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오딧세이 ㉔ 노동자의 외침마저 사라진 인천의 항·포구 2025.5

2025. 5. 31. 09:40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Incheon port and harbor where even the cries of workers have disappeared

 

 

 

공간의 성쇠는 시간의 문제일 뿐, 당연한 현상이다. 만석동 일대 항·포구들이 그렇다. 한때 흥했으나 고단한 쇠락의 때를 보내는 중이다. 화수부두, 만석부두, 북성포구가 당사자들이다. 매립으로 밀려나거나, 큰 공장에 가려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일제가 건설한 인천항이 한국전쟁 때 타격을 받아 미군 관리로 넘어가자, 반대급부로 이들 항·포구가 호황을 누린다. 하지만 호시절도 잠시, 인천항이 갑문 선거(dock)를 갖춰 컨테이너 항으로 변신한 1974년 이후 쇠락의 길에 접어든다. 2006년 탄생한 북항은 이들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육지가 된 고양이 섬 밖으로 만석부두가 밀려났고, 희미한 흔적으로 남았던 북성포구도 정겹던 옛 정취를 잃어버렸다. 화수부두도 화려하던 옛 명성을 추억할 뿐 한적한 어항으로 전락했다.
최인훈의 「광장」도,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도,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도 이들 포구와 동네가 배경이다. 삼남에서 올라온 세곡선이, 김포와 강화 사이 물살 사납기로 유명한 손돌목 지나기가 어려워 이곳 창고에 세곡을 부렸다. 부린 곡식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하여 ‘만석(萬石)’이 되었다. 바다와 얼굴을 맞댄 땅이었다. 고양이 섬과 뾰족한 곶이던 ‘괭이부리말’ 주변 낮은 간석지로 바닷물이 무시로 넘나들던 갯벌이었다.
포구가 자리한 갯골을 끼고 바다를 메워 큰 공장들이 들어섰다. 강제 병합을 전후해 시작된 매립과 매축은 100년을 넘어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 자리에 들어선 공장이 자체 부두와 짝을 이뤘다. 공간의 흥성은 ‘도시빈민과 노동자’라는 적나라한 이면을 낳았다. 공장과 부두 노동자들의 삶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난쏘공의 낙원구 행복동이다. 시인 이한수가 「똥바다」라는 시로 아픈 만석동을 쓰다듬는다. 생활하수와 공장에서 무단으로 방류된 폐수가 바다와 갯벌을 괴롭혔다. 그래서 ‘똥 바다’다. 온통 아픔으로 점철되었다. 바다를 아픔으로 떠안아야만 했던 낙원구 행복동의 삶에 가슴이 아리다.

화수부두 © 이영천

화수부두
어민이 모여 이룬 마을에, 수시로 물이 넘쳐 ‘무네미’라 불렀다. 여러 갈래 깊은 갯골은 고기잡이하는 작은 목선이 정박하기에 맞춤이었다. 이곳이 점차 포구로 번성한다. 1879년 인천 앞바다에 출몰하던 이양선을 방어하기 위해 군영 ‘화도진’을 만들면서 마을 존재가 드러난다.
한적한 포구가 언제 부두가 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개항 이후 제물포에서 밀려난 어선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포구가 활성화한다. 일제는 인천항 건설과 함께 간석지를 노린다. 만석동 일대는 물론 송현동, 화수동 해안을 무작위로 메워버린다. 그 자리에 공장을 짓고, 원료와 상품을 취급할 부두를 만들었다. 화수부두도 이즈음 생긴 것으로 추정한다. 일제 강점기 이 부두를 ‘나무 선창’이라 불렀다. 주로 땔감용 나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조선인 주도로 연료와 목재를 매매하는 인천연료(주)가 1939년 송현동에 설립된다. 이 회사로 인해 목재 유입은 더욱 활발해지고 부두에 시탄시장도 열린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시탄시장은 기능을 잃지만, 그 부지를 인천항을 보조하는 수입 양곡과 비료 하역장으로 사용한다.
부두의 황금기는 조기를 취급하던 때다. 한때 국민 생선 반열에까지 오른 조기는 1950∼70년대 무차별 남획된다. 이 시기 화수부두가 조기잡이로 번성한다. 조기 철이면 수백 척 고깃배가 들어와 조기를 풀어 파시가 열렸다. 연평도는 물론 전라도 칠산바다와 흑산도에서 잡아 온 조기다. 오랜 남획으로 1970년대 중후반 서해에서 조기가 사라지자 선단도 항구를 떠나버린다. 영종도와 강화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선과 새우젓 배가 들어오는 부두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지만, 이마저 소래포구로 떠나버려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만석부두 대성목재 © 인천시청

만석부두
본디 바다가 활처럼 둥글게 휘어 들어온 만(灣)이었다. 북성포를 아우른 이곳 해안가엔 크고 작은 포구가 여럿이었고, 동일방직까지 바다였다. 이곳 북서쪽으로 괭이부리 곶과 고양이 섬이, 남서쪽엔 개항기 외국인 묘지이던 북송 곶이 바다를 향해 돌출되어 있었다. 안으로 활처럼 휜 둥근 해안선은 무척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해안이 사라진 게 일순간이었다. 바다가 메워지고 큰 공장들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이때 ‘괭이부리말’이라는 이름만 남긴 채 곶과 고양이 섬이 육지로 변한다. 공장마다 딸린 여러 곳 자체 부두도 이때 생겨난다. 이 부두들이 1974년 인천항 완공 때까지 적체 화물을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 부두들 운명도 항·포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천항 축조와 북항의 등장, 그리고 공장이 바다로 넓혀지거나 옮겨가면서 모두 사라져 버린다.
한때 대기업이던 대성목재 공장 터에 만석비치타운 아파트가 들어섰다. 1936년 설립된 조선목재공업이 전신이다. 이 회사 원목 저목장(貯木場)이 만석 앞바다에 있었다. 외국에서 들여온 거대한 원목이 둥둥 떠 있었다. 화수부두가 연료용 목재 부두였다면, 이곳은 건축 및 가구용 목재 부두였던 셈이다. 만석동엔 공장 노동자와 하역 노동자가 뒤엉켜 살았다. 공장도 열악한 노동환경이었겠으나, 부두 하역은 훨씬 더 열악했다. 곡물 부두에서 포대를 메고 곡예사처럼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당시 사진은, 지금 봐도 아찔하다. 조선목재 저목장은 더 위험했다. 사람 몸통 몇 배 두께의 원목 위를 옮겨 다니며 일해야 했다. 거대한 원목이 빙글 돌기라도 하면 바다로 빠진 노동자는 큰 상처를 입거나 목숨을 잃기 일쑤였다.
일제 강점기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만석동을 중심으로 일었음을 당시 소설이 증언하고 있다. 부평이 배경인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 1970년대를 장식했다면, 1930년대 만석동엔 강경애의 「인간 문제」가 있었다. 소설은 작가의 체험수기라 해도 이상치 않으리만큼 적나라하다. 소설의 무대이던 동양방적이, 나중 동일방직으로 바뀐다. 1978년 동일방직에서 일어난 일명 ‘똥물 사건’은 그 시대 노동운동을 대표하던 상징이기도 했다. 1970∼80년대 우리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천지역 노동운동’의 유전자는, 일제 강점기 강렬하게 저항했던 만석동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북성포구 © 이영천

북성포구
여러 갈래 갯골이 흘러드는 바닷가였다. 이 갯골을 통해 어선이 드나들며 자연스레 마을을 이뤘고, 북성포라 불렀다. 그러나 1910년 강제 병합을 전후해 일제가 북성포 갯벌을 매립한다. 그들에 의해 이름마저 만석동으로 바뀌어, 북성포는 사라지고 만다. 지명을 되찾은 건 해방 이후다. 일제 강점기 때 인천역 주변과 월미도를 초대 일본 공사인 하나부사 이름을 따 화방정(花房町)이라 불렀다. 이를 지우고 되돌려 북성동이란 이름을 되찾아 지금에 이르렀다.
월미도를 잇던 북성동 갯벌이 1960∼70년대 우후죽순 메워져 창고와 공장들 차지가 되었다. 이때 여느 항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묘한 ‘十’자 모양 항로가 생겨난다. 매립 주체도 제각각이어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바다를 메워나가다 보니, 그리되고 말았다. 이를 ‘십자 굴’이라 불렀다. 인천항에 들어선 선거(dock)에 밀려, 십자 굴 동쪽 끝으로 작은 어선들이 모여들었고 덩달아 포구도 흥청거렸다. 그도 잠시, 연안 부두가 생겨나자 이곳 어선 대부분이 소래포구로 옮겨간다. 하지만 몇은 남아 창고와 공장 틈바구니에서 살아간다. 이때부터 이곳을 북성포구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노을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눈물 날만큼의 처연함을 선사한다. 포구는 이처럼 아련한 시간과 삶을 퇴적해 두었다. 뇌리에 추억이라 각인하고 있다.
이곳을 똥 바다라 불렀다. 공장폐수와 생활하수가 여과 없이 흘러들어 악취가 심했기 때문이다. 매립으로 뒤바뀐 주변 토지이용이 바다를 갉아먹은 셈이다. 계획 없이 바다를 메우면서 오·폐수 처리시설을 만들지 못한 탓이다. 똥 바다로 변한 십자 굴에 민원이 빈발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매립만이 능사였을까. 오·폐수 처리시설을 만들어 해결할 수는 없었을까. 냄새로 인해 결국 동쪽이 매립되어 十 자가 어정쩡한 모양새로 바뀌고 말았다. 매립으로 생겨난 십자 굴이 매립으로 다시 변형된 셈이다. 아이러니다. 그러함에도 과연 냄새가 잡힐까. 십자 굴로 흘러들던 오·폐수는 어디로 흘러갈까. 더 멀리 흘러가 그곳을 다시 똥 바다로 만드는 건 아닐까. 반복되는 갯벌 메우기, 슬픔의 시간을 언제까지 계속 갯벌에 쌓기만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