의 남은 부분에는 주거지 형성을 의한 토지 세분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왕조시대의 토지분배는 계층에 따른 신분의 위계에 따라 이루어졌다. 주요 도로에는 상업공간, 행정기관의 공간을 배치하고, 지형을 따라 유기적으로 형성된 이면도로변은 주거지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공적공간에서 사적공간은 수평적으로 그 위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공적-사적 공간의 수평적 위계관계는 주택 등 건물 내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었다. 모든 건물은 문의 위치에서 창의 배치와 열린 공간에 이르기까지 풍수의 원칙을 따르며, 신분의 위계에 의해 결정되는 공간의 위계는 크기에서, 유형에서 복제되고 반복되었다. 수평적으로 이어지는 공적-사적 공간의 배치로, 중요한 요소들은 건물의 내부에 배치되어 외부로 노출되지 않으며 외부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표식은 대문이었다. 대문 외에 도시의 경관을 만들어내는 건축적 표식은 도로와 면한 경계벽으로 때로는 건물의 일부인 벽이기도 하다. 이 경계벽에 의해 구성되는 도시 내 필지들은 규칙적인 기하학적 형태를 갖지 않으며, 도시 내에 유기적인 공간성을 형성한다. 규칙적인 기하학적 형태와 대칭은 ‘칸(間)’의 모듈에 따라 지어진 건물의 디귿(ㄷ) 또는 니은과 미음(ㄴ, ㅁ) 모양에서 찾을 수 있다. 건물은 한 층 이상 지어지지 않았으며, 더 커야 할 때는 수평으로 확장되며, 공간의 위계는 미세한 바닥 높이로 구분되었다. 공간은 형태와 용도에 따라 구분되어, 여성과 남성을 위한 공간, 방문객을 위한 공간, 주인과 하인을 위한 공간 등을 구분하는 명확한 원칙에 따라 만들어졌다.
건축물의 존재는 자연과 접촉하는 존재로 수직적 관계(땅, 기초, 바닥, 내부 공간, 지붕, 하늘)와 수평적 관계(내부 공간,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을 나누는 섬세한 종이와 창살, 외부 공간, 열린 문, 창, 마루를 통해 멀리 보이는 외부 풍경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차경 방식 등)는 모든 요소에서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즉 도시의 구축에서 자연의 힘과 질서를 따르듯 집의 모든 공간은 항상 자연과 연결되어 소통한다.
• 도시조직
도시의 형태가 놀리 맵과 같은 솔리드 부분과 보이드의 관계에 의한 공간적 구조로 이해되는 유럽 도시의 해석 개념은 한양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건물의 파사드가 도로를 마주하고, 건축물의 매스가 도시 형태를 형성하는 유럽에 비해 한양의 건물들 자체는 도시 형태에 기여하지 않는다. 도시형태를 만들어내는 귀납적 요소인 도시조직들, 즉 골목길들은 건물이 있는 필지를 연결하는 도로망과 건축물이 있는 필지를 에워싸는 담벼락에 의해 결정된다. 이 골목길 공간은 모두의 사용을 위한 열린 공공 공간이 되기도 한다. 주택의 기하학적 형태는 유기적인 도시조직 형태와 함께 서로 대조되며, 두 개의 다른 도시 리듬을 만들어낸다. 나무 구조의 도시조직은 17세기 이후 인구 증가로 작은 도로 사이의 여유 공간은 높은 밀도로 점유되며, 유기적이고 불규칙한 형태로 진화한다.
• 외부공간
한양의 오픈 스페이스는 특정한 성격이나 형태로 정의되지 않는다. 근대 이전, 사람들의 만남과 휴식을 위한 공원이나 광장으로 구분된 공간은 없었다. 만남의 공간은 주로 시장이었으며, 한양에서 이런 공간은 크고 작은 가게들이 많이 줄지어 있는 시전이 있는 종로, 조선 중기 이후 형성되는 동대문과 남대문 경계영역의 시장들이었다. 경복궁 앞 주작대로는 광장과 같은 성격을 띠지만 궁궐과 주작대로변의 관청을 출입하는 귀족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만남의 장소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은 종교건축인 사찰이다. 조선 시대 불교는 선종 불교로 사찰의 대부분이 산속에 있어 도시의 주요공간은 되지 못했다. 산, 강 등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곳이지만, 이 장소 역시 신분에 의해 그 장소는 제한되었다. 왕조시대의 수도, 행정도시로 건설된 한양의 도시계획에 도시 거주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외부공간은 고려되지 않았다.
■ 진화하는 도시 공간
한양은 1394년부터 일제강점기인 1910년까지 500여 년 동안 지속된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경제발전으로 인구가 증가하더라도 도시 구조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15세기, 인구의 증가와 도시화 1540년 서울 정부는 창덕궁을 확장하기 위해 10,000채의 집을 철거하며, 당시 서울 인구는 10만 명 중 약 20%가 집을 떠나야 했다. 이로 인해 어려워진 백성들의 삶을 돕기 시작했고 한양 일대에 만든 일자리 확대로 서울로의 인구이동이 증가하며 성저십리 지역의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17세기~18세기, 도시의 파괴와 재건 200년의 평화를 누린 후 임진왜란(일본 1592-1598), 정묘호란(중국 1627년), 병자호란(중국 1636년), 그리고 1589년과 1624년 두 번의 민란, 1728년, 1811년, 1862년에도 이어진 반란이 일어났다. 한국 영토는 특히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고 가장 큰 영토는 바로 서울이었다. 종묘, 3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종각을 비롯 도시 북부의 거의 모든 가옥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경복궁은 23년(1602-1625) 만에 복구되었으나 도시를 이전 상태로 복원하는 데 150년이 걸렸다.
18세기, 상업도시화 17세기에 있었던 민란들로 왕권을 중심으로 한 한국 사회의 체제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의 위계적 사회체계와 직업의 변화, 신분질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양한 상품의 전국적 거래는 보부상의 출현으로 상인들의 역할은 확대되었으며, 제조업과 무역의 발달로 도시에서 생산되거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품이 풍부해지면서 서울은 행정적, 정치적 도시에 머물지 않고 교류가 많은 도시, 즉 상업 도시로의 변화를 시작했다. 이는 도시의 개발 및 확장의 원인이 되었다. 상업의 성장과 농촌 인구의 수도로의 이동은 주변 지역의 도시 밀도를 증가시켰다. 확장의 방향은 남대문 영역에서 시작되며, 성저십리 일대가 주거지가 되었고, 한양을 중심으로 위성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세 개의 영역으로 구성된 도시의 영역구조는 원래의 성격을 잃지 않고 유지되었으나, 조선 말기인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인 변화를 시작한다.
■ 한양의 도시성
점진적으로 읽혀지는 도시경관을 형성하며 자연과 땅의 접점으로서의 도시
한양에서는 산만이 경관으로서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산은 도시의 어느 위치에서나 방향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였으며 네 개의 문과 궁궐을 향했다. 또한 산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며, 그 정상은 하늘과 인간의 접점이었다. 이러한 유기적 형태의 자연 지형에 따라 형성된 도시구조로 한양에서의 경관의 의미는 자연과 인간, 나와 타자라는 두 극단의 세계가 만나는 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양의 도시형태는 폐쇄된 담장 안에서의 유기적, 기하학적 형태의 결합이다.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성벽으로 인해 도시는 마치 산 안에 숨듯 폐쇄적이기도 하다. 도로망의 구조는 동일한 줄기에서 모두 분기되는 구조로, 개별 거리 사이에는 상호 연결이 없고 도로의 단일 지점을 통해서만 연결되는 나무의 형태구조와 같다. 한양에서는 사물이 한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함께, 외부로부터 그 공간에 들어서면서 점진적으로 발견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유기적인 형태에서 기하학적인 형태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점, 선, 면의 경관들을 발견한다.
상징체계가 만들어낸 형이상학적 개념의 도시 수도로서 필요한 상징화는 이 시대의 종교적, 철학적 지향점과 그 결과로 만들어낸 도시의 형태구조로 완성되었다. 도시 구조를 형성하는 모든 요소에 담긴 의미들은 한양이 유지되던 500여 년간의 사회적 관습과 함께하며, 이 의미들은 이 한양의 도시문화로 우리들에게 그 영향을 남긴다.
공간들의 반복과 복제가 만들어내는 도시리듬
궁궐을 위한 넓은 땅과 그 땅 위에 펼쳐진 2차원 수평적으로 확장된 궁궐의 공간 시스템, 궁궐 앞의 대로, 신분에 따라 점유된 토지에 따라 형성된 주거지와 종로의 시전 등으로 형성된 도시 한양은, 1394년 조선의 수도로 정해진 이후 단순한 도시 구조와 자연 지형에 따라 형성된 복합적인 도시조직 등을 형성하며 그 삶을 시작하였다. 내부와 외부를 분리하는 연속적인 경계와 공간의 계층적 구조로 형성된 한양은 풍수의 원리 안에서 크고 작은 규모 모두에서 동일한 원리로 복제되며 도시를 형성하였다. 산이 도시의 경계 역할을 했듯이, 또 건물의 외벽, 필지의 담벼락은 내부와 외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하듯이, 서로 다른 크기, 서로 다른 요소로 반복되는 이러한 양상은 대상과 대상 사이 영역성의 경계들을 무한히 증가시키며 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성의 도시 리듬을 부여한다.
한양의 도시 형태는 내부와 외부 공간, 규칙적이고 유기적인 기하학,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두 가지 상반되는 요소가 반복되는 이중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
글. 김선아 Kim, Seon-ah (주)스페이싱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김선아 건축사·(주)스페이싱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주)스페이싱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대표로, 1988년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및 2001년 베니스건축대학(IUAV), 2008년 로마 국립대학(La Sapienza,Valle Giulia)을 졸업했다. 대한민국 건축사이자 이탈리아 건축사, 도시계획학 박사이다. 현재 서울시 공공건축가, (사)한국건축가협회 스마트 도시건축위원장, (사)한국도시계획가협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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