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에는 마음을 주세요! 2019.2

2022. 12. 14. 09:06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Give your heart in Lunar New Year's Day!

 

우리는 해마다 두 번의 새해를 맞는다. 부산스럽게 새해 인사를 하며 양력 새해 를 맞은 후 겨우 한 달쯤 지나서 음력 새해가 찾아오면, 마치 처음인 양 다시 새해 복을 비는 덕담을 나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두 번째 새해의 의미는 좀 더 각별해서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이 모이고, 주변 사람 들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2월의 달력을 넘기니 바로 그 음력 새해가 시작되 는 설날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어린 시절 설날이 가까워오면 엄마는 씻어 불린 쌀을 방앗간에 가지고 가서 가 래떡을 뽑아 오셨다. 말랑말랑하고 길다란 가래떡을 통째로 들고 한 입 베어 물 면, 보드랍고 쫄깃한 하얀 살이 입을 가득 채웠다. 적당하게 굳은 가래떡을 썰 때 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와서 도와주기도 했다. 두 사람이 마루에 각자 도마를 펴 고 앉아 떡국 떡 모양으로 가래떡을 써는 손놀림은 어린 내 눈에 신기하게만 보였 다. 만두를 빚을 때는 한자리 차지해서 손을 보태기도 했다. 만두를 예쁘게 빚어야 예쁜 딸 낳는다는 어른들 말에, 만두를 통통하고 예쁘게 빚으려고 몰래 애를 쓰기도 했다.

 

설날 아침 마당에 던져져 있던 복조리, 김이 오르던 풍성한 밥상,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하던 엄마의 목소리, 낯선 방문객이 나타날 때마다 소란스 러워지던 골목길, 세뱃돈 자랑하러 복주머니를 들고 나온 꼬맹이들 그리고 설날 이 지나도 이어지던 한가하고 아득한 겨울방학… 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설날이 나 추석이 들어있는 달이 되면 빨간 날의 숫자를 헤아리며 어디론가 떠날 궁리를 먼저 하게 되었다.

 

AIA 말레이시아_TVCM_설날 광고_2018_스토리보드①

 

음력 설을 겨냥한 시즌성 광고는 중국이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같은 중화권 국가에서 많이 보인다. 멀리 있는 자식들이 부모가 있는 집으로 모이는 장면을 보 여주는 영상이 눈에 자주 띄는 걸 보면 설날에 가족이 모이는 풍습은 우리 나라와 비슷한 것 같다. 부모는 정성스럽게 음식을 장만해서 자식이 오기를 기다리 고, 자식은 일이나 여행을 핑계로 나타나지 않는 일은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인 지 광고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AIA 말레이시아_TVCM_설날 광고_2018_스토리보드②

 

보험회사 ‘AIA 말레이시아’가 2018년 음력 설에 온에어한 영상 광고를 보자. 치 매에 걸린 할머니가 집안을 둘러 보다가 다급하게 할아버지를 찾는다. 할머니 는 낮잠을 자고 있던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내일이 설날인데 왜 집에 설날 장식 을 하나도 안 했어?”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갑자기 분주해진다. 분가해 살고 있는 아들과 딸에게 설날 음식을 구해서 저녁을 함께 먹으러 오라고 전화를 한 다.(AIA 말레이시아_스토리보드① 참고).

할아버지는 전화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인이 직접 나가서 장을 보고, 집 안팎 에 복을 비는 부적을 붙이고, 반짝반짝 장식등을 매단다. 할아버지가 일하는 동 안 할머니는 몇 번씩 같은 옷을 들고 나와서 어떤 옷을 입을까 묻는다.

저녁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붉은 색 설빔을 입은 할머니의 옷매무새를 고쳐주고 머리를 귀 뒤로 넘겨준다. 왁자지껄 자식들이 도착한다. 이 때 카메라가 슬쩍 벽에 걸린 달력을 잡는다. 날짜는 6월 8일! 설날은 벌써 몇 달 전에 지났다. 영상을 되돌려 보니 두 사람의 복장은 한여름의 반 팔과 반바지 차림이었다. 할아버지는 치매인 할머니의 착각에 맞추어 여름에 다시 한 번 설날 장식과 음식을 준비하고 자식들을 모아 저녁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부름에 군말없이 달려온 자식들과 노부부가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모습은 7,80년대 내 어리던 날의 설날 을 연상시킨다. 할아버지는 말한다. 젊었을 때는 아내가 늘 설날을 준비해서 가 족을 행복하게 해주었으니 이제는 가족들이 할 차례라고. 비록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빙빙 돌더라도 할머니가 있어서 행복하고,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 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AIA 말레이시아_스토리보드② 참고).

 

해태제과_해태종합선물세트_TVCM_1970_스토리보드

 

설날 선물을 골라 보려고 백화점 특별 코너에 나가봤다. 넉넉치 않은 예산으로 흔하지 않은 선물을 하려니 결정이 쉽지 않다. 가격대가 만만하고 부피도 커서 부담없는 참치와 스팸, 식용유 선물세트를 보니 어릴 적 과자종합선물세트가 떠 오른다. 군것질거리가 흔하지 않던 시절 달콤한 과자와 초콜릿이 ‘종합’으로 들어있는 선물세트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안에 있는 과자를 나누는 과정에서 형 제들 중 하나는 꼭 눈물바람을 했고, 빈 상자를 서로 가지려고 실랑이도 했었다. 1970년에 방송된 해태제과의 선물세트 광고를 찾아 보니 흑백 화면에 고음의 성 우 목소리가 촌스러우면서도 정겹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현실을 솔직하게 이야 기하는 카피도 알아듣기 쉬워서 좋다. 

 

여NA)        연말연시 이 때만 되면 힘에 겨운 겉치레 선물

                  소동 때문에 야단이죠?

남N)          그러나 해태제과의 갖가지 선물용 과자는

                 받아서 흐뭇하고 주어서 보람찬 선물입니다.

여NA)       연말연시 선물로는 온가족이 함께 즐기 수 있는

                 해태 과자의 해태 선물을 꼭 잊지 마세요!

어린이)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태제과_해태종합선물세트_TVCM_1970_카피

 

싱가포르의 통신회사 스타허브(StarHub)는 작년 설날, 많은 며느리들에게 원성 을 살만한 설날 선물 광고를 만들어 내보냈다.

중년의 부부가 아들, 며느리가 처음 장만한 집 구경을 하고 있다. 아들은 신이 나 서 설명하는데 엄마의 표정은 별로 밝지 않다. 배경 음악도 집을 산 기쁨보다는 약간의 근심을 표현하는 것처럼 조용한 선곡이다. 엄마는 다 자란 아들이 부모의 품을 아주 떠나는 게 조금은 섭섭한 것이다. 그 엄마에게 아들이 설날 선물이라며 붉은 봉투를 하나 내민다. 그 봉투 안에는 아들의 집 열쇠가 들어있다. ‘엄마가 원 하는 때 언제든지 오세요.’라는 메모와 함께. 그제서야 엄마는 기쁨의 눈물을 흘 린다. 시엄마 나이에 훨씬 가까운 내가 봐도 며느리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운 일 방적인 선물이다. 그런데 싱가포르에서는 수용 가능한 상황인지 광고 아래 달린 댓글은 부정적인 반응이 별로 없다. 행복해 하는 엄마의 얼굴 뒤에 이어지는 메시 지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모두 성장합니다, 그러나 절대 따로 떨어져서 성장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Na)            We all grow up,

                  But let’s never grow apart.

                  Family is the greatest prosperity.

 

스타허브(싱가포르)_TVCM_설날 광고_2018_카피(부분)

 

Unifi(싱가포르)_TVCM_설날 광고_2015_스토리보드

실현 가능성이라는 점을 놓고 보면 아들 집 열쇠를 받는 ‘스타허브’ 광고의 시어 머니보다 말레이시아 통신회사 ‘유니파이’ 광고에 등장하는 엄마가 더 현실적이 다. 설날이 되어 아들은 엄마에게 고화질 대형 TV를 사오고, 딸은 비싼 거라면 한국의 인삼을 선물로 들고 온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내가 그렇 게 큰 TV가 필요한 장님이냐?’, ‘난 인삼이나 비타민에 돈을 낭비할 만큼 약하지 않아. 매일 타이치를 하거든.’이라며 자식들의 선물에 시비를 건다. 그녀에게는 설날이라고 1년에 한 번 비싼 선물을 사오는 아들, 딸 대신 매일 얼굴을 보여주는 어린 손녀 딸이 가장 값진 선물을 주는 사람이다. 손녀는 인터넷을 이용한 영상 통화로 매일 할머니와 소통한다.

 

정관장_TVCM_19년 설 / 아이(안성기)편_2019_스토리보드

 

눈을 국내로 돌려 올해 방송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설날 광고를 찾아보았다. 긴 호 흡의 스토리를 보여주며 설날의 정서를 환기시키는 광고는 눈에 띄지 않았고, 스팸에서 노트북까지 다양한 종류의 설날 선물 광고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 정관장 설날 선물 광고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설에도 마음을 주세 요.’라는 카피 한 줄 때문이다. 정관장은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정관 장을 사는 모습을 시리즈 광고로 제작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설에도 마음을 주세 요.’라는 카피로 시리즈의 일관성을 살리고 있다. 

 

직원NA)    오랜만에 꼬마 손님이 왔네요.

아빠)         저희 딸이…

직원)         누구한테 주려고?

여아)         엄마가 요즘 많이 힘든가 봐요. 같이 놀아줄 힘도 없대요.

직원)         엄마가? 직원

NA)           매일 녹초가 되는 엄마가 아이 눈에도 안쓰러웠나 봅니다.

                  힘이 되고 싶은 가족에게 그 마음 잘 전해지길 바랍니다.

                  설에도 마음을 주세요.

 

정관장_TVCM_19년 설 / 아이(안성기)편_2019_카피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을 주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내가 마음을 주고 있다는 사 실을 알릴 수 있을까? 몇 십만 원 하는 비싼 선물을 하면 광고에서 말하는 것처 럼 힘내라는 마음, 고마운 마음, 건강하라는 마음이 전해질까? 어떤 보상을 바라 거나 최소한의 인사치레로 보낸 선물이라면 거기에 따라오는 마음도 받아야 할 까? 여든이 휙 넘은 우리 엄마, 명절에도 정관장커녕 치과에 안 간다고 잔소리만 하는 딸이 주는 마음을 아실까? 평생 내 편이라고 믿고 있지만 내게서 식용유 선 물세트 하나 받은 적 없는 친구는 내가 주는 마음을 느낄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물건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마음이라는 게 존재할까?

설이 다가온다. 다행히 갑이 아니라 마음 없는 선물을 받을 일이 없고, 날라리 을 이라 마음 없는 선물을 무리해서 광고주에게 할 필요도 없다. 순수하게 선물을 주고 싶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나누고 싶은 ‘메이드 인 정이숙’ 표 선물을 떠올려본다. 직접 만든 비누와 향초, 엄나무 꿀에 절인 수삼, 식초 간장 설탕에 절인 비 트 피클, 국산 깨와 잣을 꿀에 버무려 만든 강정, 물에 불려 삶아놓은 시래기, 유 기농 귤껍질을 식초에 씻어 말려 볶은 귤껍질차… 나열하고 보니 내 마음이라는 것이 저토록 작고 초라하고 품은 많이 드는데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구나, 안쓰러 운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올해 설날에는 그런 것들로 내 마음을 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주는 더 작고 깊은 마음을 받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Z6svAKnvRRU

AIA(말레이시아)_TVCM_설날 광고_2018_유튜브 링크

 

http://www.adic.co.kr/ads/list/showTvAd.do?ukey=75374

해태제과_해태종합선물세트_TVCM_1970_인터넷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IFV7RXtK8QM

스타허브(싱가포르)_TVCM_설날 광고_2018_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E4DyxZ6YKr8

Unifi(싱가포르)_TVCM_설날 광고_2015_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YR-hwFajmR0

정관장_TVCM_19년 설 아이(안성기)편_2019_유튜브 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 (주)프랜티브 이사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업 계에 입문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주)샴페인,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 계열의 벨컴에서 크리에이티브 디 렉터로 일했다. 독립대행사인 (주)프랜티브에서 ECD로 일하 다 독립하여 다양한 광고물 제작과 글쓰는 일을 하고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