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 쉬는 건축여행 ⑤예산지방의 발전과 시가지형성과정 2022.10

2022. 11. 2. 14:10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 living and Brenthing Tourism for Architecture
⑤ Development of Yesan Local Area and Urban Formation Process

 

1. 지도상의 변천과정 ‘예산’
조선시대 후기의 도시(고을, 읍)들은 규모면에는 대도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작아 대도시처럼 시가지가 둘러싼 내부를 채워가면서 시가지의 외곽경계가 위요의 경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가지 확산은 중심확산, 앞방향확산, 선형확산(중심, 선형확산 1방향, 선형확산) 중심에서 양방향, 시가지 이동, 무변화, 기타 등으로 8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다른 유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예산의 경우는 그림과 같이 유형 4인 선형확산-1 방향에 해당하는 것으로 구시가지 1910년대 구시가지는 완전하게 위요된 입지형태가 갖고 있던 관계로 위요 내에서 시가지 확산이 불가능하여 서쪽으로 선형의 시가지를 확산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시가지 확산을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입지형태가 제공되고 있으나 분지를 벗어나 개방된 서북쪽 방향인 주교리 산성리 쪽으로 선형확산 단계로 옮겨가야 할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이상구 1993



(1) 시가지 확산의 유형

분지를 벗어나 개방된 서북쪽 방향인 주교리 산성리쪽으로 선형확산단계로 옮겨가야 할 단계였다. 요약하면, 예산시가지는 중심확산형이라 볼 수 있다. 예산은 분지에 위치한 읍으로 구시가지(1910~1945년대)의 중심으로 2킬로미터가 완만한 평지이나, 분지의 중심에 낮은 구릉으로 입지하던 시가지가 확산하여 거의 분지를 채워버린 경우에 해당된다.

(2) 예산의 입지형태와 신·구시가지의 관계
일제는 예산을 앞으로는 서쪽의 광활한 평야와 근거리에 접해 있기에, 새로 조성된 신시가지에 철도역이 위치한 관계로 구시가지(이미 도시계획에 의한 구획정리가 이루어진 상태)를 기점으로 신시가지가 형성되어 시가지의 중심으로 선형으로 이동될 여지를 만들었다. 따라서, 예산은 주변사방으로 산이 위요하고 있는 관계로 중심 확산이 입지형태상 불가능함으로 서쪽으로 계곡을 따라 마치 터져 나갈 듯이 확산 해 나가도록 계획이었다.
한편, 중심에 구시가지가 위치하고 2킬로미터 떨어진 주교리 근방에 1922년 사설철도인 경남철도가 예산 개통으로 도로를 신설하고 신시가지를 구상했던 모양이나, 그 당시 구시가지 주민들의 많은 저항에 부딪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예산은 물리적인 형태에 무관하지 않게 고유한 특성을 갖고 주변의 변화에 맞춰 계획적으로 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충청남도 도로계획


(3) 시가지 형성과 입지 형성

예산군 내 도로계획 확대도면

<철도부설이전과 이후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비교>

1911년&nbsp;지적도(1912년&nbsp;10월&nbsp;13일&nbsp;행정자치부&nbsp;정부기록&nbsp;보존소)
부호&nbsp;:&nbsp;0.&nbsp;면사무소&nbsp;문학교&nbsp;/&nbsp;1.&nbsp;우편소&nbsp;목시장&nbsp;/&nbsp;1914년&nbsp;축도동14전&nbsp;제작.&nbsp;1927년&nbsp;1월&nbsp;3일&nbsp;발행&nbsp;/&nbsp;저작권조선총독부보관&nbsp;수원국립지리원

일반적으로 도시의 입지는 지형적 위치와 교통적 위치의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도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배후지가 필요하였다. 여러 가능성 중에서 실제 도시가 자리 잡는 위치는 교통 등 지역적 상황이 유리하거나 방위의 용이성, 물의 공급, 국지 기후 등 국지적 상황이 유리한 곳으로 선택된다.
1925년 예산은 구시가지 주변의 산들에 위요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구증가와 더불어 도시가 분산될 필요가 생겼다. 결국, 일제에 의해서 서쪽면에 예산역이 들어서고 새로운 시가지 계획이 이루어진다. 도시는 두 개로 나뉘어서 성장하게 되는데, 여기서 도시 간에 도로망에 의해서 예산역과 예산역 주변의 상권과 구시가지와의 상권이 상호연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완충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도로의 변천과정 ‘조선총독부 도로 규칙 제정공포’
(1) 도로의 개설
일제는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는 전문 11조로 된 ‘도로규칙’을 제정, 공포했다. 이 규칙은 그 후 1915년과 1920년에 개정했으며, 1938까지 시행하다가 동년 4월에 조선도로령을 제정하여 1945년까지 시행되었다.
이 규칙의 내용을 보면, 첫째, 도로등급을 1등, 2등, 3등 및 등외도로의 4종류로 나누고, 1등도로는 서울에서 도청소재지, 사단사령부 소재지, 여단사령부 소재지, 요새사령부 소재지 등 중요한 개항지 또는 철도정차정에 이르는 도로와 군사상 중요한 도로, 경제상 중요한 도로로 했다. 2등도로는 인접한 도청소재지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 도청소재지로부터 군청소재지에 이르는 도로, 도청소재지로부터 도내 중요한 지점, 철도정차장에 이르는 도로와 인접도 내 중요한 지점, 항진 또는 도로 상호간을 연결하는 도로로 했고, 3등도로는 인접한 부청 또는 군청소재지를 연결하는 도로 등으로 구분해서 건설되었다. 우리나라의 도로망은 경인, 경부, 경의, 평남 및 경원선 등 일제강점 이전에 이미 완공을 본 철도골격망에 따라 결정되었다. 철도선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도시에는 상공업이 일기 시작했다.

(2) 도로망의 변천과정
충청남도 예산군은 종래로 그 도내에 유수한 도회이나 시가가 산간에 있어 교통이 불편함으로 자연히 발전이 다른 도회에 비하여 늦어왔는데, 금번에 경남철도가 예산까지 개통되어 그 지방의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으므로 재유 관민이 설명만 드릴 것 같으면, 급속한 발전을 가히 기약할 것이라 하여 그 지방유지 인사는 이번 기회에 발전의 기초를 세우고자 여러 방면으로 진력한 결과로 공립농업학교의 이전과 보통학교의 신축과 급설 전화의 개통과 신구시가지를 연결하는 도로의 신설 등 여러 가지 새 사업이 진행 중이므로 이에 불구하고, 지방의 진면목이 일신하게 될 가망이 확실하다.
사업진행에 여러 가지로 방해가 되어 이러한 일에 진력하는 인사들은 도리어 저항의 원망을 받고 예산의 전도를 탄식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최근의 한 전례를 듣건데 정거장과 구시가를 연결하는 도로를 신설하는 공사는 면협의회의 결의로 면민의 부역을 내게 하여 진행하는 중인데 신사업 반대파의 한 사람인 모구당이 부역을 나온 인민에게 향하여 이 도로공사는 면협의원 기타 모모가 면사무소와 군청과 협력하여 사사 이익을 도모하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을 한 까닭에 장래에 이익 있을 것을 생각지 못하고 목전의 부역을 싫어하는 다수 인민은 이 말에 선동되어 성군 작당하여 면협의원 모씨의 집 대청에까지 돌입하다가 경찰서장의 설득으로 사실이 그렇지 아니함을 깨닫고 간신히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새로운 사업에 열심히 하던 인사는 점점 뒤로 물러서고, 따라서 여러 가지 사업의 진행에 방해가 되었다.
결국 예산지방의 발전할 좋은 기회를 공연히 잃어버릴 뿐 아니라 지방대에까지 아름답지 못한 일이 생기는 것은 장래에까지 피해를 끼치는 것이라 하여 충청남도에서는 상당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조사 중이라고 언급하면서, 도로건설에 따른 경제적 이권과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인한 발전이 자신들에게는 손해가 되지 않을까하는 의구심 등으로 인해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동아일보 1922년 6월 14일자에 대문제인 예산의 소요로 예산의 발전에 중대한 장애로 다루었다.

3. 예산 지방의 시가지 형성과정
(1) 사설철도, 경남철도 개통의 의의(천안→군산, 천안→강릉 계획안)
철도도입의 배경 및 건설에 있어서, 철도가 증기기관에 의해 처음으로 운행된 것은 1825년 영국의 스톡턴(Stocton)과 달링턴(Darlington) 사이에 부설된 27마일(약 43.5킬로미터)의 철도이다. 이 철도는 조지 스티븐슨(Gorge Stephenson)에 의해 설계된 것으로 주로 화물을 운반하였고, 아주 드물게는 승객을 태우기도 하였다. 철도가 일반인들에게 활발하게 이용된 것은 1830년 9월 15일 리버풀(Lierpool)과 맨체스터(Manchester) 구간 사이에 개통된 34마일(약 54.7킬로미터)의 철로이다.
철도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이후 동년 4월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가 기록한 일동기유에 의해서였다. 그 뒤 1880년 5월 21일부터 8월 2일까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문제로 일본에 다녀온 수신사 김홍집도 그의 복명서에서 국가운영에 있어서 철도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1889년 주미대리공사 이하영이 귀국하면서 철도모형을 보여주며 고종과 여러 대신들에게 철도의 편리와 효용을 역설한 이후 철도부설이 궁중에서 궤적으로 존의되었으며, 1892년 미국인 모오스(J.R.Morse)가 철도부설에 대해 추체적으로 논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은 1885년(고종 22년) 1월에 이미 한국전역을 답사하게 하면서 지세, 교통 및 경제상태 등을 조사시켰으며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거쳐 만주에 이르는 한반도 종관의 간선철도를 부설하기 위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있었다.

일제에&nbsp;의해&nbsp;건설된&nbsp;도로망(1928년)
일제에&nbsp;의해&nbsp;건설된&nbsp;철도(1945년)

아관파천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조선에서의 각종 이권이 외국으로 넘어가는데, 1896년 3월 미국의 모어스(J.R.Morse)가 경인철도부설권을, 동년 7월 프랑스의 휘브릴르(Fives Lile)상사 그릴르(Grille)가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게 된다.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모어스(J.R.Morse)는 경인간의 선로 측량에 착수하여 1897년 3월 22일 인천 우각리에서 한국인 인부 350명을 모아 놓고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이때는 러시아가 1892년 시베리아 철도를 기공하고 영국이 이에 대항하여 경봉철도(북경-신민돈,봉천)를 착공함으로써 극동에서의 양국세력의 대립이 철도를 매개로 하여 날카롭게 전개되기 시작한 때이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를 간파한 일본의 군부세력과 정치가들은 한국철도를 일본이 먼저 장악함으로써 일본의 방위선을 한반도까지 확대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경남철도 비교노선>

일본의 경부철도 부설구상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외교의 최우선 정책으로 확립되었는데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대륙철도론으로 확대되었다. 총 5차에 걸친 답사를 통해서 현재의 노선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한국 남부지역의 정치, 군사, 사회, 경제적인 지배권을 경부철도를 통해 장악하기 위함이라고 하겠다. 1906년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고 일본은 대륙침략이라는 군사적 목적, 한반도의 식민지화의 정치적 목적, 농산물·수산물·광산물·임산물 등의 수탈을 위한 경제적 목적의 달성과 종단역은 개항지나 항구로 연결하여 일본과 연락을 취하고 개항지의 많은 일본인들을 위한 교통시설을 도입하려 철도의 노선을 선정하고, 1945년까지 지속적으로 철도 부설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2) 철도의 개설
한일합병 후에도 일본은 한국의 쌀과 지하자원을 일본으로 실어가고, 일본의 공업제품을 들여오기 위해 많은 철도를 부설했는데, 남북종관철도와 항구를 연결하는 평남선(평양-진남포, 1910) · 호남선(대전-목포, 1914) · 경원선(서울-원산, 1914) 등을 부설했다. 부산·인천·마산·목포·군산·남포 등은 당시 이들 철도의 개통과 함께 급성장한 항구도시이다. (동아일보 1926년 2월 9일)

(3) 1928년 일제의 도로망과 철도망
1928년에는 관북지방의 여러 항구를 연결하는 함경선(원산-상삼봉)의 전 구간이 개통되어 한반도에 남북종단 X자형의 기본 철도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1931년에는 장항선(천안-장항), 수려선(수원-여주), 경북선의 김천-점촌 간이 개통되었다. 같은 해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각종 자원을 개발하여 대륙침략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동해남부선의 일부(부산진-울산, 1935), 전라선(이리-여수, 1936), 수인선(수원-인천, 1937), 동해북부선(안변-양양, 1937), 혜산선(길주-혜산, 1937), 만포선(순천-만포, 1939), 경춘선(서울-춘천, 1939), 평북선(정주-수풍 1939), 영동선의 일부(도계-묵호, 1940), 백무선(백암-무산, 1944), 중앙선(청량리-경주, 1942) 등을 부설했다.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남북종단 X자형의 철도구조는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최단거리를 확보해 한반도를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삼고 자원수탈을 쉽게 하려는 의도였을 뿐 지역간의 균형개발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일제의 철도부설은 도로교통시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철도시대로 돌입함으로써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지역의 불균형성을 양성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 철도는 국유철도였으므로, 국가자본주의의 발달이 민간자본주의 발달보다 앞섬으로써 경제발전 과정에 있어서의 파행성을 초래하기도 했다.
총5차에 걸친 답사를 통해서 현재의 노선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한국 남부지역의 정치, 군사, 사회, 경제적인 지배권을 경부철도를 통해 장악하기 위함이라고 하겠다.
1906년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고 일본은 대륙침략이라는 군사적 목적, 한반도의 식민지화의 정치적 목적, 농산물, 수산물, 광산물, 임산물 등의 수탈을 위한 경제적 목적의 달성과 종단역은 개항지나 항구로 연결하여 일본과 연락을 취하고 개항지의 많은 일본인들을 위한 교통시설의 도입을 위해 철도의 노선을 선정하고 1945년까지 지속적으로 철도 부설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4) 경남철도부설의 전개
철도개통 후에도 예산역을 잇는 기존도로를 2등도로로서 확장·개통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이처럼 예산은 전통적 한인상권을 유지하면서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유입되었다.

(5) 정치·경제적 의미_철도부설과 전국시장의 단일화
     (예산은 조선말 보부상의 중심거점이었다)
철도개통 이전에 인천과 서울에서 미곡집산지대 군산을 연결하는 해로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선장포구는 내포로 들어가기 위한 교두보였다. 예산은 내포를 경유해서 내륙으로 농산물과 생필품을 나르던 보부상과 도산매상인들의 집결지가 되어왔다.
1922년 6월에 경남철도가 부설되면서 인천으로부터 직접운송이 가능해지며 물길을 통한 기존의 물품운반로는 쇠퇴했다. 철도를 통해서 지속적인 다량의 물류수송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경남철도는 1922년에는 천안에서 신례원까지 개통되며 점차적으로 1924~1925년에는 광천과 보령까지, 1931년에는 군산까지 완전개통된다. 예산은 철도개통이후 상대적으로 거주인구가 증가했다. 통계로부터 1920년에서 1935년까지 예산군의 인구는 약 28,000명 정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일본인도 360명 정도 증가했다.
이것은 경남철도에서 당초 계획했던 철도역사위치가 구시가지와 많이 떨어져 있어서 한인 지식인과 지주들이 예산읍내와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 건설하도록 청원했고 그로 인해서 구도시 상권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한인들은 기성회(회장 성낙헌)를 조직하고 약 33,058제곱미터(1만평)의 정거장 터를 경남철도회사 측에 기부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4. 철도부설로 인한 교통도시의 발달
경부·호남선이 분리되는 대전, 경의선 종착역인 신의주·함경선·청진 등의 발달과 공주의 위축을 들 수가 있다. 공주로 경부선이 지나가지 않은 것은 1930년대 이후 대전으로 충남도청사가 이동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과거에 말들이 쉬어가는 교통의 요지였던 천안은 철도가 지나가는 역으로 바뀌는 등 도시의 발달과 재편이 가속되었다.
‘한국철도 100년사’에 의하면,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는 국철 경부선 천안역을 거점으로 하여 충청남도 서부해안가로 남하하여 전라북도 군산 대안에 이르는 구간과 천안에서 북상하여 안성에 이르는 영장 98.7마일(158.84킬로미터), 궤간 4피트 8인치 반(143.51센티미터), 동력이 중기인 철도부설을 신청하여 1919년 9월 30일 허가를 얻었다. 이 철도는 충청남도를 종단하고, 경기도 남부와 강원도 중앙부를 횡단하여 동해로 통하는 일대교통로를 형성한 것으로 장래성이 기대되었다. 또한 허가 받은 선로의 연선은 옥토에 연한 광대한 농지와 굴곡이 많은 커다란 해안선을 둘러싸고 있어서 해륙산업의 개발과 경제지역의 교역발전을 촉진하게 되어 괄목할 만한 철도가 되었다.
예산의 경우, 경남철도가 1922~1923년 전후로 개통된다. 이는 당시 예산지역 내에 구시가지를 벗어나 새로운 시가지를 구획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상권과 산업이 분리됨으로서, 도시권자체가 확장되고 거대화되는 계기가 된다. 경남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전구간이 완공된 후에는 예산중심의 물류중심지가 다른 지역으로 분할되면서 경제력이 저하될 소지가 있었으나, 해방이전까지 예산중심의 경제체제는 지속된다.
또한 철도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매일신보 1922년 7월 2일자의 기사를 보면, ‘경남철도 개통과 예산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예산은 충청남도의 일군으로 도의 중앙에 위하였으니 충남의 유수한 시장이요, 일광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교통의 불편으로 인하여 기 발전을 지의하지 못하였음을 훗날 유감으로 생각하였던 바, 경남철도가 기 개통되었음에 종하야 예산은 신예산이 될지며 예산의 장래는 실로 수송할 것을 기대함에 예산을 위하여 차에 통한 자사무천을 견하야 예산선이 개통되었으니 연장하여 홍성, 광천, 보령, 서천을 통하여 군산의 연안선지 등 할 것은 근한 장래의 군이요, 예산은 차 철도로 인하여 비로소 개발의 자서를 도약함에 족할지오, 철도에 의하여 위북은 천안으로 경부선과 이어지고 남은 금강유장곡에 의하여 군산과 연계하여, 이천선과 연결하게 됨으로서, 대평야, 인접한 예산의 장래는 실로 내구하여 결할 계기 충분하도다” 하였으며, 이를 연계한 예산의 소요를 겪으면서 신시가지와 연결되는 가로망이 형성되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5. 충청남도의 연도별 인구 변화 
1920년대 충청도의 인구는 논산, 공주, 연기, 대전 등의 인구가 상당히 높은 한편, 같은 상업권인 예산, 서산, 당진, 홍성의 인구는 기존의 홍성을 의존한 경제구조가 탈피된 모습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홍성의 인구는 서산과 예산의 인구보다도 적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경남철도 부설 이후 경제구조가 변화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예산지역이 그 주변지역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충청도 내 모든 지역에 철도가 부설되며 예산의 상업집산지로서의 역할은 군내만해도 신례원과 예산, 오가, 삽교 등으로 나뉘게 되었다. 인근지역들도 철도를 중심으로 유통과 문화가 발달하자, 예산의 중심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또 일본인들이 철도와 도로를 거의 유사하게 연계시켰다는 데서 결정적인 일제의 의도가 반영되고 있는데, 일본인들의 상품 소비지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품들의 유입이 용이한 경제구조를 갖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경제논리보다는 식민지 특유의 매판적 자본관을 가져야 했다. 때문에 일제의 의도적인 도로와 철도 건설도 예산 중심의 경제체제를 흐트러뜨리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는 일제가 한국경제를 철저히 수탈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예산의 인구현황은 1932년 3월 8일자 매일신보에 언급되고 있는데, 예산군 내 각면 인구는 1931년 12월 말 10만 353명으로, 1930년 12월 말의 인구수 9만 9,454명에 비해서 899명이 증가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각 면별 인구는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예산은 일본인의 경우, 1920년대에 비해서 1930년대의 인구가 6배가량 증가했으며, 한국인의 인구도 2만을 육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철도 개통 이후 교통의 요지로 새로운 상업도시의 등장과 농산물 중심 생산지로서의 역할이 증가됨에 따라 대규모 상권이 형성되어 일본인과 중국인, 외국인의 인구가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예산이 농업과 상업을 중심으로 한 근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했고, 이를 지지할 수 있는 인구가 충분히 유인되었기 때문에 일제하에서 충청권에서 대전, 강경과 더불어 중심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3) 예산군면 1932년 인구현황


(4) 충청남도 1931년 말 현재 현주호수현황(충청남도 발전사)


(5) 충청남도 주요시가지 인구 1931 말 현황(충청남도발전사)



참고문헌:
조선후기 도시입지 형태연구, 서울대 공박이상구 1993년
동아일보 1922.614, 매일신보(1922년) 1922년 7월 2일자
홍경희 「지리학」 1981. p105
일제의 한국철도 침략과 한국의 대응(1892-1945) 정재정 서울대학박논 1991년 p13
충청남도 발전사(1932년 3월 25일) 호남일보사간
일제시 소읍도시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김득수 연세대학 공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3년 8월

 

글. 김득수 Kim, Deuksoo 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김득수 건축사·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대표
영등포구지역건축사회 회장(3회 연속), 서울특별시건축사회 회장 직무대행, 대한건축사협회 이사·감사 등을 역임하고, 대한건축사협회 50년사 발간위원장을 지냈다. 서울 영등포구, 동작구 건축·민원조정 위원, 에너지관리공단 건축·도시·관광단지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예산읍 초대 명예읍장으로 위촉(1997.02.15.~2006.12.03.)된 바 있다. 서울특별시 시장 표창 5회와 대통령 표창(제200398호)을 받았으며, ‘일제시대 소읍도시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일제강점기 근대도시의 도시공간 변화 특성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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