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오딧세이 공간재생의 고갱이가 하루빨리 찾아지기를 2025.11

2025. 11. 28. 10:40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Hoping for the Quick Restoration of the Essence of Spatial Regeneration

 

 

 

공간이 무척 밝다. 흡사 미국의 어느 소도시에 선 느낌이다. 이곳을 ‘리틀 시카고’라 부르던 때가 있었다는 말을 실감한다. 한 시절 휘황한 네온사인으로 밤을 빛냈던 영어 일색의 형형색색 간판에 시선이 머문다. 간판에서 이 공간이 살아낸 시간을 능히 읽어낼 수 있겠다. 외국인관광특구로 지정된 정식명칭 ‘Camp Bosan’의 첫인상이다. 경원선 보산역과 잇닿아 있다. 환한 표정 뒤에 감춰진 속살이 엿보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내보이기 싫은 기지촌이었고, 기생적 소비공간이었다. 지금은 많이 변했다지만 말이다. 기지촌을 사전적으로 ‘외국군 기지 주변에 형성된 촌락’이라 풀이한다. 즉 외국군 주둔지 주변에서, 부대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은 물론 인력까지 제공하는 배후지란 의미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군을 상대하던 ‘양공주’와 윤락업소가 기지촌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굳어진 실정이다. 공간을 지키며 새롭게 탈바꿈시키려 애쓰는 이곳 상인과 장인, 청년 창업자들이 가질 만한 억울함이다. 기지촌이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할 태생적 양가성이다. 그렇다고 ‘양공주’라 불린 여성을 상대로, 미군은 물론 우리 정부가 공공연히 발 벗고 나서 저지른 범죄까지 면죄부를 받는 건 아니다. 그러함에도 논의를 공간에만 한정해 보자. 분단된 민족과 주한미군의 필요성, 인계철선, 한미동맹이나 동북아에서의 역학관계 같은 어렵고 무거운 논제들은 차지하자. 공간은 여하한 이유로 탄생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당장은 아니지만, 이 공간도 분명 어느 시기엔 심각한 슬럼화에 직면할지 모른다. 미군 부대가 떠나버리면 공간을 지탱하던 그나마 고갱이가 완전히 증발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때를 대비해 대체할 만한 소비나 생산 주체를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나아가 동두천은 자족도시로 변모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분명 마주 설 가깝고도 두려운 미래이기 때문이다.

Camp Bosan 조형물

공간의 임계점
공간이 쌓아 온 시간이 75년이다. 휴전선 가까이, 감악산과 소요산 등이 만들어 낸 분지가 공간 탄생 배경이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천혜의 방어 지형이자, 군사적으로 빼어난 이 분지에 미군 제7사단이 주둔한다. 당장 생계가 곤란한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려든다. 전후 나라 안에서 미군은 최고의 소비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게 상품이 되던 시절이다. 심지어 미군이 먹고 남긴 잔반을 다시 끓여 꿀꿀이죽으로 먹었을 정도였다. 몰려드는 속도가 흡사 불나방을 방불케 했다. 공간을 가꿀 체계적인 계획이 있었겠는가? 자연 지형을 따라 얼기설기, 우후죽순이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옥과 전답, 토지를 강탈당하다시피 미군에 빼앗기고 쫓겨온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어찌됐건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양주 이담면(伊淡面)이 십여 년 만에 읍(邑)으로 승격하며 동두천이란 이름을 얻는다. 전쟁 후였음에도 사회적 인구 증가가 얼마나 폭발적이었는지를 실감하는 대목이다. 공간이 미군의 소비력을 고갱이로 삼아 번성한다. 그러다 맞이한 첫 위기가 1971년 미군 7사단의 철수다. 한반도 내 2만여 명의 병력을 감축하면서 동두천이 직격탄을 맞는다. 1970년대 내내 이어진 한·미 간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 관계가,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창설로 매듭지어지기까지다. 파주에 주둔하던 미군 2사단이 동두천으로 둥지를 옮겨 온 건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규모는 작아졌을지언정, 어쨌든 미군의 존재는 유효했기 때문이다.
1981년 동두천이 시(市)로 승격하지만 이렇다 할 산업시설은 태부족이었다. 소비 위주 공간구조도 그 확장성에서 명확한 한계에 직면했다. 미군 동태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를 보이던 공간에 다가온 두 번째 위기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 동두천에 주둔하던 4천여 병력이 이라크 전쟁에 파병되던 시기다. 반전운동이 활발했고, 한국군 파병은 물론 공개 처형에 직면한 한국인이 TV 화면을 통해 파병 반대를 읍소하던 때다. 그러함에도 주한 미군 파병은 이뤄졌고, 한국군도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되었다.
이를 전후해 보산동은 찬물을 끼얹은 듯 위축된다. 이때를 기화로 미군의 존재와 전쟁은 물론 주둔군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변화가 태동했다. 더불어 미국도 ‘동북아로의 회귀’로 전략으로 전환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어진 재배치 계획에 따라 평택으로의 미군 이전은 이곳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다. 현재는 소규모 부대만 주둔하고 있다. 결국 미군에 기생하는 소비구조 해체가 공간이 임계점에 다다른 근인이다.

철길 옆 보산동

현재 진행형인 물음
보산동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은 3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기억이 뚜렷하다. 1992년 발생한 ‘윤금이 씨 살해사건’이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살해당한 기지촌 여성의 모습에 온 국민이 공분했다. 한 미군의 일탈로 보기엔 너무 흉측한 범죄였다. 미군이 주둔지 시민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명쾌하게 보여 준 단면이다.
어느 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양공주에 기생한 국가 포주제도’를 시행하며 달러를 벌어 오는 산업 전사라 칭송(?)하는 한편 철저히 우롱한 것도 우리 정부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더불어 그녀들에 대한 멸시와 차별은 물론 벌레 취급하듯이 쳐다본 것도 우리다.
사건 전개는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운동으로 번져간다. 여기에 90년대 초 크고 작은 미군 범죄가 빈발하면서 개정 요구가 들불처럼 일었다. 그러함에도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몇 년이 지나, 1995년 11월부터 7차례 협상이 열렸지만 매듭짓지 못하고 1996년 7월 결렬되고 만다. 두 나라 간 힘의 불균형 또는 군사적 종속관계가 협상에 그대로 투영된 결과다.
2000년 들어 매향리 포격 사건과 이태원 살인사건,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원성이 비등하자, 그해 8월 부랴부랴 협상이 재개되어 번갯불에 콩 볶듯 12월 2차 SOFA 개정이 이뤄진다. 이마저 불완전한 것으로 다수 항목에 문제를 남겨놓은 채다. 우리 국민에게 범죄를 저지른 미군 피의자를 기소할 권리 하나 찾아오는데, 이토록 엄청난 희생과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두 여중생 사망 사건 때에도 SOFA 개정 요구가 있었으나, 극히 일부 조항에 한정된 합의서 체결로 매듭짓고 말았다.

캠프 보산 가로

공간이 던진 숙제
이 공간의 미군을 보고 있자면 펄 벅의 소설 ‘대지’에 나오는 메뚜기떼가 연상된다. 메뚜기떼는 지나는 길의 작물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저 먹잇감일 뿐이다. 주한 미군의 필요성이나 동북아 힘의 균형, 군사 관계를 말하자는 게 아니다. 여하한 경우라도 미군은 이곳에 주둔했고, 전쟁 후 궁핍과 맞물려 동두천이라는 공간을 탄생시킨 변하지 않는 역사적 산물이다. 곡물을 망가뜨리고 떠나는 메뚜기떼처럼, 미군은 이 공간의 흥망성쇠에 관심을 둘 필요나 그럴 의무조차 없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아직 비워지진 않았으나, 1950년대 미군과 우리 정부가 주둔지 토지를 어떤 방식으로 강탈해갔는지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그 땅으로 인해 부대가 주둔해 도시가 탄생했고, 미군이 두고 갈 그 땅에서 이 도시는 다시 희망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미군 부대 터는 철저히 공공부문에서 다뤄져야 한다. 다만, 1950년대 억울하게 징발당한 옛 토지주 후손들에겐 지금이라도 정당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비워질 그 땅을 어떤 기능으로 채울 것인지 전문가 집단과 시민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선심성 정책으론 절대 해결되지 못한다. 방해되는 법령이 있다면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돌파해야 한다. 할 수 있는 최대한, 동두천이라는 도시가 재도약할 수 있는 기능으로 채워내야 한다. 그리고 미래와 통일을 지향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미군이 달러를 뿌려 지탱시킨 공간의 소비 규모에 더해, 한반도 중간 지대에서 첨단기능의 생산력과 문화를 갖춰야 한다. 이런 제반 조건을 모색하다 보면 역시 인프라로 귀결될 것이다. 사회간접자본은 물론이고 양질의 노동력이 몰려들 객관적 여건과 유인책을 먼저 구비 할 필요가 있다. 긴 시간을 두고 차분히 준비한다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지금 당장은 좀 외진 곳이라는 인식이 있어도 수도권이 아닌가? 그것도 통일을 예비한.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커다란 아픔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남기면 좋겠다. 그래서 내보이기 싫은 역사일망정 후손들이 반드시 되짚고 각성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길 빌어본다. 시카고를 닮은 오래된 공간 ‘Camp Bosan’의 이름으로 말이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