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2019.5

2022. 12. 20. 10:09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Ours are precious!"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일어설 줄을 모르고 앵콜을 외쳤다. 이미 한 곡 앵콜을 들었지만 아쉬움은 더 커졌다. 세 시간 가까이 휴식 시간도 없이 계속된 공 연이었다. 의자도 불편하고 거미줄이 보이기도 하는 좁은 소극장, 그런데도 관객들은 불편한 좌석도,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는 것도 잊은 듯했다.

가수가 다시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 빠른 리듬의 곡을 열창한 그는 숨을 몰아 쉬었다. 객석과 무대가 가까워 가수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이 눈에 보였다. 가수가 기타의 지판에 왼손을 얹었다. 관람객들은 숨죽이고 시선을 집중했다. 맑은 음성이 극장 가득 퍼졌다. 좀 전까지와는 다른 조용한 노래였다.

 

생각나는 사람 조용한 사람

그리운 사람 언제쯤일까

무엇을 하고 싶다

나지막이 얘기 하던 사람

오솔길 걸으며 산과 바다와

함께 살고 싶다던 사람

눈물이 마르기 전에 떠나간 사람

 

눈을 감고 가사에 귀를 기울였다. 읊조리듯 가수의 노래가 이어졌다. 마치 나에게만 속삭이는 것처럼 가사 한 줄 한 줄이 내 얘기처럼 느껴졌다.

 

나뭇잎 녹슬어지고 숱한 사연들

깊은 밤 고개를 들어 내게 올 때면

메마른 내 인생이 생각나

목이 없는 가로등처럼

외로운 침묵에 기대어 하루를 보낸다

 

세 곡을 메들리로 부른 앵콜이 끝나고 가수가 무대를 떠났다. 벅찬 감동이 가시지 않은 빈 무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극장을 빠져나왔다. 마음이 가득 찬 탓 일까? 봄비에 젖은 어두운 거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그 날 나와 관객을 사로잡은 가수는 작은 거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김수철이다. 4월 초 대학로 학전블 루 소극장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에서였다.

 

4월 6일 학전블루 소극장 가수 김수철 공연 사진 _ 한겨레 신문

 

대학 1학년이던 1983년, 가수 김수철의 솔로 1집 앨범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 ‘못다 핀 꽃 한 송이’, ‘다시는 사랑을 안 할테야’, ‘정녕 그대를…’ 등이 수록된 앨범의 재킷 이미지는 야구 모자를 눌러 쓰고 코트 깃을 올려 세운 그를 부감으로 찍은 모습이었다. 빗물이 땅에 고였는지 물에 그림자가 비쳐 보였는데 전체 적으로 블랙 톤이었다. 석기 시대 만큼이나 아득한 80년대의 청춘들은 친구의 생일에 LP판이나 시집을 선물하는 일이 흔했다. 아마도 김수철의 팬이었던 친 구는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내게도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앨범이 음악을 반대하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김수철이 ‘나 만의 은퇴 기념 음반’으로 생각하고 만든 것이라는 속사정은 최근에 그의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솔로 1집은 은퇴 음반이 되지 않았고, 우 리 곁에는 아직 김수철과 그의 음악이 건재하다. 나는 그와 동시대를 사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은퇴 음반이 될 뻔한 솔로 1집                                                                                                                                 발매 1주일 만에 폐기처분 된 국악 1집

 

음악평론가 신현준은 가수 김수철의 행보에 대해 창비 웹진에 이런 칼럼을 남겼다. ‘그는 ‘가요인 김수철’로부터 ‘국악인 김수철’로 변신했다. 즉 연예인으로부터 예술인 으로의 변신이었지만, 그것이 생활의 어려움이 노정 되 어 있는 길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그가 발표 한 음반들 중 「서편제」의 영화 싸운드트랙을 제외하고는 ‘히트’하지 못했고, 그 결과 그는 알아주는 사람 없는 일 을 외고집스럽게 추구하는 인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너무도 아이러닉하게도 김수철이 국악을 선택하 면서 ‘한국적 록’의 가능성은 사라져버렸다. 완전히 사라 져버린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계기를 잃어버렸다.’라고 김수철의 변신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2002년의 일이다.*

「88만원 세대」를 쓴 경제학자 우석훈은 2009년 본인의 블로그에 김수철 3집 LP를 3천원이라는 헐값에 샀다면서 ‘오랜 고생을 끝내고, 몇 년 전에 다시 복귀한 걸 보기는 했지만, 밥이나 먹고 살까? 영 걱정스러운 아저씨이다.’라고 썼다. 물론 김수철 3집을 3장이나 가지고 있고 ‘이 판(김수철 3집)에 나온 소리들이 내 소리의 기준이 되었다.’면서 김수철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쓴 글이다. **

두 사람은 인기 가수의 위치에 편안하게 머무르지 않고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김수철의 어려움을 걱정해서 저런 글을 쓴 것이라. 과연 김수철이 뭘 했기에 저렇게 여러 사람을 걱정 시키는 것일까?

그는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연말 굵직한 가요대상을 전부 차지하고, 가왕 조용필을 위협할 정도의 인기를 얻은 정상급 대중 가수였다. 대중적으로 이렇게 엄청난 성과를 내고도, 그는 인기와 상관 없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어찌 보면 기인의 행보를 걷고 있다. 39년째 하고 있는 우리 국악의 현대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거문고 레슨을 시작으로 국악관현악단의 기본 악기와 우리 장단을 배우겠다고 작심했다. 피리, 대금, 가야금, 아쟁, 사물… 그걸 다 배우려면 30 ~ 40년은 걸리겠다 싶었지만 주경야독으로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국악 선생을 찾아가 배우기를 계속했다. 그런 배움을 토대로 우리 소리를 현대화, 클 래식화, 대중음악화 하고, 그밖에 뉴에이지 같은 새로운 장르화 하기 위해 39년 동안 작곡-연주-공부-작곡-연주-공부를 반복하고 있다. 기타를 국악에 응용 한 ‘기타 산조’라는 것도 그가 곡을 만들고 이름을 붙인 새로운 장르다.

그렇게 공부해서 음반을 냈다. 국악 음반만 25장을 냈는데 100만 장이 넘게 팔린 서편제 OST 하나 빼고는 다 망했다. 가요 음반으로 번 돈을 모두 다 투자하 고도 모자라 빚도 졌다. 그런데도 계속했다. 하다 보니,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 97 대전엑스포, 97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2002 월드컵 개막식과 조추 첨 행사 음악, G20 정상회의까지 7개 국제 행사 음악을 다 하게 됐다. 지금 김수철은 우리 음악을 서양 악기 연주곡으로 작곡하여 세계인이 듣고 공감하게 만 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김수철이 국악을 현대화 하여 대중에게 알리려고 고군분투 하는 동안 40여 년이 흘렀다. 그런데 여전히 국악은 안 팔린다. 국악은 광고에 쓰이는 일도 아주 드물 다. 1992년 박동진 명창이 흥부가의 한 대목을 불렀던 솔표 우황청심원 광고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국악을 소재로 한 다른 광고가 제작되는 유행을 만들지는 못 했다. 2005년 LG그룹 광고에 2008년에는 이가탄 광고에 국악연주와 소리가 소재로 쓰였고, 2013년 KT의 광대역 LTE TVCM에 국악인 송소희가 나와 창으로 메시지를 전한 것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국악이 등장하는 광고는 개그 프로그램에서 히트한 하나의 유행어를 사용해 만들어지는 광고 숫자보다도 적다.

솔표 우황청심원의 광고 모델은 지금은 작고한 박동진 명창이다. 그는 광고 속에서 〈흥보가〉 중 ‘놀보, 제비 몰러 나가는 대목’을 부른 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고 말한다. 하지만 박동진의 광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우리 것은 내게 소중하지만 지루하고 고루한 것이었다.

 

조선무약_솔표 우황청심원_TVCM_1992_스토리보드

박동진) 제비 몰러 나간다.

제자들) 제비 몰러 나간다.

박동진) 제비 후리러 나간다.

제자들) 제비 후리러 나간다.

Na) 내일로 이어지는 변함 없는 우리의 가락처럼 솔표 우황청심원의 약효도 내일로 이어집니다.

박동진) 잘 한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Na) 우리의 것 우리의 자랑 솔표 우황청심원

조선무약_솔표 우황청심원_TVCM_1992_카피

 

김수철은 천재다. 신시사이저와 하프시코드 등 서양의 소 리와 중국 악기 ‘얼후’, 우리 전통악기 피리, 아쟁, 태평소, 아쟁, 대금 등의 소리를 조화시켜 작곡한 팔만대장경을 들 으면 천재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곡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다. 전자 기타를 메고 사물놀이패 한가운데 서서 꽹과리, 징, 장구, 북과 주거니 받거니 신나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 면 나도 모르게 어깨춤이 나온다.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우리 것’에 대한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 변했다. 김수철이 만든 우리 음악을 통해 비로소 ‘우리 것’은 나에게 ‘소중한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나는 것, 재미있는 것, 즐기고 싶은 것이 되었다.

사진 _ www.kimsoochul.co.k

어느 인터뷰에서 김수철은 말했다. “국악은 왜 가요처럼 즐기지 못하나, 이런 숙제를 안고 실험을 하고 있고요. 우 리 정신과 의식을 담아 현대화한 음악을 궁극적으로는 세계에도 알려야지, 여기까지가 제 목표예요.” 그는 학전 무대에서, 언젠가 100인조 국악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공연하는 것이 꿈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관객의 한 사람으로 함께하 는 것이 내게는 새로 생긴 꿈이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tn8XDruVXs

조선무약_솔표 우황청심원_TVCM_1992_유튜브링크

*https://www.changbi.com/archives/37677?cat=2638

[창비 웹진 / 2002. 4. 1.]

*https://www.changbi.com/archives/37677?cat=2638

[창비 웹진 / 2002. 4. 1.]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업 계에 입문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주)샴페인,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 계열의 벨컴에서 크리에이티브 디 렉터로 일했다. 독립대행사인 (주)프랜티브에서 ECD로 일하 다 독립하여 다양한 광고물 제작과 글쓰는 일을 하고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