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한국 건축의 사대주의와 국수주의 현상 2018.08

2022. 12. 6. 09:24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건축담론

 

편집국장 주

 

남북 평화의 시대로 접어드는 낙관적 미래가 시작되려 합니다. 지난 5월호부터 시작된 건축 담론은 이제 4회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첫 회는 지방자치 선거와 맞물려 제도권과 건축사의 이야기를 했고, 두 번째 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여러 가지 모순된 건축환경을 언급했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나라의 지역별 건축적 의미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는 그런 것이 어떤 것인지 언급했습니다. 앞으로도 국내 건축에 대 한 다양한 이야기 기회를 본 건축 담론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지면의 한계상 더 많은 토론을 하지 못하지 만 여러분들께서 이 기회를 통해 확산시키고, 깊이를 다듬어 가시길 바랍니다.

 


592호 주제는 ‘한국 건축의 사대주의와 국수주의’입니다.

 

8월은 우리가 식민시대를 벗어난 달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자주권과 독립권을 행사한지 73년이 되어 갑 니다. 건축은 다른 분야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60년대 부여박물관 논쟁부터 시작해서, 80년대 한국적 건축에 대한 논쟁까지 상당기간 토론되고 회자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학생 들과 학교, 현업은 치열한 고민들을 했습니다. 그러던 논쟁이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정체성은 확보되었을까요? 소비자에게 권한이 넘어간 소비자 중심의 시장 경제 사회에서 막연한 선진국에 대한 추종은 오히려 더 심해진 듯합니다. 좋아졌다고 하지만, 해외 건축사들은 국내 건축사들보다 여러 가지 편의를 받고 있습 니다. 계약 관계, 업무 진행, 디자인 결정 등... 실력이라는 것으로 보기에는 우리 스스로 성장한 이들도 많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불평등이 의아합니다. 물론 국수주의도 나쁘겠지요. 이런 이유로 건축계 내 외에 분명히 존재하는 건축사나 건축주, 학교에서 벌어지는 사대주의적 현상과 이에 반발하는 국수주의 적 갈등을 다뤄보려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스스로 직시하고 정확한 정체성이 세워지길 기대합니다.

 

01 한국 건축의 사대주의와 국수주의 현상

Phenomena of Korean architecture, ‘flunkeyism’ and ‘nationalism’

 

한국 건축의 국수주의와 사대주의가 과연 존재하는가? 실제로 이런 단어를 사용하면서 대화를 하 는 경우가 있지만, 명확하게 누군가가 주도하는 현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통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을 보면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사회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건축철학

 

다만, 누구하나 국수주의자로 건축을 주장하거나 사대주의자로 건축을 주장한 적이 없다.

국수주의와 사대주의가 무엇인가? 이 단어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는 것이 이해의 첫 단계다. 사대주의(事大主義; 영어: flunkyism)는 자율적이지 못하고 자국보다 강한 국가, 세력에 복종하거나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주의를 말한다. 사대주의는 20세기 초반에 국수주의자들이 크고 강한 국 가에게만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당시의 지배층들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위키피디아> 재미 있는 것이 국수주의자들이 상대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용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국수주의의 사전 적 의미를 살펴보자.

극단적인 국가주의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며, 타민족·타국가에 대하여 배타적·초월적 성격을 지닌다. 역사적인 실례로 일본의 메이지[明治] 이후의 국수보존사상(國粹保存思想), 제2차 세계대전 당 시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을 들 수 있다.<두산백과>

두 가지 모두 비교해보면 상대적이다. 흑과 백처럼 상대가 있어야 강조되는 생각인 점이다. 그리고 문제는 둘 다 극단적 형태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 조금 희석하면 긍정적 단어가 된다. 사대주의를 부 드럽게 다듬으면 “나보다 뛰어난 누군가의 장점을 본받자”라는 것이고 국수주의를 희석하면 “스스 로의 장점에 자부심을 갖자”가 된다.

즉, 전통건축의 맥이 끊어지고 현대 건축으로 급격하게 진입한 한국 건축은 어쩔 수 없이 이 두 가지속성을 동시에 함유한 채 진화되어 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문제는 스스로에 대한 생각과 정체성을 깊이 고민하고 만들어낸 사상적 성과나 정의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면, 일본 식민시대는 조선인은 건축의 정점인 설계를 차지할 수 없었다. 건축 설계는 자체적인 경제적 성과가 낮은 대신에 머리에 해당되는 기초가 되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지배 하는 식민지 국가에서 조선인에게 설계의 지위를 줄 수 없었다. 일본 식민시대에 조선인이 건축사 가 된다는 것은 거의 드물었다. 손에 헤아릴 정도의 숫자로 판검사나 변호사 숫자보다 더 적었다. 해 방이후 산업의 속도는 건축설계의 철학적 성장을 기다리지 못했고, 기능적 요건이라도 공급되기 원 했다. 이는 성찰과 깊이를 담아내는 숙성의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스스로의 건축 철학을 만들지 못한 채 경제논리에 빨려 들어가는 종속적 상황이 되어 버렸다.

1950년대 한국전쟁이후 나타난 사회 현상에 건축도 매일반이어서 새로운 강대국이면서 동경의 대 상인 서구 문화는 빈곤한 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대중적으로 맹목적인 추종분위기를 만들었다. 극단 적인 자학적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의 건축과 공예 등 전통적 산물이 부정적 대상이 되었다. 이 근저에는 식민주의 시대 일본에 의한 ‘열등교육’이 한몫했다. 서구 닮기의 끝판왕은 신을 신고 실 내에 들어와 생활하는 주택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관습과 문화는 쉽게 극복하지 못한다. 결국 시간 이 흐르면서 이런 주택은 확장되지 못하고 바로 사라져갔다.

1960년대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주는데, 절대적 정치권력에 의해서 나타난 국수주의적 경향이다. 실 제 대중적 인식은 서구에 대한 동경이었지만, 정치권력이 후원하고 지지한 것은 ‘한국적’이라는 테 마였다. 많은 국가 건축은 전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 결과는 콘크리트 건물로 된 한옥 형태의 건축 물들의 탄생이었다. 지금도 현충원 입구의 콘크리트 성형 건물은 한옥의 원형을 보여준다. 경복궁 의 한 복판에 있는 민속박물관은 이런 국가적 테마에 철저하게 호응한 ‘전통양식’의 최고를 보여주 었다.

흔히 농담처럼 성형외과 가서 눈썹은 누구처럼, 눈은 누구처럼, 코는 누구처럼 해서 조립하는 것처 럼 경복궁 민속 박물관은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요소들을 집합해서 만든 건축이다. 그런데 이를 국 수주의로 볼 수 있을까?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민속박물관 건축사가 우리 건축의 지나친 자긍 심으로 했다기보다는 현상설계 요건에 따른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60년대 정치 권력자들은 왜 이런 건축을 요구했을까? 그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 이 뛰어나서? 우리 민족의 문화가 우수하다고 확신해서?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일본의 1930∼40년대 건축을 보면 짐작할 수가 있다. 1930∼40 년대 일본은 서구와 경쟁하던 시점이었고, 개화기 이후 서구 문화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시기 였다. 19세기 미국에 의해 강제 개방된 이후 이들은 탈아입국의 자세로 산업화에 매진했다. 메이지유신이라는 왕권 강화 시대는 사회적으로는 모든 것을 바꾸자라는 구호로 대중을 설득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태도가 열등감을 조장할 수 있었다. 더욱이 식민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열등감 있는 지배국가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식민지를 확보한 제국적 위상을 높이기 위 한 극단적 자부심 강조는 국수주의적 현상을 이끌어 냈다. 더구나 3,40년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시 작된 서구와 전쟁을 해야 했다. 당연히 국가적 우수함에 눈을 돌렸고, 3,40년대 일본 건축은 기이한 형태를 만들어 냈다. 건축적으로는 과도기적 현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실험이었다. 서구 적 건축 원형과 일본의 전통 건축을 섞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1960년대 국가 권력에 의해 주도된 건축은 바로 일본의 3,40년대 국가 건축과 맥이 유사하 다.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상황과 맞물려 이들의 지배 논리중 하나는 산업화 시대 일본 과 마찬가지로 ‘서구를 닮자’와 ‘우리도 우수하다’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강조해야 했다. 더구나 부족 한 고도 산업 구조는 빠른 속도의 변화를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진행된 성과를 보면 상당한 성공과 결과를 만들어 냈다. 건축 또한 국수주의와 사대주의가 동시에 진행된 결과였다. 문제는 이 맥락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지속된다는 점이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한 건축 논리

 

1980년대 우리 건축계에 한바탕 이슈가 된 것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단어였다. 모더니즘이 학 문적으로나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느닷없이 철학 논쟁에 휩싸인 것이다. 1967년 도 느닷없이 나타난 김수근 건축의 부여 박물관 왜색 논쟁은 아노미 상태의 한국 건축계에 일어난 최초의 학문적 현상이었다. 어쩌면 이후에도 없는 반가운 논쟁이 아니었던가 싶을 정도로 당시의 자료를 보면 재미있었다. 어떤 건축도 이보다 치열하게 우리사회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 후도 이런 논쟁은 없었다. 다만 이 논쟁의 근저를 보면 서구건축철학에 기반하면서 국수주의적 시 각을 가진 일본 사대주의에 대한 경계가 보인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점은 이런 건강한 학문적 논쟁이 더 진행되지 못한 점이다. 그리고 1980년대 우리스스로 정립하지 못한 모더니즘 상태였는데, 느닷없이 해외의 포스트 모더니즘이 등 장해버렸다. 그리고 건축언론계를 장악했다. 우리에게 나타난 적이 없던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회 현상은 10년 뒤 1990년대에 비로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사회현상에 대해서 미 리 논쟁한 거나 다름 없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미 산업화를 이룬 서구의 모더니즘에 대한 부작용과 대안에 따른 여러 가지 철학적 논쟁이었는데, 1990년대도 여전히 포디즘의 대량 생산과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 국가에서 미리 이야기 한 셈이다.

결국 우리 스스로 체험하지 못한 ‘수입된 선진 철학 논쟁’은 건축계에서 소멸되어 버렸다. 이어서 수 입된 건축 철학은 ‘해체주의’였고 이를 끝으로 철학적 논쟁이 건축계 주류언론에서 사라져 버렸다. 흥미로운 점은 20세기 초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스케치에서 동기부여를 받은 데스틸 운동처럼 포스트 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의 시각적 건축 표현이 국내 건축에 반영된 점이다. 이또한 우리 스 스로의 건축 철학 부재가 가져온 현상이었다.

이런 현상이 우리에게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체로 후발 산업 국가에서 나타나는 공통 현상이다. 19세기 개항이후 일본은 철저한 서구닮기를 시도한다. 대표적인 사건이 일본 제국호텔 건축과정이다. 19세기 산업화에 따라 국가적 으로 호텔 건축이 시도되는데, 영입한 독일 건축사는 일본적 전통을 가미한 호텔 디자인을 선 보였 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 권력자들이 요구한 것은 일본적 전통이 완전히 배제된 ‘멋지고 우수한’ 서구 건축이었다. 독일 건축사의 작품은 탈락되고, 철저하게 유럽 건축을 솜털까지 재현한 일본 건축사 와타나베 유즈루(渡辺譲)의 설계가 채택되고 지어졌다. 서구식 옷을 입고, 서구 건축에서 서구식 음 식과 음악을 들으며 서구와 동등한 성장을 했다는 자부심을 느끼려 했다. 그리고 그들과 경쟁이 치 열해 지자, 이번에는 자기 자신들의 우수함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스러운 것’들을 찾아다녔다. 그렇 게 선택된 호텔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의해서 재탄생된 ‘일본스러운 서구 현대 건축’으로 완성 되었다. 이번에는 일본의 자랑스러운 문화가 곳곳에 찬미된 서양건축인 것이다. 1890년에 첫 번째 제국호텔은 1920년대 두 번째 제국호텔로 바뀌었는데, 30년 만에 바뀐 극적인 변 화가 시사하는 것은 건축관을 통한 ‘국수주의와 사대주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가깝다는 점이다. 그 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쉽게 바뀌는 태도는 스스로에 대한 명확한 철학적 바탕이 부족한 것을 증명한다.

1980년에서 90년대 걸친 포스트 모더니즘과 해체주의는 우리 건축계에서 체득하고 경험해서 나온 논쟁이 아니라, 해외에 대한 갈증과 열망에 의한 지적 유희적 경향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시 에 우리 건축에 대한 치열한 공부가 전개되었다. 이는 건축계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전반에 걸친 논 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시선이었다. ‘민족’이라는 단어는 ‘한국적’과 동시에 사용되면서 시각화를 시도했다. 고학력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민족’은 한때 운동권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잠재적 으로 우리 문화와 자산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만든 저변 확대의 계기가 되었다. 문학이나 철학 등 타 장르에서 치열하게 확대되면서 논의되었던 주제였지만, 건축계에서는 오히려 90년대 이후 논의의 주제에서 점점 사라졌다.

 

부러운 일본 건축, 그리고 사라진 논쟁의 한국건축

 

이웃 일본의 존재는 현대화한 우리에게 까다로운 국가다. 특히 건축은 그렇다. 20세기 초반 일본의 식민시대는 거의 100년을 우리 사회에 영향을 주었다. 알게 모르게 일본풍은 건축계도 잠식하고 지 배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일본의 과도기는 1950~60년대 앙팡테리블 같은 젊은 건축계 모험자들 에 의해서 메타볼리즘이라는 아마추어 실험이 나타났다. 한번 새롭게 만들어진 스스로의 철학은 점 점 새롭고 다양한 시선을 유지시키면서 일본만의 건축을 등장시켰다. 세월이 지나 현재의 일본 건 축은 확실히 서구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불안하면서도 가볍고, 엄격하지 않으면서 유 니크한 형태를 등장시키면서 분화에 분화를 거듭한 건축 작품들을 보여준다. 이를 인정하고 구매하 는 해외 열혈 소비자들이 탄생하기도 한다. 당장 우리나라 대기업 네이버의 데이터 센터도 켄코군 마에게 의뢰한 건축 작품이다. 우리에게 친밀한 척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또 팔만 대장경을 운운하 지만 가시적 결과는 21세기 일본 건축이다.

우리는 어떤가?

여전히 우리 스스로의 건축 철학적 성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새로운 트렌드에 몰입되어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해체주의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서구 철학이나 과학적 사고가 주제어를 차지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시장 경제의 용어인 ‘마케팅’이 은근히 세력을 넓혀가는 중이다.

철학적 바탕이 될 만한 메타볼리즘 같은 주제어 없이 달려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변화의 속도는 상 당하다. 마치 1890년 서양식 건축이 30년 만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품으로 트랜스폼이 된 것 처럼 바뀌고 있다. 뷔페식당의 다양한 음식처럼 한국의 건축 소비자들은 골라먹는 건축 부페를 만 끽하고 있다.

이젠 사대주의나 국수주의를 논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의 건축 소비자들이 골라 먹는 건축 부페의 저변에는 ‘지금 세계에서 유행하는’ 것을 기준으로 선택할 뿐이다. 처절한 생존에 살아남아야 할 건 축사들은 이를 열심히 공급하고 있다. 너무 슬픈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작은 건축에서 우리 스스로 에 대한 시각화 노력으로 하나씩 자라고 있는 것은 느껴진다. 그것이 조금 더 자라 주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시리즈로 연재하고 있는 월간 건축사의 작품 코너에 올라오는 작품들을 보면 이런 싹들이 보인다. 이번 경기도는 가장 왕성한 대표주자 작품들이 올라와 있어 우리 건축계가 주목해서 보면 좋겠다. 해외에서 공부한 적이 없이 스스로 자란(自生한) 국내 건축사의 작품으로 독창적 표현이 주 목할 만하다. 이런 싹들이 ‘국수주의나 사대주의’를 극복하는 ‘우리 건축’을 향한 자람이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 본지 편집국장·건축사NCS LAB·서울시 공공건축가

 

 

 

 

02 세계화의 그늘과 정체성

The other side of the globalization

 

세계화의 그늘과 국수주의

 

지난 5월 제주 국제공항에 예멘인들이 대거 입국해 난민 신청을 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은 2015년 부터 현재까지 1만여 명의 사상자, 27만여 명의 난민이 발생한 내전을 피해 말레이시아를 거쳐 제주 로 왔다. 이들이 몰리면서 난민수용에 반대하는 청와대 청원이 등장했는데, 71만 명이라는 사상 최 대의 인원이 참여하여 최근 정부에서 공개적으로 답변에 나서기도 했다. 난민수용에 반대하는 주요 이유는 문화 마찰, 자국민의 안전 우려, 경제문제 등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근거가 없다는 점 에서 낯선 타자에게서 느끼는 막연한 불안이다. 외적 대상이 있는 공포와 달리 불안은 자기 내부에 서 비롯된 것인데(하이데거에 따르면, 불안의 대상이 있다면, 그건 현존재 자신이다. 나의 의지와 무 관하게 세상에 던져졌다가 어디론가 떠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 불안의 근원이다.), 이를 바깥 의 타자에게로 이전하는 셈이다. 달리 말하면, 문화 마찰, 치안, 경제문제는 한국 내부의 문제임에 도, 마치 난민 탓인 양 전이되고 오인된다. 이런 불안은 곧바로 혐오의 시선, 차별의 시선으로 변하 기 마련이다. 또한, 한국은 바야흐로 국제화 사회에 본격 진입했다는 점에서 이런 국수주의적 흐름 은 시대착오적이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규모는 어느덧 200만 명 수준으로 늘었다. 다문화가정 은 2010년 인구조사자료에 따르면 이미 38만여 가구에 달한다. 지금은 두 배가 넘을 것으로 보인다. 탈북자는 곧 3만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차이나타운이나 외국인 거리 등 이국 문화를 상품화하려는 시도가 오래전부터 진행중 이다. 더 크게 보면, 다문화가정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다문화주의가 널리 장려된다. 일견 다문 화주의는 다양한 문화의 공존을 장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 정착을 돕는다는 이유로 타문화의 현존에 조건을 붙이거나, 동화를 은연중 강요하기도 하면서 진정한 다양성을 봉쇄하는 결과를 초래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국성을 고민하고, 민족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도리어 이방인들에게는 억지로 동화되어야 할 것으로 차이를 억압하게 되는 요 인이 되지는 않을까? 물론, 지난날 전통에 대한 고취나 발굴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외래의 강 력한 식민적 힘에 맞서는 지지점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를 맞 아 경제발전에 따른 이민의 유입과 한류의 수출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겪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국수주의와 문화의 자긍심 고취를 넘어, 여러 문화들 간의 차이와 생성을 고민할 시점은 아닐까.

 

사대주의와 유행 추종

 

한편으로는, 관 주도로 신한옥이라는 복고적 움직임이 생겨났다. 관에서 주도하는 일들이 대개 그 렇지만, 미리 계획된 목표와 틀 내에서, 전통건축계에 속한 사람들만 참여 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 진다. 무엇보다, 건축사의 전통에 대한 해석과 창작성은 위축되고, 문화의 생성적 힘은 퇴행하게 되 며, 과거 건축에 대한 복고적 재현이 주가 된다고 볼 때, 현대 생활과 역사적 경험이 담긴 삶의 새로 운 모색이 아니라 골동품 애호적 복고취향의 향수만 자극할 우려도 크다.

 

다른 한편으로, 외래의 사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유행으로 받아들여 피상적으로 수용하는 현상은 한국 건축에서 오래된 일이자, 여전히 만연한 현상이다. DDP같은 국제지명공모전에서 한국 건축사는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았다는 논란도 있었다. 다수의 공모전에서 외국의 유명 건축사의 작품을 추종 또는 참조하거나 심지어 도용을 의심케 하는 사례가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범람하는 이미지와 정보가 만들어내는 역효과 탓이 크다.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세 계의 건축 흐름을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깊이 있는 사유를 통해서보다는 이미지를 통해 단편적으 로 수용되기 때문이다.

 

철학자 이정우는 『개념-뿌리들』의 서문에서, 한국 사회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두드러진 담론적· 문화적 현상을 “이미지의 범람과 개념의 연성화”로 꼽은 바 있다. 이정우에 따르면, 강렬하고 즉각 적인 이미지는 우리의 감성을 직접 자극해 쾌감을 주지만, 차분히 사유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우리 를 사유하게 하는 힘은 개념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설계구상단계부터 이미지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개념이 들어설 틈이 없다. 본질적인 것을 찾아 깊이 생각하며 매달리는 순수한 열 정 대신, 당장 유행하는 이미지만을 좇아 헤맬 뿐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정체성 논란이 사라진 이유 는 단지 유행이 지났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을 살피고 사유할 힘이 없다면, 더 큰 힘을 가진 자를 따르는 사대주의에서 벗어날 도리는 없다. 이런 점에서 국수주의와 사대주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 다. 현실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바라보고 고민할 사유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국수주의는 현실을 외 면하며 오래된 과거의 영광에 기대는 것이고, 사대주의는 현실을 주도적으로 고민할 힘이 없어 맹 목적으로 외래의 힘에 기대는 태도다. 외래의 좋은 사조는 문제의 해답이나 출구가 아니라 입구일 뿐이다. 과거의 좋은 선례 역시 현실의 문제를 반추할 뿐 곧바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전통논쟁에서 한국성 담론으로

 

전통 계승 논쟁은 196, 70년대 형태를 중심으로 하는 흐름과 80년대 이후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흐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의 흐름을 대표하는 건축은 김중업의 <프랑스대사관>과 이희태의 <순교복자성당>을 꼽을 수 있고, 후자의 흐름을 대표하는 건축은 김수근의 <공간사옥>을 들 수 있 다. 전자의 흐름은 최근 김효만에 의해 이어지고 있으나 외면받아 온 것이 사실이고, 후자의 흐름은 승효상, 민현식, 김인철, 우경국 등 이른바 4.3 건축가들의 작품을 통해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실 현되었다. 이들은 서구의 과학정신이 이룩한 물질의 풍요에 대한 대안으로 한국 전통건축에서 유추 한, ‘비움’이나 ‘없음’, ‘빈자의 미학’을 찾아 나섰다. 주로 현대 모더니즘 건축을 수용하되, 한국 전통 의 정신적 가치나 문화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 방식이었다. 서구의 기술문명에 대한 대안을 전통적 사고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에선 긍정적이지만, 서양은 물질문명, 동양은 정신문명이라는 식의 단순 이분법에 갇혀있다는 비판도 제기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형태와 공간의 이분법을 넘어서고 있는 김효만의 최근 작품은 주목할 만 하다.

 

한국성’ 논의는 손쉽게 전통논쟁의 뒤를 이어받았다. 한국성에 대한 모색은 김성우의 「동서양의 세 계관과 건축관」(『건축과환경』, 0001~0101)과 임석재의 『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대원사, 1999년), 최근 이상헌의 『한국 건축의 정체성』(미메시스, 2017년)에 이르기까지 주로 동, 서양 미학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건축이라는 학제 자체가 서양의 산물인 만큼, 한국 또는 동양에서는 유사 한 학문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탓에 이론화의 근본적 어려움이 있다. 서양의 현대적 이론체계에 비 추어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한국(또는 동양)의 이론을 구성해 내야하며, 자칫 오리엔탈리즘의 덫 에 걸려드는 위험도 피해야 한다. 게다가, 비교연구는 쉬운 이해를 도모하게 하지만, 도식적으로 흘 러 단순화될 수 있다. 아직까진 비교연구가 나열적인 사례 비교에 머물러 개념화로까지 진척되었다 고 보긴 어렵다. 그리고 전통건축을 전통적인 동양사상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현대의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안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역시 완전히 현대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불 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새롭게 구성해내든, 현대의 언어로 번안을 해내든 모두 지적 모험과 창조 적 상상력이 필요해 보인다. 중국미학이나 한국미학의 성과와 함께 건축사의 창조적 개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미완의 해석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전통 해석 속에 있는 번역불가능성, 해석불가능성이라는 구성적 결여야말로 새로운 해석과 창조가 가능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이자 지역적 특성인 한국성은 고유한 소재이자 독창적 작품 세계를 통해 늘 새롭게 개척되어야 할 보고와도 같다. 그 길에 정해진 방식이란 있을 수 없다. 지금까 지 그 길이 쉽지 않았다면 최소한 우리에겐 앞으로의 오류를 검증해줄 역사적 경험이 쌓였다.

 

한국성 탐구는 여러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함정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성 모색의 이면에는 한 국식 근대성 또는 대안적 근대성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런 생각은 근대성의 근본적 의 미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자체란 것을 간과한다. 마치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가 문화의 다양성을 억 누르기만 한다고 단순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근대 포디즘 생산체제 아래서는 다원주의에 대한 요구 가 대안으로 보였지만, 다품종소량생산 체계를 의미하는 포스트포디즘 시대에선 다원주의야말로 개별시장을 위한 맞춤 생산방식이라는 자본의 논리에 속한다. 우리가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대안적 모더니티 역시 불가능하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한국성에 대한 모색은 자본주 의의 문제점에 대한 극복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큰 함정은 한국성 이라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로써 망각되는 것은 문화란 동일하다기보다는 애 초부터 혼종적이며 이질적이라는 사실과 혼종화를 통해 새로운 문화가 생성된다는 사실이다.

 

비판적 지역주의와 탈식민주의의 교훈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이지도 정적인 것도 아니다. 반대로, 정체성은 복수적 이며 항상 변하고, 심지어 다중적이기까지 하다. 라캉이 거울 단계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듯이, 인간 의 자아가 형성되는 것은 거울상을 통해 인지된 타자의 이미지를 통해서이다. 아기는 타자의 이미 지에 동일시되면서도 소외를 경험하게 되는데, 거울상에 비친 자신의 온전한 모습과 아직 미숙한 자기 신체 사이에서 어떤 불일치와 결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소외의 결과, 라캉이 ‘이상적 자아’라고 부른 타자의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것에 사로잡힌다. 문제는, 이런 갑옷과도 같 은 견고한 자아의 틀을 깨고 나와야만 언어와 문화의 세계(상징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상징계로 진입하고 난 후에도 주체는 여전히 내부에 결여를 간직한 불안정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한국성 논의나 정체성 모색은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 타당하다. 케네스 프램턴 이 주창한 비판적 지역주의와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1980년대 초 케네스 프램 턴이 주창한 ‘비판적 지역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미치고 있을 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램턴은 후기자본주의에 영합한 모더니즘 건축과 과거를 답습한 지역주의 건축 모두를 비판하며 장소성, 텍 토닉, 시각적 이미지를 넘어 촉각적인 것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대의 기술과 재료를 수용 하되, 복고적인 것으로의 퇴행을 경고한다. 이처럼, 현대 건축 언어와 기술적 성과를 수용하되,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비판적 지역주의를 제시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비판적 지역주의가 주류의 흐름에서 벗어난 주변적 실천에 대한 모색 속에 나왔다는 것이다. 주류를 추종 하거나 과거의 권위에 기대는 것과는 무관하다. 주류의 흐름을 의문시하고 이에 대항하는 힘이야말 로 문화가 존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한국성 논의도 형태와 추상적 개념 또는 공간을 넘 어 텍토닉과 장소성에 대한 논의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표적 이론가인 호미 바바에 따르면, 어떤 문화도 다른 문화의 영향 바깥에 놓 여 있는 순수한 존재일 수 없다. 애초 새로운 문화는 문화들 간의 경계선에서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고유한 문화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며, 현대에 살아가는 현재의 서구화된 문화와의 혼종화 에서 문화의 생성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바는 문화차이를 중시하는데, 차이는 모든 문화 의 고유한 일부라는 사실과 어떤 문화도 동질적이지 않고 이질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호미 바 바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와 식민화와 불가피하게 연결되는 근대화를 다시 점검해볼 것을 요구한 다. 자본주의화, 식민화, 근대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식민지배는 유럽과 미국의 권력, 그리고 근 대 진보의 거대 서사를 형성해낸 힘이다. 한국성 담론과 정체성의 모색이, 자본의 논리와 물질문명 이 빚어내는 현대의 부작용을 극복할 대안이 되지 못한다면,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나 상품으로의 전락을 피할 도리가 없다. 더구나 다문화주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와 나란히 진행되는 기획이 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를 단지 획일화하는 힘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사태를 단순하게 보는 것이 다. 일제 식민지 경험을 겪은 우리는 이를 섬세하게 바라봐야 한다. 조선예술이 체계적으로 조사되 고 기록된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으며, 조선예술의 위대한 아름다움을 설파한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그가 한국의 미를 존중하고 찬양했던 이면에는 조선의 역사가 핍박의 역사로 점철된 슬픔의 민족이며 그 애상이 선의 예술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본, 동정을 가장한 다분히 편파적이며 의뭉스러운 시선이 깔려 있었다. 최근 들어, 야나기 무네요시의 사상이 일본 제국주의와 공모 관 계에 있었고, 비극적인 식민의 현실을 예술로 가리거나,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본적 오리엔 탈리즘이라는 혹독한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식민화의 역사적 경험이 있는 우리는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를 맞아 경제발전에 따른 이민의 유입과 한류의 수출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겪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질적 문화들이 함께 공존을 모색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어 이를 새로운 문화의 생성으로 전환해야 하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문화가 단순한 상품으로 전락하는 길을 막아야 한다. 게다가 우리의 오리엔탈리즘조차 조심히 살펴야 할 때가 왔다

 

 

 

 

 

글. 이경창 Lee, Kyoungchang ┃ 건축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