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오딧세이 ㉗ 백마역의 사랑과 낭만을, 오늘에 그리워하는 공간 2025.8

2025. 8. 31. 10:45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A space that misses the love and romance of Baekma Station today

 

 

 

정발산 아래, 경의선이 아담한 기차역 하나를 떨궈 놓았다. 백석과 마두에서 한 글자씩 따온 백마역. 덜컹거리는 교외선을 타고 신촌에서 한 시간 남짓, 논과 밭뿐인 벌판을 달리다 보면 나타나는 역이었다. 낮고 길쭉해 비좁은 이 역에, 언제부턴가 젊은이들이 미어터지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역에서 걸어 20여 분이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이 반겨주었다. 정발산에 기대어 살던 냉천과 설촌마을, 언덕 너머 밤가시마을이다. 청량리에서 한강 따라 대성리와 춘천으로 떠났다면, 신촌에선 경의선 타고 백마역으로 찾아 들었다. 시작은 소소한 우연이었다.‘화사랑’이라는 술집도 카페도 아닌 아지트였다. 화사랑이 입소문 타고 알려지자, 비슷비슷한 술집과 카페들이 마을 빈 곳을 채워나갔다. 마침내, 카페촌이 됐다.
사방으로 열린 벌판 한가운데 덩그마니 백마 카페촌은 언제건 목마른 청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구 같은 이곳에선, 나날이 예술과 담론이 젊음으로 부딪쳤다. 시와 문학이 침을 튀겼고, 사회과학 세미나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시화전이며 공연과 그림 전시가 수시로 열렸다. 타는 목마름으로 군부독재 타도를 목청껏 외치기도, 흥건히 적신 막걸리로 질풍노도의 열기를 삭이기도 했다.
사랑과 낭만을 찾아 설렘으로 모여드는 청춘도 부지기수였다. 연인끼리, 동아리가, 혹은 삼삼오오 찾아드는 젊은이들로 불야성을 이뤘다. 오가는 열차도 뜸해 철길 따라 걷는 데이트가 최고의 낭만이었다. 연인끼리 속삭이는 밀어에 석양보다 붉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내밀한 풍경도 있었다. 이른 저녁 열차가 끊어진다는 걸 이용하려는 음흉한 늑대들의 공작에, 철길 따라 40분 남짓 걸으면 버스 터미널이 있다는 걸 아는 여우들이 배시시 웃음 짓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요즘의 홍대에 버금가는 핫플이었다.

백마역 © 고양시청

백마 카페촌
가수 김광석이 속했던 〈동물원〉이 1993년 5-1집 음반에 ‘백마에서’라는 노래를 싣는다. 소탈하면서도 감수성 풍부한 그들 음악처럼, 노래는 애잔하게 지나간 사랑을 추억한다. 무대는 백마역 인근, 인적이 드문 어느 주점이다. 첫눈 내리는 겨울, 흔들거리는 경의선을 타고 백마 작은 마을에 닿는 모습으로 노래는 시작된다. 눈 덮인 논길을 걷고,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나누었던 사랑을 추억한다. 그렇다. 카페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이젠 첫눈처럼 흰 머릿결을 드리운 중년이 되어 옛사랑을 추억할 뿐이다.
홍대 인근에서 화실을 꾸리고 있던 서양화가가 있었다. 그가 경의선 타고 지나다 내린 곳이 백마역이다. 알 수 없는 어떤 기운에 이끌려 맹숭맹숭한 벌판만 열려 있는 곳으로, 1976년 자신의 화실을 옮겨온다. 화사랑의 탄생 배경이다. 주인장 김원갑 씨를 중심으로 홍대와 중앙대 미대 출신들이 먼저 판을 펼친다. 이후 그의 화실에선 무시로 미술 세미나가 열리고, 점차 전시회와 음악회를 곁들이는 장소로 변모해간다. 1979년 ‘그림이 있는 사랑채’라는 화사랑으로 간판을 내걸어 카페로 변신한다. 객이 많아지자 주인장 누이가 같이 화사랑을 운영한다. 카페촌의 탄생은 이렇게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신촌에 김현식이 있었다면, 강산에와 김C 등 무명 실력파들이 한 시절을 화사랑에서 보내기도 했다.
화사랑이 작은 성공(?)을 거둬 입소문이 날수록 공간도 같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썩은 사과’나 ‘고장난 시계’ 같은 독특한 간판을 내건 카페와 수십 개 주점이 자리다툼 한다. 일산신도시가 개발되기 전까지 신촌역을 떠나온 경의선은 무수한 젊은이를 백마역에 흩뿌려 놓았다. 당시 젊은이에게 카페촌은 낭만과 사랑, 열정을 내뿜고 변혁의 꿈을 외칠 수 있는 플랫폼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카페촌이 사라진 건 일순간이었다. 1980년대 말 불어닥친 주택난으로 맹숭맹숭하던 벌판에 일순간 신도시가 들어서면서다. 개발 등살에 떠밀려 백마 카페촌이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렸다. 많은 주점과 카페가 홍대 부근으로 떠났고, 카페 몇이 부득이하게 둥지를 옮겨간 곳이 풍동‘애니골’이다.

 

백마 애니골 입구 © 이영천

 

풍동 애니골
냉천과 설촌마을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신도시 경계를 벗어난 풍동의 옛 이름이 ‘애현’이다. 이를 애현골이라 부르다가 ‘애니골’이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신도시 개발을 피해 옮겨온 화사랑 등 몇몇 카페와 유명 DJ인 이종환의 ‘쉘부르’ 등이 자리하면서 백마 카페촌 2막이 이곳에서 재현된다. 70~80년대와는 또 다른 카페문화가 펼쳐진다. 젊은이들 위주 치열하고 열띤 토론이나 전시회가 사라진 대신, 감성 충만한 낭만과 서정이 공간을 채워냈다. 은은한 불빛에 통기타 소리가 한껏 완숙한 낭만을 배달해주었다.
개울 따라 2차선이 구불구불 흐르고, 도로에서 가지처럼 뻗은 작은 골목들이 숨은그림찾기를 하고 있었다. 곳곳에 맞춤한 숲이 우거지고, 한가운데 자리 잡은 YMCA를 중심으로 실핏줄처럼 구석구석 아늑한 분위기의 카페와 특색 있는 음식점을 숨기고 있었다. 이로 인해 공간은 한층 높은 격과 분위기를 선사했다.
하지만 이런 서정이 정착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1999년 애니골 동쪽 풍동에 대규모 택지개발(풍동지구)이 예고되어, 2000년대 초 개발이 시작된다. 애니골을 사이에 두고 하늘마을(일산2지구)과 풍동지구 개발이 경쟁적으로 이뤄진다. YMCA를 가로질러 도로가 개설되고 2009년 경의선에 ‘풍산역’이 문을 연다.
주변을 둘러싼 아파트에 애니골이 섬처럼 갇혀버린다. 새로 난 도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한 땅값은, 애니골을 감성 충만한 공간으로 남겨둘 하등의 여유를 두지 않았다. 곳곳에 대형 음식점이 자리한다. 개울 건너편이 빌라촌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치솟은 땅값은 애니골이 일궈낸 격과 서정을 지워내기에 차고도 넘쳤다. 은은한 통기타 소리 울려 퍼지던 카페가 설 자리를 잃어갔다. 각종 음식점과 그저 그런 상업시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화사랑 초대 주인장과 아들, 누이와 동생까지 나서 애니골과 화사랑을 지켜내려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백마 카페촌의 상징으로 남고자 했던 열망마저, 악령처럼 덮쳐오는 경영난을 피할 순 없었다. 문 닫은 화사랑을 도시재생사업의 하나로, 2020년 고양시가 인수해 복원한다. 이를 통해 80∼90년대 감성 그득한 경의선의 추억과 낭만을 되살리려 의도했다. 다행이랄까. 이런 노력으로 그나마 사라지지 않은 화사랑이, 소소한 생명력으로 애니골을 지켜내고 있으니 말이다.

애니골 안쪽의 풍경 © 이영천

 

낯선 공간
백마 카페촌에서 사랑과 낭만, 문학과 예술을 다투던 젊은이들이 지금 우리 사회의 중추다. 아니 이제 곧 은퇴할 나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물원 노래처럼 이곳을 찾아 어설펐으나 찬란했던 젊음을 추억하지 않는다. 이제는 공간이 사랑과 낭만, 문학과 예술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사랑과 낭만을 추억할 실마리 하나 찾을 수 없는 이곳에서, 맛집을 검색해 찾아다니며 주린 배를 채울 뿐이다. 맛있는 음식이 혀를 달래주는지 모르겠지만, 가슴 시린 낭만과 멋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더불어 신세대 발길도 뜸하다. MZ세대가 추구하는 이상과 갈증을 해소해줄 그 무엇도 공간이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의선 백마역은 출퇴근 인파로 늘 북적인다. 철길 따라 난 길은 산책길이 되었다. 나무숲으로 변한 보행로는 건강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다. 논길은 사라지고 낭만을 찾아 이곳 백마역에 내리는 사람 또한 없다. 애니골을 낭만 가득한 카페촌으로 기억하는 사람조차 이젠 드물다. 이름난 맛집 몇이 자리한, 그저 그런 공간으로 알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상업화된 대형 음식점과 빌라가 공간을 채워가는 중이다. 개발이 가져온 ‘부(負)의 외부효과’다.
공간도 철저히 수요와 공급에 지배당한다. 공간을 갈라친 도로를 통해 그저 그런 상업시설과 주거의 침투는 계속될 것이다. 자본의 논리가 매개하는 바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을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밀려드는, 뭔지 모를 허전함마저 어쩌지 못하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한 공간을 매력 넘치는 곳으로 지키고 가꿔가는 건 이처럼 지난한 일이다. 공간이 창출하는 수요와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수요를 매개하는 요소는 그게 추억과 낭만일 수도, 문화와 예술일 수도, 혹은 사랑과 열정일 수도 있다. 백마 카페촌에 쌓였던 사랑과 낭만이, 풍동 애니골에선 작은 흔적만 남기고 왜 지워져버렸을까? 당시 젊은이들이 열정으로 만들어낸 공간을 우린 왜 지켜내지 못했을까?

백마 화사랑 © 이영천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