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31. 10:35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The City Which Was Left as Nine Pairs of Shoes

남한산성 아래 펼쳐진 너른 분지다. 반세기 전, 이곳에 빈민들이 반강제로 이주하면서 하나의 도시가 생겨났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여전히 비좁은 골목과 작은 필지, 밀집된 주거 형태가 당시의 상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공간이 한때 생존권을 다투던 항거의 현장이었음을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픔이 여러 이야기로 각색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윤흥길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있다. 작가는 ‘대학 나온 안동 권가 기용 씨’를 등장시킨다. 출판사에 다니는 지식인 권씨는, 내 집 마련 꿈을 꾸며 광주 대단지에 분양증서를 사 이주해 온 ‘전매입주자’다. 또한 ‘광주 대단지사건(8.10 성남 민권운동)’의 주동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야기 속 등장인물 모두가 절대빈곤층이다.
그렇게 형성된 공간이 성남 구시가지다. 현재는 2∼4층 다가구와 다세대가 대종을 이룬다. 재개발 압력이 무척 거세고, 여러 도시문제도 산적해 있다. 그러함에도 이 공간이 겪은 아픔만은 반드시 되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주 대단지
1966년 서울, 무허가 주택 13만 7,000동에 절대빈곤층 거주자가 130여만 명이다. 무허가 주택 한 채에 9.3명이 북적대는 극히 열악한 상황이다. 서울시장 김현옥은 1968년 660만㎡(200만 평)에 이르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지구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 시행계획을 발표한다. 시민아파트에 수용될 85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서울 밖으로 강제 이주시킨다는 계획이다. 45만 명 수용 계획의 광주 대단지 탄생 배경이다.
하지만 계획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애초 예산부터 부족했다. 오로지 ‘이주’ 자체에만 몰두했다. 공영개발 방식조차 채택하지 않았다. 투기를 조장해 단기간의 개발이익만을 노린, 이름도 모호한 ‘경영행정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시행과정에서도 여러 문제가 드러난다. 땅을 시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평당 400원에 강탈하다시피 빼앗아간다. 광주로 가면 집은 물론 일자리도 알선해 준다는 말로 현혹한다. 택지를 조성하기도 전에 도시빈민을 속이고, 강제로 실어 날랐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일자리는커녕 거주 여건마저 형편없다. 큰 군용 천막에 네댓 가구가 장롱 등 가구로 칸을 막고 살아야 했다. 식수와 전기는 물론 밥 끓일 연료도 변변치 않다. 공용화장실은 고작 12곳, 나무를 베어낸 민둥산이 분뇨로 뒤덮였다. 뒤이어 전염병이 창궐한다. 이질과 설사는 물론이고 콜레라가 확산한다. 1970년 초여름, 수인성 전염병으로 하루 3∼4명이 죽어 나갈 지경이다. 아수라장 단지는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고,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함에도 1971년이 되도록 도시기반시설은 공급되지 않았다. 강제로 이주시킨 후 사실상 방치한 꼴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가 극대화한다. 인구 15만 명을 한 곳에 몰아넣으면 자기들끼리 찧고 볶으며 살아가리라던 애당초 계산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단지가 아사 직전에 내몰린다. 취업자는 5% 미만이다.

나라와 땅장사
서울시는 투자비 회수에 전전긍긍이다. 유보지 매각만으로도 충분하리라던 계산이 형편없이 빗나갔다. 헐값에 땅을 사서 수십만 명을 이주시키면 자연히 값이 오를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에 서울시가 언론매체를 동원, 광주 대단지가 마치 신천지인양 선전해 댄다.
여기에 투기꾼들이 먼저 반응하여 ‘분양증서(딱지)’를 노리고 달려든다. 딱지가 투기꾼 수중에 들어가 값이 부풀려져 대대적으로 팔려나간다. 곳곳에 떴다방들이 기승을 부린다. 아사 직전의 철거민만 정반대다. 강제 이주자 1/3은 딱지를 팔고 서울로 되돌아갔고, 2/3도 딱지 매각 후 대단지 주변 하급지에 무허가 주택을 짓고 눌러앉았다. 소설 속 안동 권씨도 불법 전매로 딱지를 산 경우다. 당시 거금인 20만 원을 들여 20평 땅을 매입했다. 이런 안동 권씨들이 부지기수였고, 이게 항거의 핵심 요인으로 작동한다.
1970년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닥쳐오자, 딱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뛴다. 7월에서야, 부랴부랴 분양증서 전매 금지를 단행한다. 아울러 ‘전매입주자는 분양증서 매입 시세로 철거민은 조성원가로 분양지를 매입하라’는 서울시 방침이 발표된다. 하지만 이듬해 치를 대선(4월)과 총선(5월)이 끼친 영향으로, 방침은 흐지부지된다.
1971년 총선에 박정희 오른팔 차지철이 이곳 후보로 나선다. 그가 ‘토지무상양여와 5년간 면세’라는 현실성 없는 공약으로 땅값 상승을 부추긴다. 설상가상 대선 때 남발된 개발계획이 투기 광풍을 부채질한다. 선거자금이 유입되어 유동성이 확대되고, 투기꾼들이 일으킨 바람을 타고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양대 선거가 끝나자 유동성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낸다. 단물을 빼먹은 투기꾼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땅값이 곤두박질친다. 비상 걸린 서울시가 비용 회수와 투기 규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낼 궁리에 몰두한다. 1970년 발표한 방침을 전격 단행한다. 이에 전매입주자가 특히 타격을 입는다. 20만 원을 들여 딱지를 샀던 이들이, 급지(級地)에 따라 평당 8,000∼16,000원을 추가 부담해야 할 처지로 내몰린다. 여기에 기름이 부어진다. 경기도가 ‘미등기 택지 10평당 취득세 3천 원을 납부’하라는 고지서를 발부한다. 서울시도 입주예정자에게 ‘1개월 안에 집을 지어 입주하지 않으면 분양을 취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어렵사리 구한 땅을 앉아서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진다.

아홉 켤레의 구두만 남긴 채
이때 대단지 인구가 15만∼16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집단 저항을 선택한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전매입주자 주도로 「분양지 불하가격 시정위원회」를 조직, 고위 공무원 출신으로 지역에서 철거민 활동 중이던 제일교회 ‘전성천 목사’를 앞세운다. 5개 요구 조건이 담긴 진정서를 당국에 제출한다. 위원회는 하위단위까지 조직을 넓혀, 산발적 시위를 전개한다. 하지만 서울시와 경기도, 내무부는 냉담하다. 전성천 목사가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도움을 구하나, 청와대 아니면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답을 듣는다.
단위별 대표를 망라해 350명으로 확대 개편된 「투쟁위원회」로 전환한다. 위원회는 주장과 구호가 담긴 전단지를 살포하며 강경 투쟁에 돌입한다. 서울시 부시장이 8월 9일 현장을 방문, 타협을 시도하지만 무산된다. 이에 양택식 서울시장이 다음날 직접 협상에 나서겠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8월 10일, 그날은 비가 내렸다. 인분 범벅인 벌거벗은 산자락마저 축축했다. 약속한 11시가 되자, 시민 3만여 명이 성남출장소 뒷산을 가득 메운다. 각양각색 주장이 적힌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서울시장을 기다리나, 3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거대한 술렁임이다. 지체된 시간만큼 분노가 쌓여간다. 가난 외에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다. 플래카드와 피켓이 순식간에 각목과 몽둥이로 뒤바뀐다. 불끈 쥔 주먹, 상기된 얼굴마다 벌건 핏줄이 돋는다. 11시 45분 사업소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다. 분노한 군중이 여러 관공서를 돌며 집기를 부순다. 12시 20분 성남출장소를 불태우려 시도한다. 소방차는 물론 경찰 100여 명도 속수무책이다. 지나는 차 10여 대를 탈취, 이곳저곳 질주하며 시위를 벌인다.
오후 들어 경찰 700명이 출동했다. 격화된 시위로 14시 30분경 성남지서가 부서진다. 청년들이 10여 대 버스를 탈취, 서울진출을 시도한다. 박정희를 만나 직접 하소연하겠다는 참으로 순진하나 절박한 바람에서다. 그러나 수진리 고개에서 경찰의 막강한 제지에 막히고 만다. 예상치 못한 격렬한 저항에 지도부도 당황한다. 서울시장이 직접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위원회는 주민생계와 도로 확장, 공장 건립과 5년간 세금 면제 등 5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한다. 이에 서울시장은 불하가격과 생계용 구호양곡 방출, 취득세 면제를 위한 노력과 공장을 가동하겠노라 약속한다. 이미 오후 5시를 넘기고 있었다.
8월 11일, 구호양곡 등이 주민 대표에게 전달된다. 며칠 후 주동자 20여 명이 연행되고, 9월 9일에 구속·기소된다. 정권은 언론을 봉쇄, 이 항거 숨기기에 급급했다. 몇몇 양심적인 기자와 작가가, 걸음으로 르포를 썼을 뿐이다.
2023년 지니계수가 0.32다. 많이 나아졌다 해도, 수치는 여전한 불평등을 말하고 있다. 지금도 빈곤 속에 살아가는 이들 역시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신다. 그들도 36.5도의 체온을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끝내 잊지 말아야 한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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