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오딧세이 ㉘ 책을 ‘짓고자 하는’ 도시의 꿈을 좇아서 2025.9

2025. 9. 30. 15:05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Following the dream of a city that ‘writing’ books

 

 

 

뭔가를 ‘만들어내는’ 행위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과정에 투입된 노동력이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행위에도 쓰이는 표현은 제각각이다. 집은 짓는다고, 건물은 세운다고 한다. 누리며 삶을 꾸려가는 객체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더욱 다양하다. 조성한다거나, 건설한다거나, 앉혔다, 세웠다 등의 표현이 상황에 맞게 적용된다. 정치·경제·문화·교육·생산과 교류 등 집약적인 역량을 발휘하도록 형성된 공간인 까닭이다. 노동력이 창출해낸 최고봉인 셈이다. 그럼에도 수만∼수십만이 살아갈 신도시를 기계에서 제품 뽑아내듯 몇 년 만에 뚝딱 ‘찍어내던’ 낯뜨거운 시절도 있었으니….
한강 제방 위로 난 자유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직 책을 펴내기 위해 조성된 이색적인 공간 하나를 만나게 된다. 출판도시라거나 출판단지라 부르는, 정식 명칭은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다. 오래된 인식으론 공업단지인 셈이다. 의구심이 앞선다. 이런 공간이 왜 여기에 자리하게 되었을까. 더구나 경직된 우리 법이 정하는 테두리 안에서는 도시가 아니라니? 그저 의아할 뿐이다. 왜 이런 괴이한 현상이 빚어졌을까?
도시를 떠받치는 근간은 ‘도시활동’이다. 정보의 교환과 소비다. 이를 바탕으로 모든 도시활동이 이뤄진다. 정보의 매개체가 활자화한 문자이고 출판이다. 디지털도 큰 범주에선 별반 다르지 않다. 말이 있어 문자가 탄생했고, 문자로 인해 책이 탄생했다. 책을 펴낸다는 건 그래서 누군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문자나 그림을 통해 널리 알리려는, 지극히 의도된 행위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 행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을 펴내는 과정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라 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문자가 매개하는 최고의 경지다. 그렇다면 이 공간에도 과연 문자향서권기가 서려 있을까?


출판도시의 꿈
1986년부터 저달러·저유가·저금리라는 이른바 3저 호황으로 우리 경제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는다. 독재 정권에는 행운이었다. 경제 호황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 급기야 부동산 시장을 자극하기에 이른다. 자고 나면 집값, 정확히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빈부격차는 물론 상대적 박탈감을 극대화했다. 혹자는 폭동 일보 직전이라 평할 정도였다. 이의 해소책으로 1988년 9월 「200만 호 주택 건설계획」을 발표하면서 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이란 수도권 1기 신도시 계획이 구체화한다. 관건은 베드타운이 아닌 최소한의 자족 기능을 갖춘 신도시 건설이었다.

출판도시 초입 © 이영천


당시 출판은 어땠을까. 출판을 생산∼유통으로 단순화하면 생산은 출판사 및 인쇄와 제본으로, 유통은 총판 혹은 도매상으로 나눌 수 있다. 저술가를 예외로 하고, 생산 부문 최정점인 편집·기획자가 활동하는 출판사는 주로 서교동에 몰려 있었다. 제지산업이나 기계·부품회사 등이 관계되는 인쇄와 제본은 을지로에 몰려 있었다. 생산된 서적의 유통을 담당하는 총판 혹은 도매상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여기에 광고업계와 서평을 담당하는 신문 등 미디어가 한 축이고, 이 기능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출판산업을 매개하고 구성하는 ‘생태계’가 거대도시 서울의 곳곳에서 각자도생하고 있었던 셈이다.
출판인들이 꾸린 단체가 있었다. 1989년 이들이 위원회를 꾸려 출판도시 건립을 꿈꾼다. 크게 서교동과 을지로로 이원화되어 있는 출판계 생산 부문을 한곳에 모으고, 별도 유통회사를 설립해 순환적인 출판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일산신도시가 대상지다. 1990년 10월 263개 출판사를 포함 총 360개 사가 출판도시를 건설할 조합을 설립하여 70억 원 상당의 사업 기금을 마련한다. 곧이어 중간 규모 유통회사 설립계획을 마련, 일산신도시 개발 주체인 한국토지개발공사와 입지에 대해 협의를 진행한다.
당시 신도시 개발 근거 법률이 ‘택지개발촉진법’이다. 즉 주택건설용 택지를 조성하는 게 핵심이었다. 무척 인색하지만 그땐 출판을 제조업으로 인식했었나 보다. 이는 일산신도시 조성에 적용된 법률은 물론 200만 호 주택건설이란 측면에서 이질적 존재로 취급받는 단초가 된다. 조합은 일산신도시 동쪽 초입 업무지구 11만여 평에 출판도시를 구상한다. 하지만 토지개발공사는 택지 분양에 공개경쟁입찰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면적에 대한 줄다리기에서부터 출판유통 업무용지 지정, 최종 분양가와 부지 배정 우선권 등에서 상당한 이견을 보인다. 조합과 토지개발공사 사이 크나큰 입장 차가 있었던 셈이다. 결국 일산신도시에 건립하려던 출판도시 계획은 수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4년 7월 끝내 무산되고 만다. 베드타운이 아닌 최소한의 자족 기능을 갖춘 신도시는 이로써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무척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토지이용계획 © 파주출판단지협동조합


자유로가 만들어낸 습지에
임진각이 종점인 ‘자유로’가 일산신도시 및 통일전망대 조성과 함께 개설된다. 큰 물에 무너지곤 하던 한강 제방을 높이고 넓혀 직선화한 상부에 개설한 도로다. 자동차 전용 도로이고 지방도이며, 광역화한 베드타운 고양과 파주를 서울과 연계하는 기능을 수행한. 자유로 건설로 인해 바다나 강으로 곧장 흐르던 크고 작은 하천이 막혀, 곳곳에 습지가 생겨난다. 공유수면 매립과 비슷한 현상이 빚어진 셈이다. 일산신도시 입성이 무산된 출판 조합에, 한국토지개발공사는 문발리 습지를 후보지로 추천한다. 궁여지책이자 대체재인 셈이다.

출판도시 습지 © 이영천


1990년대 택지개발은 땅을 깡그리 밀어 내고 형질을 변경시켜 조성하는 방식이었다. 가용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따라서 자유로가 만들어낸 습지들도 이내 사라질 위기였다. 이에 가장 먼저 환경단체가 반대하고 나선다. 당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천혜의 습지를 없애려는 개발방식에 대한 반발이었다. 환경단체의 선한 활동이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출판도시의 택지조성과 도시설계, 건축설계에 이들 주장이 한껏 반영된다. 이에 따라 비록 직선화했을망정 큰 물줄기가 살아남았고, 기왕 생겨난 습지를 보존하려는 시도가 이뤄진다. 문발리 습지에 자생하는 식물을 조경용으로 식재하고, 건축물 높이를 4층 이하로 규제하는 조건이 관철되어 도시설계가 이뤄진다. 이 공간이 그나마 여타 개발지에 비해 쾌적한 환경과 경관을 갖추게 된 첩경이 된다. 아울러 깡그리 밀어내기만 하던 기존 개발방식에 반성과 일대 충격을 가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의 불행도 잉태된다. 이곳에 적용된 법률의 한계다. 막연했거나 우매했거나 둘 중 하나다. 산업단지를 효율적으로 조성하기 위해 제정된 ‘산업 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책은 여전히 공산품이었던 셈이다. 주무관청이 산업통상자원부가 아닌 문화체육관광부로 바뀐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출판도시가 아닌 출판단지가 탄생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덧씌워진 셈이다. 이로써 주거와 상업 기능 입지에 한계를 보여 절름발이 도시가 되고 말았다.

상업지역 © 이영천


출판생태계는?
이곳에 순환 체계로 작동하는 출판 생태계가 꾸려졌는지 의문이다. 2025년 현재 대형 출판사 몇은 서울로 되돌아갔고, 사옥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애초 조합이 중점을 두었던 유통기능은 오히려 퇴보하였다. 전반적인 출판 불황이 제1 요인이겠으나, 생태계가 순환고리로 작동하지 못한 측면도 엿보인다. 몇 년 전 부도를 맞아 충격을 던졌던 송인서적은 출판계 전체를 되돌아볼 계기였다. 그럼에도 이제껏 큰 변화가 없다. 인쇄와 제본 등 생산 기능도 열악하기 그지없다. 산업단지임에도 말이다. 조합에 참여해 입주한 업체들이, 부동산 과실만 따먹었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대목이다. 더구나 출판계는 여전히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란 틀에 갇혀, 역력한 한계를 보이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주거지역 © 이영천


산업단지로 조성된 한계로 저녁이면 텅 비어버린다. 공동화 현상이다. 미약한 주거와 상업 기능 때문이다. 대도시 중심지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 외떨어진 이 공간에서 벌어진다. 공동화 현상은 도시 활동과 토지이용 효율을 떨어뜨리는 제1 요인이다. 또한 범죄를 유발하는 근인(近因)이기도 하다. 더구나 인근에 세워진 신도시로, 공동화 문제는 영영 해결 불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시작부터 적정한 주거와 상업 기능을 안배했더라면 이 공간이 어찌 바뀌었을까?
집이나 도시처럼 책도 ‘짓는다’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부디 이 공간에서 좋은 책이 많이 지어져서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동량으로 자리매김하길 빌어본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