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7. 09:07ㆍ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Autumn, a poem that has come into copy
나는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로 불리던 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삼국 시대만큼이나 아득하 게 느껴지는 시절이다. 생일이 늦어 또래보다 발육이 더디고 많이 어리숙했는데 장래희망만 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조숙하게 시인이었다. 2학년 때 담임 선생님 때문이다. 그 선생님 은 학생들에게 200자 원고지 50장을 사서 묶어 개인 문집을 만들게 했다. 원고지 묶음 앞 뒤에 두꺼운 종이 흑표지를 댄 후 송곳으로 구멍을 뚫은 후 철끈으로 묶어 만드는 그 문집에 우리 들은 삐뚤 빼뚤 서툰 글씨로 글짓기를 했다. 산문도 쓰고 동시도 지어 적었다. 가을 운동회 즈 음에는 운동장에 모여 앉아 백일장을 하기도 했다. 그 백일장에 내가 적어 낸 동시가 구청장 상을 받았다. 시장 상도 아니고 겨우 구청장 상이었는데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을 보면 아마 도 그게 내가 학교에 들어가 받은 첫 번째 상이 아니었나 싶다. 반 아이들이 박수로 축하해주 는 가운데 교탁 앞에 불려 나가 상을 받고, 얼굴이 발갛게 되어 자리로 돌아와 앉으면서 시인 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길지 않으니 쓰기 어렵지도 않은데 칭찬과 박수도 받으니 요즘 말로 ‘가성비’가 좋은 일이라 여겼던 것도 같다. 시는 짧으니 쓰기 쉽겠다는 생각은 얼마나 무 식한 착각이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일이다.
시인을 가슴에 품었지만 그리 간절했던 소망은 아니어서 습작을 열심히 하는 일 따위는 하 지 않았다. 집의 마루를 쓸다가 햇살에 먼지가 떠다니는 것을 보거나, 계절이 바뀌어 바람의 냄새가 달라질 때 가끔 울컥, 뭉클한 마음을 끄적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시인이 있고 내 재주는 턱없이 부족함을 깨달아 시인 되기를 포기한 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세월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삼국 시대에서 별로 멀리 오지 못한 때라 광고 문안을 만든다는 카피라이터가 뭔지도 모르고 광고 회사에 입사했다. 알고 보니 광고 카 피는 시와 닮은 점이 꽤 있었다. 우선 카피는 시처럼 짧다. 대부분 TVCM의 길이는 15초, 길어 도 30초를 넘지 않는다. 15초 안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하니 짧아도 압축적이어야 하고 간 결하게 핵심을 전해야 한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인쇄 광고의 카피도 짧다. 단편 소설도 들어갈 수 있는 신문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전면광고라도 카피를 길게 쓰지 않는다. 인쇄 광고의 카피를 쓸 때는 헤드라인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려고 노력한다. 이어지는 바디 카 피를 읽지 않아도 팔고 싶은 내용을 압축해서 전하는 헤드라인이 좋은 헤드라인이다. 가끔 헤 드라인과 기가 막히게 잘 맞아 떨어지는 바디 카피를 쓰고는 혼자 감동할 때는 아무도 읽지 않 을 시를 쓰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카피를 쓰기 전에 먼저 하는 일은 광고할 제품이나 브랜드의 장단점과 시장상황, 지향점, 목표 고객들의 프로필을 공부하는 일이다. 그 다음에 광고 캠페인의 콘셉트를 뽑아내고 영상 광고 나 스틸 광고를 어떻게 만들지 아이디어를 낸다. 그 아이디어에 들어갈 카피를 짧고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쓰고 다듬는 일은 광고 한 편을 마무리하는 시점까지 계속된다. 생각이 꽉 막혀서 아무런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또는 아주 강력한 슬로건이나 헤드라 인을 써야할 때 나는 자주 시집을 뒤적거린다. 시간이 많지 않으면 시집을 열고 목차에 있는 시의 제목만 훑어 보기도 한다. 짧은 문장 속에 흘러 넘치는 감성과 촌철살인의 지혜를 가두어 놓은 시는 내게 가장 큰 참고서이다.
나는 시인이 되지 못한 대신 카피라이터가 되어, 우리말을 환상적으로 빚어 놓은 시를 컨닝하 기도 하며 시처럼 짧은 카피를 쓰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의 장래희망에서 아주 크게 벗어나 지 않은 과히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를 참고서로 훔쳐보는데 그치고 있지만 시를 직접 광고에 사용하고 있는 기업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보고 있는 교보생명 사옥에 붙어 있는 광화문글판이 시를 기업이미지 홍보에 이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음의 이미지는 올여름 내내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에 걸려 있던 글판이다. 채호기 시인의 ‘해 질녘’이라는 시에서 한 구절을 빌려 ‘노을을 바라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꽃잎으로 둘러 싸인 아름답고 포근한 세상임을’ 느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절대 끝날 것 같이 않던 여름의 기세가 한 풀 꺾이고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니 광화문글판의 가을 메시지가 궁금해진다. 9월이 되자 어김없이 광화문에 가을편이 걸렸다. 가 을편은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오장환 시인의 ‘종이비행기’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내친김에 지난 가을에 내걸렸던 글판의 시들을 검색해서 다시 읽어 봤다. 작년에는 신경림 시 인, 2016년 가을엔 김사인 시인, 2015년에는 퓰리처 상을 수상한 미국 시인인 메리 올리버 (MARY OLIVER)의 시가 광화문글판을 장식했다.
MG새마을금고는 아예 시를 활용한 영상을 만들어 2016년 여름부터 온에어 시키고 있다. 계 절 별로 ‘영화관에 찾아온 시’라는 극장 광고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는 상업적 메시지 를 전달하는 영상 광고와는 별개로 제작되어 친근한 브랜드로 고객에게 다가가는 역할을 하 고 있다. 화려함보다 차분함을 앞세운 이 광고들은 어두운 영화관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 계절 의 감성을 한껏 자극한다. 작년 가을편을 찾아보니 이성선 시인의 ‘사랑하는 별 하나’의 일부 가 유명 연예인의 목소리로 낭송되었다.
자막) 영화관에 찾아온 시
Na)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자막) 이성선 - 사랑하는 별 하나 中
어두운 밤도 비춰주는 사랑을 위하여
(MG새마을금고_극장광고_2017년 가을편_카피)
바람의 냄새가 달라졌다, 풀벌레 소리가 달라졌다, 노을 빛깔이 달라졌다, 가을이다. 발걸음이 저절로 문 밖으로 향한다. 에어컨이 없는 밖으로 나가면 뜨겁고 거대한 찜통으로 들어가는 것 같던 여름이 언제였나 싶게 거짓말처럼, 계절이 바뀌었다. 이 아름다운 가을이 얼마나 짧을까,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이 든다. 더위가 가시니 비로소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이고, ‘철이른 낙 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려와 그냥 있는 것이 고맙게 느껴진다. 여름 내 무력하게 늘어져 있던 몸에도 슬며시 생기가 돌아오고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중 하나인 ‘사랑하는 힘’ 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전속력으로 소멸을 향해 달려갈, 짧을 것이 분명한 이 가을… 새 마을금고 극장 광고 속의 시처럼 어두운 밤도 비춰줄 별 같은 사람 하나, 아니 여럿 만나 닥쳐 올 길고 추운 겨울에 대비하고 싶다. 휴대 전화기 속에 저장된 그립고 다정한 이름들을 한 명 씩 가만히 불러 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8vmQQzoHnqg
(MG새마을금고_극장광고_2017년 가을편_유튜브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 카피라이터 ┃ (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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