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그녀의 목소리에도 내 심장은 식지 않는다” 2019.3

2022. 12. 15. 09:09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Even her cold voice does not cool down my heart”

 

 

눈보라 치는 산에서 한 남자가 독백한다. 굳은 표정, 눈을 만지는 손이 외롭다.

 

그 날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고

새 하얀 눈이 모든 숲을 덮었다.

가장 아름답게 별이 반짝이던

모든 것이 완벽한 겨울이었다.

 

겨울이 아니라면 준비해 간 도시락을 펴놓고 먹었을 나무 테이블과 의자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눈 덮인 등산화의 지퍼 고리에는 반지가 하나 매 달려 있다. 자막에 보이는 시간은 오전 11시. 카메라가 빠져서 보니 남자는 테이블 위에 조각처럼 서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손을 모아 입김을 불어 보 고 패딩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쓴다. 독백이 이어진다.

 

벌써 세 시간 째

끝없는 기다림

기다릴 준비는 되어있다.

언제까지라도.

 

남자는 몸을 돌려 눈 쌓인 산길을 걷는다.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 오후 3시 35분, 전화를 건다. 신호는 가는데 받는 이가 없다. 사연을 짐작하게 하는 자막이 흐 른다.

 

그녀와의 체감온도 영하 30도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보인다, 눈을 감는다. 그는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을 가졌다. 카메라가 조금 뒤로 물러나서 남자가 있는 곳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 녀가 안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통나무집 지붕 위에 남자는 누워 있다. 남자가 애타게 기다리는 여자는 대답이 없는데 남자는 애써 여자의 차가움에 얼지 않 는다고 혼잣말을 한다.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에도 내 심장은 식지 않는다.

 

 

오후 4시 50분.

나뭇가지 위에 핀 눈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남자는 눈을 한 움큼 쥐어 입으로 가져간다. 마치 눈이 그녀가 좋아하던 피스타치오라도 되는 것처럼 한 입 베어 문 다. 공연히 발길질을 해서 눈바람을 일으켜본다. 왕관 같은 뿔을 가진 순록 한 마리가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순록의 눈빛은 사랑이 떠났다는 사실을 남자 보다 먼저 알고 있다.

 

달콤했던 추억을 안고 이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새벽 6시. 남자는 꼬박 밖에서 밤을 지샌 걸일까? 눈보라는 여전하고 멀리 산봉우리는 눈과 구름에 가려졌다가 보였다가를 되풀이한다. 남자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시계를 던져버린다. 그리고 단호한 몸짓으로 실연을 받아들인다.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표정이다.

 

새벽 여섯 시

찬바람 샤워.

이젠 그 어떤 차가움도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 나는 그녀를 잃고

세상의 어떤 혹한에도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혹한은 끝났다.

 

마음의 추위까지 막아주는 빈폴

아웃도어 도브 다운.

 

김수현을 모델로 기용하여 2014년 제작된 빈폴아웃도어의 홍보 영상이다.

감성 멜로 '그 겨울의 씬'이라는 제목으로 3분 넘는 길이의 영상이 만들어져 유튜브를 통해 유통되었고, 15초와 30초로 편집되어 방송 광고로도 쓰였다.

스산한 풍경 무표정한 모델의 얼굴을 3분 가까이 지켜보다가 ‘혹한은 끝났다.’라는 나레이션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떨어졌다. 사랑을 잃고 눈보라 속에서 밤 을 새운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에 내 아이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언젠가 어디선가 내 아들들도 저 청년처럼 사랑을 잃을 날이 있겠지? 아니다, 벌써 몇 번이나 있었겠다. 어느 낯선 골목에서 밤새 서성거렸을 아이를 상상만 해도 내 마음이 저민다. 아득히 먼 옛날 내 집 앞에서 밤새워 서 있던 소년도 떠오른다. 지금 이름도 잊어버린 그 소년, 흔들리던 눈빛은 아직도 또렷하다. 어쩌면 광고의 주인공처럼 밖에서 혹한의 날씨를 맞닥뜨리는 일이 따뜻한 방 안에서 마음 속의 눈보라와 마주하는 일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 물리적인 추위와 싸우느라 마음의 추위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질 테니까. 손이 얼고 발이 얼고 머리 카락 한 올까지 얼어버릴 것 같은 혹한이라면 사랑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하찮은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얼마나 추울까 겁을 잔뜩 먹고 지난 겨울을 맞았었다. 한 해 전, 혹한에 고생했던 기억 때문이다. 지구온난화 탓인지 나이 탓인지 해마다 여름은 더 더워지고 겨울은 더 추워지는 듯하다. 다행히 큰 추위 없이 겨울이 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날씨와 마음의 날씨는 많이 달라서 어느 해보다 춥고 바람 부는 겨울을 견 뎌야 했다. 마음 주었던 친구에게 배신 당했고 믿었던 이를 의심하게 되었다. 주워 담지 못할 거짓말을 퍼뜨리고, 제 삶에 몰입하는 대신 남의 삶을 염탐하는 속물도 보았다. 상처를 다스리기 위해 겨울 한 달, 나는 내 마음을 혹한에 세워두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 SNS에 글을 올리는 일이나 단체 카톡방에서 대화를 하는 일을 중단했다. 대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음 속에 태풍이 일고 눈보라가 불었다. 분노와 후회가 만든 바람이고 서운함이 낳은 눈폭풍이었다. 나를 되 돌아보았고 남에게 상처를 주었을 경솔한 내 행동을 반성하기도 했다. 더디지만 시간은 흘렀고 눈보라는 내 안에서 잦아들었다.

광고 속의 남자가 느꼈던 것처럼 그 친구와의 체감온도는 영하 30도였지만, ‘차가운 그녀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도 내 심장은 식지 않’았다. 마침내 겨울이 끝났다. 내 마음 속의 혹한도 끝이 났다. 이 겨울 나는 친구를 ‘잃고 세상의 어떤 혹한에도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봄, 봄이 바로 코 앞에 와있다.

 

 

 

 

 

* 사진 : 빈폴아웃도어_그 겨울의 씬_홍보영상_2014_스토리보드 **

굵은 글씨 : 빈폴아웃도어_그 겨울의 씬_홍보영상_2014_카피 ***

https://www.youtube.com/watch?v=cpeiFzeooXs

빈폴아웃도어_그 겨울의 씬_홍보영상_2014_유튜브 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 (주)프랜티브 이사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업 계에 입문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주)샴페인,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 계열의 벨컴에서 크리에이티브 디 렉터로 일했다. 독립대행사인 (주)프랜티브에서 ECD로 일하 다 독립하여 다양한 광고물 제작과 글쓰는 일을 하고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