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30. 15:35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A arduous fight to preserve space becomes a new culture
마을이 정겹다. 낮은 집이며 구불구불 좁은 골목의 분위기가 아늑하다. 배다리란 이름은 더욱 그렇다. 주교(舟橋)라거나 선교(船橋)라는 일제가 강요한 지명으로 창씨개명(?)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잘 지켜낸 이름에 모든 게 담겨있다. 곧고 질긴 생명력을 발산하는 공간 정체성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겠다. 나라와 땅은 물론 모든 걸 빼앗겼어도 혼과 얼만은 내어줄 수 없다는 굳은 저항정신과 신념이 엿보인다.
제물포에서 쫓겨난 조선인이 주안 갯골 남쪽에 정착했다. 지금의 화수, 송현, 송림동이다. 금곡, 창영동의 배다리도 그중 하나다.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바다 건너 인천으로 몰려온다.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제가 만들어낸 유랑민이다. 인구가 늘어 도시화가 확산하면서, 가옥이 산꼭대기까지 점령해 나간다. 수도국산을 빙 둘러싸고 생겨난 달동네다.
150여 년이 지난 지금 무엇보다 반가운 건, 공간이 새살 돋듯 변화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헌책방을 중심으로 술 빚던 양조장에서 문화가 주조되고 있으며, 오랜 여관 골목이 마을 카페와 정원 등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예술가들이 찾아 들어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다. 이 모든 게 15년 고된 싸움이 바탕이었다니 더욱 놀랍기만 하다. 변화하는 공간에 젠트리피케이션이 염려스러우나, 비교적 동질성을 잘 지켜내고 있어 무척 다행스럽다.
학교와 철도
교육과 의료를 앞세운 개신교 진입 루트가 인천이다. 미국 감리회 소속 아펜젤러가 1885년 동인천에 내리교회를 설립한다. 이 교회 소속 존스 목사가 1892년 세운 자립예배당이 영화학당이다. 한국 최초의 서구식 초등 교육기관인 ‘영화학교’의 탄생 배경이다. 1910년 배다리로 이전하면서 지은 문화재인 교사(校舍)는 최근 수리를 마쳤다.
배다리는 조선인이 자립 교육에 가장 먼저 눈뜬 곳이기도 하다. 1904년 객주이자 선박회사를 운영하던 정재홍이, 쇠뿔고개에 조선 아동만을 위한 교육기관 천기의숙을 설립한다. 1907년 4월 인천공립보통학교로 문을 연 ‘창영학교’ 전신이다. 인천 3.1운동이 창영학교 학생 주도로 이뤄진 까닭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얼과 정신을 지켜내려 싸운 배다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 교사도 1922년 조선인 모금으로 지어졌다.
미국 북장로회 소속 알렌이 갑신정변 후 제중원을 설립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1890년 미국 관리가 되어 다시 조선에 온 알렌은 눈부신(?) 활약을 한다. 미국인 모스가 1895년 운산광산 채굴권과 이듬해 경인선 철도부설권을 차지하는데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후 미국 공사로서 조선의 수많은 이권에 개입한다.
도원역 북측 산꼭대기 전망 좋은 곳에 알렌 별장이 있었다. 하지만 재개발로 헐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도원역 남동쪽 큰길가에 ‘한국철도 최초 기공지’ 비석이 있으나 정확히 이곳이 아니다. 1897년 기공식은 숭의동 동인천교회 삼거리 알렌 별장 인근에서 이뤄졌다. 모스가 알렌을 어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초기 경인선은 지형 따라 구불구불했고, 알렌 별장 쪽으로 휘어진 쇠뿔고개엔 우각역이 있었다. 이 역은 1906년 일제에 의해 경인선이 직선화하면서 사라진다.
성냥공장
도깨비불이었다. 머리에 붙은 작고 붉은 인(燐)을 상자 갑에 그으면 불이 일었다. 얼마나 신기했을까. 배다리에 성냥공장이 있었다. 일본인이 1917년 10월 배다리 약 6,611제곱미터(2,000여 평)에 세운 조선인촌(주)다. ‘배다리 성냥 마을 박물관’ 자리다. 공장에서 일한 450명 노동자 중 350명이 여성이었다. 당시 성냥 재료는 독극물 일종인 황린으로 발화점이 낮아 불이 잘 일지 않았다. 손으로 만들어야 했기에 중독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1921년에서야 법으로 금지되어, 인화점이 높은 적린으로 바뀌게 된다.
노동 집약 산업인 성냥공장의 노동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적린 1만 개를 붙여야 60전을 받았다. 하루 14시간 노동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여기에 일본인 관리자의 멸시와 차별도 심했다. 1932년 5월 1일 노동절에 성냥공장에 격문이 나붙는다. 다음날 360여 명 노동자가 임금 인상과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며 파업에 들어간다. 일제는 회사를 폐쇄하고 3명을 잡아간다. 그러나 5월 9일 50% 임금 인상과 일본인 감독 배척을 요구하며 다시 파업에 나선다. 일제는 인근 공업지대로 파업이 확산할까 두려워 강경 진압에 나선다. 배후 조종 명분으로 10여 명이 극심한 고초를 겪고 파업은 동력을 잃고 만다. 이 파업은 이후 인천 지역 노동운동과 항일운동의 씨앗이 된다.
헌책방 거리
배다리에 헌책방이 생긴 건 해방 이후다. 자긍심과 얼을 바탕으로 형성된 교육기반이 헌책방 탄생 배경이다. 전쟁을 치르고 물자가 귀해지면서 헌책 수요가 급증한다. 집에 있던 헌책이 쏟아져 나온다. 폐허가 된 거리에 모여든 손수레와 노점상에서 이를 팔기 시작한다. 1950년대를 지나며 헌책방이 호황을 구가한다. 한때 40곳이 넘는 헌책방이 성황을 이룬다.
배다리 헌책방 거리는 인천을 대표하는 배움터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헌책방 거리는 지식에 대한 열망과 앞날을 가늠하는 지표였다. 학생들 덕분에 공간은 늘 활기를 띠었고, 헌책방으로 인해 배다리가 변화했다. 놀이터이자 만남의 장소였음은 물론 문화공간으로 인천 지식인의 산실이었다.
1970년대 이후 헌책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줄어든다. 빛바랜 책보다 잉크 냄새 물씬 풍기는 새 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시류에 밀려 헌책방이 하나둘 모습을 감춘다. 사라지는 헌책방과 함께 공간도 점차 활기를 잃어갔다. 겨우 몇 곳만 남아 화려하던 옛 명성을 추억할 뿐이었다.
헌책방 거리가 세간의 관심을 끈 건 아이러니하게도 인기 드라마에 등장하면서부터다. 매체 영향으로 주말이면 젊은이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공간에 활기가 돌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을 염려할 지경이었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이곳을 먹잇감 삼지 않은 건 다행이다. 이들의 공격에 공간이 버텨낼 힘이 관건으로 보인다. 그러함에도 배다리는 이미 다른 싸움으로 든든하고 충분한 자생력을 이미 마련해 놓고 있었다.
저항과 자생적 재생
배다리는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남다른 곳이다. 오랜 기간 같은 공간에 살면서 두텁게 쌓아온 공동체적 삶의 두께 때문이다. 어느 날 평온하던 마을에 풍파가 일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마을은 더 강한 결속력으로 뭉쳤고, 배다리에 더 강한 자긍심과 애착을 갖게 된다. 이렇듯 변화한 의식이 공간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2006년 인천시가 청라와 송도를 연결하는 산업도로를 개설하려 토지 보상에 착수한다. 도로가 평화롭던 마을을 둘로 갈라 쳤다. 산업시설을 잇는 도로라서 대형 트럭은 물론 24시간 차량 통행이 빈번하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이치였다. 고속화도로이기에 소음과 먼지 등으로 배다리는 그야말로 처참히 짓뭉개질 위기였다. 시민들이 일어선다. 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뜻있는 시민이 모여 ‘배다리를 지키는 인천시민모임’을 결성한다. 시민은 물론 각계각층 인사와 지식인, 예술가들이 조직적인 저항에 나선다. 관청에 수동적이던 배다리 주민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삶의 터전이자 애환이 서린 곳을 지키려 자발적으로 나선 걸음이다.
저항 과정에서 시민들 결속력은 더욱 끈끈해진다. 공간도 순기능을 발휘한다. 공간을 지키자는 지루한 싸움에 시민이 주인으로 나선다. 문화와 역사, 자긍심과 얼이 서린 곳을 지키고 보호하며 어찌 가꿔나가야 하는지를 몸으로 체득한다. 드라마로 배다리가 알려지기 전부터, 이런 힘을 바탕으로 공간은 차분히 변화하는 중이었다. 15년 동안 이어진 싸움에서 절반의 승리를 거둔다. 전면 무효화가 아닌 지하도로로 합의된다. 과정에서 겪었을 우여곡절은 불문가지다. 도로용지로 마을 일부가 사라졌으나, 지하도로가 2026년 예정대로 완공된다면 제법 드넓은 빈 땅이 생겨난다. 배다리가 다시 태어날 자양분인 셈이다. 이 땅은 배다리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얼마 전, 창영초등학교 이전 문제로 다시 한번 갈등이 일었으나 이를 유보하면서 봉합되는 양상이다. 역시 이전에 반대하는 시민모임의 힘이 컸다. 늘 그렇듯 자생적으로 뭉친 시민의 힘은 세다. 그리고 위대하다. 그 힘으로 공간의 지속성은 더욱 강한 추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 공간이 가진 역사와 문화, 삶의 터전으로서 정신적 가치가 활짝 피어날 것이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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