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31. 10:40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A place shackled, like an old movie set
공간은 50여 년 전 시곗바늘에 걸려 멈춰 버렸다. 1970∼80년대가 배경인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한다면 이보다 더 제격인 세트장이 또 있을까. 서울이 지척이면서, 전철역은 물론 대학교까지 품고 있는 동네인데 말이다.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이야기다.
시골 면사무소 소재지에나 어울릴 법한 공간 구성이다. 그래도 한땐 지역 주간선도로였을 굽은 2차선만 오롯하다. 길에 면해 자리한 오래된 군부대 영향인지, 이름마저 화랑로다. 나중에 뚫린, 수색으로 연결된 넓은 중앙로가 마을을 가르며 지난다.
공간엔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져 있다. 첫째는 억압적이다. 대부분이 ‘군사시설보호구역’이다. 창릉신도시에 편입된 육군 30사단은 이미 이전했다. 그럼에도 한국항공대 활주로와 주변 군부대 존치로 규제는 지속될 것이다. 항공대 활주로는 건축물 고도까지 제한하는 현실이다. 둘째는 가혹하다. 당시 도시정책 중 유일하게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그린벨트(green-belt,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있다. 셋째는 엉뚱하다. 당시 고양은 여느 시골이나 다름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그런 곳이 인구집중유발시설을 규제하는 ‘이전촉진권역’으로 지정되었다. 이게 이곳을 50년 전 시공간에 묶어 버린 3가지 족쇄다.
이로 인해 대학을 품고 있는 공간 답지 못하다. 6,000여 항공대 학생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자연스럽게 서울이다. 화전역에서 전철로 홍대나 신촌으로 나간다. 1954년 생긴 화전역과 주변은 한산하기 그지없다. 역이 결절점으로 집중과 확장보다는 분산과 정체를 매개하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인문지리적으로도 결절 부위가 분명해 보이는 이곳이, 머물기보다 지나쳐 가기 바쁜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대륙 침략 전초기지
화전동의 옛 모습은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지천으로 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곳을 경의선이 둘로 갈라 쳐 버렸다. 1905년 개통된 경의선은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려 일으킨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오로지 군사용으로 만든 철도다. 용산∼수색∼평양∼신의주∼만주를 잇도록 설계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대륙 침략에 나선 일제는, 경의선을 철저히 활용한다. 이 전쟁이 화전동을 크게 변모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수색과 화전을 전쟁 배후기지로 구상한 일제는 ‘철도 조차장’과 연계된 대규모 군사기지와 보급 창고를 짓기 시작한다. 서울 용산과 유사한 형태를 계획하고 공사에 들어간다. 85년이 흐른 지금, 경의선 변에 당시 전쟁 수행을 위해 설치했던 여러 시설물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용산이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무력의 원천 기지였다면, 수색과 화전은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였다. 1939년 수색과 부산, 평양에 각기 철도 조차장을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수색이 그 핵심이었다. 수색조차장은 내부 선로만 130km로 철도 운송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구축하려 시도했다. 규모만큼 종사자도 많아 수색역 인근에 별도 철도관사를 지었으며 용산~수색 간 선로를 증설하기도 했다.
화전 육군 30사단이 있던 자리는 대규모 일본군 주둔지였다. 아울러 항공대 활주로 끝단엔 일본 육군 보급 창고가 있었다. 일제는 군 병력은 물론 보급 창고에서 피복, 탄약, 식량 등을 포함한 각종 보급품과 당인리 발전소에서 실어 온 무연탄 등을 경의선을 통해 만주로 향하는 기점을 수색조차장으로 삼았다. 이 모든 군사행동을 수색과 화전에서 통합 관리하고자 했다. 지천으로 꽃밭이던 화전동이 일제의 야욕으로 이렇듯 대규모 침략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린벨트의 역설
1971년 서울 시청 반경 15km 밖 서울·경기 지역을 시작으로 그린벨트가 지정된다. 대도시의 급격한 확산과 무분별한 도시화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전국으로 확대한다. 총 8차례에 걸쳐 전 국토의 5.5%에 해당하는 면적을 지정, 강력한 규제를 가한다. 고양시는 한때 전체면적의 52%가 그린벨트일 정도였다.
그린벨트 안에선 주택지나 산업단지, 그 밖에 구역 지정 목적에 위배되는 어떤 도시계획 행위도 할 수가 없었다. 개개인은 건축물 용도변경과 토지 형질변경이 불가능했으며, 증축이나 개축에도 엄격한 제약이 가해졌다. 사유재산에 50년 이상 규제를 가해 온 셈이다.
지정 당시의 사회·경제 환경에는 부합했다. 그때는 일시적으로 옳았으나 그 후부터는 잘못된 정책으로 변질하고 말았다. 도시 확산을 막아내지도, 주택과 교통 등 도시문제를 해결하지도, 그렇다고 자연환경을 지켜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린벨트는 오히려 토지 공급 한계를 가져와 도시 내 급격한 지가 상승을 불러왔다. 더구나 팽창하는 도시화 욕구에 따라 도시 확산은 그린벨트를 훨씬 뛰어넘었다. 그린벨트 밖에 생겨난 위성도시가 거대화하면서 교통 등 각종 도시문제의 광역화와 대규모화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신도시나 산업단지를 짓는다며 그때그때 입맛에 맞춰 해제해대기 바빴다. 창릉신도시가 대표적 사례다.
같은 구역 내에서의 형평성마저 무너진 건 이미 오래다. 1990년대 말에서야 ‘선계획 후개발’이라는 완화정책을 펼쳤으나,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회복이나 활성화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화전역과 군사시설보호구역
경의선 개통 53년 후인 1958년에서야 화전역이 생겨나지만, 지역의 변화와 발전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미지수다. 간이역으로 시작한 화전역은 2000년대 운행 개시된 수도권 전철역으로 기능을 수행 중이나 여전히 한미하긴 마찬가지다.
망월산자락에 기대앉은 화전동은 창릉천이 펼쳐 놓은 넓은 개활지에 평야도 기름지다. 개활지에 구릉성 산지뿐인 이곳에 1963년 11월 항공대가 이전해 온다. 활주로 입지에 유리한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활주로는 항공기 이착륙을 고려한 진입표면과 제한(수평)표면에 따라 주변 건축물 고도를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활주로 가까운 곳엔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
화전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군사시설로 몸살을 앓아 온, 깊은 아픔이 서린 곳이다. 망월산 북서쪽 육군 30사단 자리는 1개 사단 이상의 병력 주둔이 가능한 규모였다. 해방 직후 일본군이 철수하자 이를 미군이 접수하여 사용하다, 휴전 후인 1955년에 한국군에 인도된다. 우리 육군도 이곳을 군부대로 사용한다. 항공대 활주로 인근 ‘일본 육군 보급 창고’에는 우리 육군부대가 들어가 있다. 이런 영향으로 화전동 많은 땅이 1973년부터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군사시설보호구역 내에서는 시설보호와 군사작전 등의 사유로 ‘개인의 토지 이용 및 사유재산권 행사를 통제하거나 제한’된다.
수도권정비계획과 신도시
1984년 수립된 수도권정비계획은 획일화된 사고가 탄생시킨 경직된 제도다. 서울과 경기도를 5개 권역으로 나눈 계획은, 지도에 선을 그어 천편일률적으로 권역을 나눔으로써 수많은 불합리를 파생시켰다. 당시 고양은 인구집중유발시설을 권역 밖으로 이전해야 하고, 신·증설을 규제하며, 대단위 택지조성을 억제하고 전문대 이상 고등교육기관 신·증설 및 학생 수 증원을 금지한다고 규정한 ‘이전촉진권역’에 포함된다. 인구집중 유발시설이라야 군부대와 카페촌이 전부인 곳에 말이다.
이렇듯 강력한 규제로 묶어 놓고 5년 뒤 군사시설보호구역과 그린벨트에서 벗어난 곳에 인구 30만을 수용할 ‘일산신도시’ 계획을 발표한다. 이율배반이다. 마치 주머니에 넣어둔 사탕을 아무 때나 꺼내 먹는 듯한 모습이다. 그때도 서울에 면한 곳은 철저히 소외된다. 그린벨트에 이전촉진권역이 압박을 가하고, 군사시설보호구역에 면한 곳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저 비 새는 지붕이나 수리하면 그만이다. 화전이 이런 3중 고를 겪은 대표적인 곳 중 하나다.
기존 마을을 제외하고, 근교농업에 종사하던 화전동 일대 농지의 그린벨트를 해제하여 2019년 ‘창릉신도시’가 지정된다. 이번에도 정부 정책이란 명분이다. 신도시에 포함된 30사단 인근은 군사시설보호구역이 해제될 것이나, 신도시에 포함되지 못한 옛 마을은 여전히 규제에 갇혀있다.
80여 년 지켜온 마을과 생활권이나마 지켜낼 수 있음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건설될 신도시는 규격화한 블록에 아파트 일색일 게 뻔하다. 화전동 기존 생활권은 신도시에 철저히 종속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공간이 온전히 지켜질 수 있으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급격한 변화를 맞을 것이다. 크고 작은 갈등과 반목도 생길 것이다. 예상은 되지만, 창릉신도시가 80여 년 인고의 시간을 버텨온 공간에 어떻게 화답할지 무척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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