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짓는 마음, 나는 건축사입니다 2025.5

2025. 5. 31. 09:35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The heart that builds life, I am an architect

 

 

 

© Shutterstock.com

 

막연함과 무지의 경계에서, 꿈을 짓다
막연했다. 아니, 어쩌면 무지했다고 해야 할까? 내 꿈이 결정되던 순간은 생각보다 단순했고, 충동적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속, 설계도 위에 고뇌하는 건축사의 모습이 마냥 멋있어 보였다. 그 시절 나는 ‘건축가’와 ‘건축사’의 차이조차도 몰랐다. 그렇게 어렴풋이, 그러나 단단하게 내 꿈은 정해졌다.
돌이켜보면, 5년간의 대학 생활은 마감과의 전쟁이었다. 공모전, 설계 마감, 학기 프로젝트… ‘다음에 보자’며 미뤘던 친구들과의 약속, 가지 못한 여행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안타깝게도 결과가 늘 빛났던 것도 아니었다. 지역 공모전에서 몇 번 우수상과 특선을 받긴 했지만, 이 길이 과연 내게 맞는지 끊임없이 자문했다. 그렇게 처음의 꿈은 점점 흐려졌고, 내가 진짜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목표가 희미해지자 나는 나태해졌고, 한때 타올랐던 열정은 서서히 식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내 울타리 안에는 ‘가족’이 들어와 있었다. 첫째의 유치원 가방, 둘째의 장난기 어린 눈빛, 그리고 이제 막 세상에 온 셋째의 숨결을 마주하며 문득 다짐했다.
현실에 안주하는 삶이 아닌, 다시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실패를 견디는 힘,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
십여 년간의 실무 경험은 내게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단독으로 이끌며 쌓은 경력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나는 주저 없이 사무소를 개업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생각처럼 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요즘 진짜 어렵다”는 말에 “언제는 쉬웠나”라며 퉁명스럽게 넘겨보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은 감출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가끔씩 연락을 주는 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매번 성심껏 상담을 드렸다. 진심은 통하는 법일까. 용도변경, 공장 증축, 대수선 등 소소하지만 분명한 일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 작은 일들이 쌓이며, 나는 점차 ‘다시 건축사로 살고 있음’을 체감했다. 비록 큰 설계는 아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었다. 그 삶을 읽어내고 공간으로 풀어내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여전히 공허함이 남아 있었다. ‘신축 설계’에 대한 갈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마침내 고대하던 단독주택 설계 의뢰가 들어왔다. 기뻤고, 흥분됐고, 마음 깊숙이 ‘이번만큼은 꼭!’이라는 다짐이 차올랐다. 아직 계약도 하기 전이었지만, 나는 땅을 답사하고 조사를 하며 여러 평면안과 모델링을 준비했다. 미팅은 긍정적이었다. 건축주는 내 계획안을 마음에 들어 했고, 젊은 건축사에게서 가능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수정된 안을 보내고 연락을 기다렸지만, 다시는 응답이 오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계약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욕심이 앞선 나는, 대가도 받지 않은 채 온 힘을 다해 기획업무를 제공하는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넘어졌던 자리를 기억하기에, 다시 걷는 길 위에서는 더욱 조심스럽고 담대해진다.” 그 경험은 분명 쓰라렸지만, 동시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나는 확신한다. 그때의 실수와 경험이 나를 더 현명한 건축사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것을.

“삶에 가장 가까운 나는 잡부 건축사입니다.”
건축사라면 누구든,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갈망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기회만 주어진다면, 여행지에서 마주한 인상적인 건축물처럼, 의뢰인의 요구를 담아내고 그 가족의 삶을 닮은 따뜻한 주택을 설계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이상과 다르다. 멀쩡한 땅에 신축을 의뢰하는 건축주를 만나는 일 자체가 얼마나 큰 행운인지, 이제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준비하고 있다. 언젠가 내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올 날을 기대하며, 그 기회를 온전히 즐기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오늘도 끊임없이 배우고 있다. 좋은 설계는 단지 ‘짓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읽고, 삶의 이야기를 듣고, 공간으로 되새기는 일이라 믿는다. 나는 지금 그 과정을 훈련 중이다.

지금의 나는,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건축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건축사사무소는 어려운 곳”이라며 문 앞에서 망설이던 옆집 아주머니는 지금은 가볍게 커피 하러 사무실에 편하게 들르시고, 땅을 산다며 몇 번씩 전화를 걸어와 귀찮게 했던 분은 지금은 고맙고 소중한 건축주가 되어 있다. “그때 귀찮게 해도 싫은 내색 없이 상담해 줘서 믿음이 갔다”고 말해주셨을 때, 이 일이 가지는 본질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렇게 용도변경, 전유부 분할, 해체계획서 작성 등 신축보다는 오히려 삶에 더 가까운 일들을 하며 나는 점점 ‘잡부 건축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부끄럽지 않다. 작고 평범한 프로젝트에서도 건축주의 삶을 이해하고, 세심하게 설계하며, 더 나은 공간을 만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내세울 만한 프로젝트도, 포트폴리오도 없는 새내기 건축사이지만, 나는 멈추지 않는다.
작고 조용한 사무실에서 느린 걸음이지만, 언젠가 나만의 언어로 누군가의 삶을 아름답게 설계할 그날을 위해, 계속 나아갈 것이다.



 

 

글. 김승진 Kim, Seungjin 퍼스트 건축사사무소

 

 

김승진 건축사·퍼스트 건축사사무소

 

퍼스트 건축사사무소 대표로, 건축주와 함께 건축을 만드는 과정을 소중히 여긴다. 우연히 시작된 인연을 소중히 하고, 화려함보다 진정성, 복잡함보다 명확함을 중시하며 그 속에서 작지만 정직한 공간을 담고자 한다.

1st_plan@naver.com · blog.naver.com/1st-pl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