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간(無間)’ : 무욕(無欲)의 공간론 혹은 극단순주의 2019.2

2022. 12. 14. 09:05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Mungan' : Space Theory of Freedom from Avarice, or Minimalism

 

언제부터인가 나는 한국의 전통 공간론에 관심을 가졌다. 없을 무, 사이 간, ‘무간 (無間)’이라는 말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런 저런 기회에 부분적으로 피력해 왔 던 것을, 「‘무간(無間)’ : 무욕(無欲)의 공간론 혹은 극단순주의」라는 주제로 마 무리해둔다.

 

1. ‘간(間)’, 음양이 맞물린 곳(➡無間)

 

겸재 정선은 「금강전도(金剛全圖)」(1734년작,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를 그리 고 나서 ‘제시(題詩)’를 적었다. 최근 나는, 이 제시 속에 우리 문화의 코드를 읽어낼 중요한 글자 ‘사이 간(間)’ 자와 ‘사이 없음(無間)’의 추상적 공간론이 숨어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림 1 : 「금강전도」와 제시(題詩)>

우선 ‘제시’ 56자의 글자 배치 방식을 보자. 열한 줄로 쓰되, 중앙에 ‘사이 간 (間)’( ) 자 한 글자를 놓고, 그 양쪽에 각 5줄 씩 대응시켰다. 그 글자 수는, 10- 11(❶-①), 7-7(❷-②), 4-4(❸-③), 4-4(❹-④), 2-2(❺-⑤) 식으로 딱 맞추었다. 그래서 개골산(즉 겨울 금강산의 드러나 뼈)처럼 ‘간’을 뾰족한 산 봉 오리를 ‘음각(陰刻)’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사이 간’이라는 글자는 문자로서 드 러나 있기에 양각(陽刻)이라 할 만 하나, 그 글자는 사물-사건들의 ‘사이’를 의 미하기에 드러나지 않은 공간 즉 ‘사이 없음=무간(無間)’이라는 음각을 붙들고 있다. ‘사이(間)=사이 없음(無間)’이라는 묘한 구조는 하나의 산 봉오리를 만들 어낸다. 이 산 봉오리는 ‘사이(間)=사이 없음(無間)’: ‘글자 부분=글자 없는 부 분’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사실은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2 : 금강전도의 제시를 점과 선으로 표시함>

 

아울러 10-11(❶-①)이라는 글자 수를 살펴보자. 중앙의 간(間)을 기준으로, ‘좌(左)-청룡(靑龍)-동(東)’에 배치한 27자는 ‘양(陽)’의 수이며, ‘우(右)-백호 (白虎)-서(西)’에 배치한 28자는 ‘음(陰)’의 수이다. 동쪽은 해가 불끈 솟는 일 출 지역이며, 서쪽은 해가 떨어지는 일몰 지역이다. 글자 수 10-11의 배치에서 이런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간(間)’은 ‘음양이 맞물린 곳’, 생명력이 꿈 틀대는 살아 움직이는 추상적-철학적 장소이다. 그런데, 그것은 음양의 ‘빈틈없 음=무간(無間)’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세계의 사물들을 - 문자가 세상을 드러내듯이 - 일일이 다 표현하기에 구상적 장소라고 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 철학-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코드 즉 ‘현관(玄 關)’이 숨어있다. 현관은 ‘현묘한 진실의 세계(=道)로 들어가는 관문’을 말한다. 이것은 ‘참된 의미(=意)’로 들어가는 문이다. 금강산은 계절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봄에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 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이라 부른다.

이렇게 저렇게 변화하는 모습을 다 담은 금강산의 참 모습(眞顔)을 한 폭의 그림 으로 그러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정선이 “하인용의사진안(何人用意寫眞顔)” 즉 “누가 뜻을 써서 그 참모습을 그려 낼까”라고 말한 이유를 알만하다. 참 모습 (眞顔)이란 ‘물리적 자연 세계’(존재의 세계)의 일이며, 문자와 사유를 활용하 여 그 의미를 포착하는 것(用意)은 ‘인간의 세계’(소유의 세계)의 일이다. 정선의 ‘제시’에서 보여준 문자 부분(=意)과 그 밑의 텅 빈 공간 부분(眞顔)은 서로 다르지만, 이것은 ‘사이(間)=사이 없음(無間)’처럼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유무 상생(有無相生)의 ‘묘(妙)’한 공간이다. 예컨대 사람이 살아야 할 집이 집으로서 쓸모 있으려면, 즉 생명력을 얻으려면, 방과 창문처럼 텅 빈 공간이 함께 있어야 한다(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왕필본 『노자』11장) 

정선의 「금강전도」 ‘제시’에는, 문자 부분과 문자가 없는 텅빈 부분이 묘하게 멋 진 금강산 산 봉오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봉오리는 숨어 있다. 여기서 나는 ‘사이(間)=사이 없음(無間)’의 멋진 철학과 건축술을 찾을 수 있다. 드러내면서 감춘 공간의 모습 말이다. 구상적이면서 추상적인 공간이다.

 

2. 보이나 보이지 않는 공간 - ‘천인무간(天人無間)’

 

「금강전도」에 나오는 ‘사이(間)=사이 없음(無間)’의 건축술과 철학은 우리 문화 속의 오래된 건축술이다. 그 발원지를 거슬러 오르면 ‘천인무간(天人無間)’론이 있다.

천인무간이란 하늘(天)과 사람(人) 사이에는 ‘칸=칸막이=간극’이 없다는 뜻 인데, 이런 ‘천인무간’의 일원적 인간관은 여말선초기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에서, 이어서 양촌 권근의「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 圖)」나 퇴계 이황의「천명신도(天命新圖)」에서, 나아가 하곡 정제두의「양지체 용도(良知體用圖)」에 명시되어 있다.「양지체용도」에는 ‘천지만물일체무간’이 또렷이 드러난다. ‘천지’라는 시공간(천은 ‘시간’을, 지는 ‘공간’을 상징함) 속에 있는 ‘만물(萬物)’은 ‘한 몸(=一體)’으로 ‘간극이 없다[無間]’는 것을 밝힌 것 이다.

 

<그림 3 : 陽村 權近의 『天人心性 分釋之圖』 중 「天人心性合一之圖」]>

 

<그림 4 : 秋巒 鄭之雲의 「天命圖(=天命舊圖)」를 수정한 퇴계의 「天命新圖」>

 

<그림 5 : 하곡 정제두의 &lsquo;양지체용도&rsquo;>

 

천인무간은, ‘지적(知的)・논리적’인 통합의 노력이 없이도 하늘과 사람은 자명 하게 원래 간극이 없이(無間) 하나(一元)가 되어 있다는 사상이다. ‘하늘[天]’과 ‘사람[人]’ 사이에 간극[間隙]이 없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물리적 자연 속 에 인간적 삶이 자연스레 흡수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에는 하늘과 사람이 합일되기 위해서는 ‘공부’라는 ‘지적・논리적 긴장과 노 력’이 동반된다. 합일이란, 마치 ‘오행(五行)’이 ‘토(土)’(中原, 中華, 黃色)를 중 심으로 ‘목(木)’(東-夷-春-靑色), ‘화(火)’(南-蠻-夏-赤色), ‘금(金)’(西-戎秋-白色), ‘수(水)’(北-狄-冬-黑色)의 각 변방-오랑캐를 통합하는 것처럼, 중 국과 그 주변을 통합하려는 일종의 사상 ‘공정(工程)’이다. 그것이 학술적으로는 격물치지와 같은 공부와 내면적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엔 당연히 이론 적・원리적・논리적 통합의 의지와 노력이 수반된다. 그런데 천인무간론은 그러한 긴장감이 사라져버리고 하늘이 사람과 자연스레 다이렉트로 연결됨으로써, 간극 을 말소시킨다.

 

3. 한칸[一間]→반칸[半間]→무간[無間]

 

아울러 ‘천인무간’의 전통은 시조 속에도 살아있다. 즉 김인후(金麟厚. 1510- 1560)의 아래 시조처럼, 산-수-인간은 ‘절로절로’의 전체적 흐름 속에 아무런 ‘간극 없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靑山도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山 절로 水 절로 山水間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이러한 천인무간의 전통은 한국의 자연관의 근본이다. 이것은 중국의 천인합일 (天人合一)과도 다르다. 천인무간은 천인(天人)이 이미 자명하게 ‘통(通)’해 있 다는 관점에 서 있다. 그래서 인간의 위치는 천지 속에서 특별히 구별되지 않는 다. 천지만물은 이미 서로 ‘하나’이기에, 별도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합일의) 인 위적인 조작이나 노력이 불필요하다.

이어서 송순(宋純. 1493-1582)의 시조를 보자

 

十年을 經營하여 草廬三間 지어내니

나 한間 달 한間에 淸風 한間 맡겨두고

江山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마지막으로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시조를 보자.

 

十年을 經營하야 草廬 한間 지어내니

半間은 淸風이오 半間은 明月이라

江山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송순의 경우는 인간에게도「한칸[一間], 달과 청풍(淸風)에게도 각각「한칸[一 間]」을 맡겨두고, 강산은 너무 커서 들여놓을 데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 본 다고 한다.

한국의 전통 정원이나 산수 풍경, 전원 생활의 극치는 이런 풍류에 기반한다. 초 려 한 칸[間], 청풍 한 칸[間], 명월 한 칸[間]은 강산을 배경으로 하나를 이룬다. 초려-청풍-명월이 각각의 공간을 차지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것은 천지 속에 임 의적으로 설정된 위치일 뿐, 별도의 고유한 장소가 아니다.

그런데 김장생에 이르면, 천지 속의 ‘초려삼간(草廬三間)’은 ‘초려 한칸[間]’으 로 좁아지고, 그 속에 청풍 · 명월이 각각「반칸[半間]」씩 ‘사이좋게’ 나누어 쓴 다.「칸[間]」은 인간과 만물이 존재하며 소통하는 간극 없는 소박한 자연 공간이 다. 초려=초가의 세칸[三間]에서, 한칸[一間]으로, 한칸에서 다시 반칸[半間]으 로 진행되나, 사실은 한칸, 반칸은 무간(無間: 칸없음➡무칸)을 애교 있게 표현 한 것이라 보아도 좋다.

 

<표 1 : 초가삼간에서 무간으로의 이행 방식>

참고로 일본에서는 중국의 천인합일도, 한국의 천인무간도 아닌 ‘천인분리(天 人分離)’를 전통으로 한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천은 천으로서의 ‘분(分)’ 즉, 각 기 고유의 역할, 기능, 활동 공간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늘과 사람 사이에 극복 불가능한 ‘간극(단절)’이 존재한다. 예컨대 일본의 분재나 정원을 보라. 모 두 인위적으로 창조된 풍경이자 정취이다. 자연과 작위 사이의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4. 무욕의 공간론 : 극단순주의 혹은 극미니멀리즘

 

천인무간론의 ‘무간’은 소유적 삶을 영위하는 ‘인간세계’가 물리적 자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이른바 ‘존재세계’로 흡수, 편입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과거 노래 가사에서 만나던 ‘초가삼간’은 실제로 ‘무간’을 말한다. 삼간이라 하지만 실제로 는 방 한칸의 소박한 집, 최소한의 주거공간이다. 그 ‘조려=초가집(草廬) 한칸은 청풍(淸風)-명월(明月)-강산(江山)과 간극이 사라진, 무욕의 공간이다. 아울러 극단순주의 혹은 극미니멀리즘을 보여주는, 딱 있을 것만 있는, 군더더기 없는 존 재의 공간이다. 거기서 최소한의 삶 즉 인간의 자연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는 삶 을 지향해 가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하늘을 닮고 땅을 닮으면서, 결국은 한나 아 렌트가 말하듯이 ‘천지’라는 ‘지구적 삶=인간적 조건’을 그대로 저항없이 받아들 이는 것을 과제로 한다. 다시 말해서 무욕의 공간을 찾아서, 무욕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글. 최재목 Choi, Jaemok 영남대 철학과 교수 · 시인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 시인

영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던 도 중 일본으로 건너가 츠쿠바 대학원 철학사상연구과에서 석 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방문학자·객원 연구원으 로서 하버드 대학, 도쿄 대학, 레이던 대학, 베이징 대학에서 연구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또 한 1987년『매일신문』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여러 권의 시집 을 낸 시인이자 전시회를 연 화가이기도 하다. 전공은 동양철 학 중에서 양명학과 동아시아사상사이다. 저서로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일/중/한국판), 『노자』, 『언덕의 시학』, 『상 상의 불교학』 등이 있다.

choijm@y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