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salon] 과거와의 공존,중림동 중리단길 2019.3

2022. 12. 15. 09:29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oexistence with the past, Jungnim-dong, Jungnidan-gil

 

아직 추위가 곁에 있지만, 멀리서 봄기운이 다가옴을 느끼는 시기. 찬바람에 여몄던 옷깃을 풀고 살랑살랑 봄 기운을 느껴보세요. 길을 벗 삼아 거니는 즐거움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대한건축사협회 학생기자단이 서울의 ‘중리단길’을 찾아갔습니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조세희)』의 배경이 되었던 성 요셉아파트

중림동

서울시 중구 만리동2가 일대

면적 : 0.48㎢ 인구 : 1만 2832명(2008)

 

중림동은 서울역과 충청로역 사이의 작은 동네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설 ‘난쟁이를 쏘아올린 공’ 행복동의 배경이 된 곳이다. 지금의 중림동은 소설의 배경이 됐던 시대보다 개발이 된 모습이며, 서울로 7017의 끝자락으로 이어진 동네 중 하나로 도시재생사업이 진행 중이다. 요새 핫한 동네의 길에 ‘∼리단길’을 붙이는 추세에 따라, 중림동에도 중리단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중림동에는 여전히 세월의 흔적은 많이 남아있어 옛날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 존하는 중림동의 매력을 물신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장소를 보려고 한다.

 


 

도시를 연결하는 사람길 ‘서울로 7017’ _ 서울 중구 청파로 432

 

사람들로 붐비는 서울로 (사진 _ 서울로7017 홈페이지)

 

서울로7017프로젝트는 서울역 고가도로를 ‘차량길’에서 ‘사람길’로 재생하고, 단 절된 서울역 일대를 통합 재생하여 지역 활성화와 도심 활력 확산에 기여하는 사 람중심 도시재생프로젝트다. 공모전을 통해 당선이 되어 서울수목원라는 컨셉을 가지고 설계가 됐다. 서울로는 단순히 기념물로서가 아니라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돌아서가는 과정으로서 공간을 강조하고자 했다. 단순히 광장이나 공원이 아닌 그 사이에 광장이면서 공원인 공간을 조성하고 이 공간에는 서울에 존재하는 다양한 식재들이 화분형식으로 교량 위에 심어지게 했다. 그 사이에서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서울로는 퇴계로, 남대문시장, 화현동, 숭례문, 한양도성, 대 우재단, 호텔마누, 세종대로, 지하철, 버스환승센터, 서울역광장, 공항터미널, 청 파동, 만리동, 손기정공원, 중림동, 서소문공원 총 17개의 동네로 걸어다닐 수 있 다. 그리하여 각 지역의 특성들을 고려하여 역사문화자원들을 되살리는 지역활성 화 방안들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서울로라는 공간에는 정원관리 도서관, 장미카 페, 장미무대, 인형극장, 호기심화분, 전망카페, 벤치화분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즐비해 통행로 자체를 걷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림동 일대, 서울로와 연계되는 역사문화거점과 탐방로

 

서울로와 연계되는 주요 장소들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 약현성당 _ 서울 중구 청파로 447-1

 

약현성당에서 바라본 서소문 자리

아직은 이 마을의 개발보다는, 사이사이 숨어 있는 몇 개의 공간들이 더 와닿는 다. 그 중 약현성당은 약초가 많아 붙여진 이름인 약현(藥峴)에 세워진 성당이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라고 하지만, 최초란 타이틀은 후에 붙여진 것일 뿐 크 게 중요하지 않다. 우선적으로 봐야할 것은 서소문 순교성지다. 천주교가 박해당 할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탄압에 의해 처참히 죽어나갔고 이 순교 성지가 잘 보 이는 곳에 작은 성당이 지어졌다.

이후 한국 성당 건축에 큰 영향을 준 이 성당의 규모는 다른 성당에 비하면 작은 편이다. 한 바퀴를 돌아도 금새 입구가 다시 나타난다. 대부분의 성당에서는 부지 의 입구를 따라 올라가면 정문이 있는것에 비해 이 성당은 뒤돌아가야 내부로 들 어갈 수 있다. 물론 이 길은 후에 성당 주위 환경이 뒤바뀜에 따라 다시 조성된것 이지만, 성당의 앞에 마당이 있는 것이 아닌, 급경사를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아하다.

약현성당의 정면은 서소문 순교지를 바라보고 있다. 이 말은 이 성당이 추후 산 자들을 위해 지어졌다기보다는, 탄압에 의해 죽음을 맞았던 죽은자들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들린다.

 

약현성당 내부 의자와 스테인드글라스

 

내부로 들어가 보자. 내부는 생각보다도 더 작고 아늑하다. 서양의 성당처럼 화 려하거나 경외롭지는 않지만, 긴 회랑을 가지고 있으며 스탠딩글라스와 성경을 조각해 좋은 조각들도 긴 벽을 장식한 것이 성스럽다. 성당은 높은 곳에 위치하 고 있지만 작고 낮아서 많은 채광이 들어오지는 않는다. 때문에 매우 엄숙하고 경건하다. 가끔씩 기도를 하러 오는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조용했다.

이 곳 약현성당 기념성당에서는 그 규모와 보존가치 때문인지 이제는 기념미사 위주로만 진행된다. 결혼과 장례 등 특별한 미사를 제외하면 바로 옆에 있는 본 당에서 진행하게 된다.

건축에서 종교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 건물에서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는 바 로 옆에 있는 기념관에서 관람 할 수 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가볼 만하다.

종교와 역사 그리고 정치적 관계 하에서 파생하게 된 건축에 대해서, 그것도 조 선땅에 서구식 건물을 지을 생각이라니. 서울역과 중림동을 지난다면 꼭 방문해보길 바란다.


언덕 너머 보이는 조선의 역사, ‘서소문역사공원’ _ 서울 중구 칠패로 5 서소문공원

 

약현성당에서 길을 내려오다 보면 새로이 단장을 마쳐 시민에게 개방을 앞둔 ‘서 소문역사문화공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소문역사문화공원은 서소문 밖 네거 리라고도 불린다.

서소문은 현재 소실되었으며 조선 역사에서 서민들이 주로 드나드는 문이었고, 주로 사형터로 이용됐다. 당시의 민란 등을 일으킨 자들, 또는 병인박해, 신유박 해 등의 천주교 박해 사건 당시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 라졌다. 희생된 순교자들을 본받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84년 서소문역사공 원 안에 현양탑을 세웠으며, 1997년에 공원을 새로 단장하면서 기존의 탑을 헐 고 새로운 현양탑을 세웠다. 천주교 측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소문역사공 원을 순교자들의 성지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고자 했다.

2014년부터 현재까지, 서소문역사공원 조성사업은 조선후기의 역사성을 기록 하자는 취지로 추진되고 있다. 그에 따라 특정 종교가 국유지를 점유하여 ‘성지 화’ 한다는 비판적인 의견이 존재해 왔다.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초부터 종교적 사건 뿐 아니라, 국가적 사건에 대한 처형이 이뤄진 역사적 사건이 중첩된다는 특성 또한 고려해야하기에 특정 종교의 의미만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 를 삼아왔다. 이러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서소문역사공원에는 지상에는 역사공 원, 지하에는 순교자 추모관 등으로 설계될 예정이다.

현재 공사 진행중인 서소문 역사공원의 모습

 

종교적 독점화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소문역사공원은 서울시에서 소개하는 ‘천주교 서울 순례길’의 일부로 선정됐다. 중구청에 따르면, 천주교 서울 순례 길은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 순교성지와 천주교 관련 사적지를 연결한 도보 코스 이다. 서소문뿐 아니라 절두산, 광희문, 명동성당과 약현성당, 가회동 성당 등을 잇는 구간으로 말씀의 길·생명의 길·일치의 길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로써 서 울로 7017, 중리단길 등과 연계되어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아 역사·문화적 측면에서 구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서소문역사공원의 대표적 기념비인 현영탑이 보이는 모습

 

비록 종교 단체의 영향력이 자리 잡고 있지만, 서소문역사공원의 역사는 천주교 가 자리 잡기 훨씬 전부터 켜켜이 쌓여 왔다. 올해까지 이어지는 서소문역사공원 조성사업을 통해 종교 뿐 아니라 역사·문화적 측면에서도 지역의 중심 명소로서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인식될 수 있길 바래본다.

 


중림동의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염천교 수제화거리’ _ 서울 중구 의주로2가 일대

 

서울역 주변의 높은 현대 고층건물들 사이의 염천교 건너편으로 시간여행을 한 듯 옛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가 있다. 이 거리는 엄천교 수제화 거리로, 우리나라 최초의 수제화 거리다.

1925년 경성역 건립과 함께 염천교 수제화 거리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그 후 지 금까지 수제화 장인들과 함께 처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성역의 건립으로 유동인구와 상경 인구가 늘고, 주변상권이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광복 후 엔 미군들의 군화를 이용해 국군 군화 및 다양한 구두로 재탄생 시켰으며, 그를 통해 사업을 화장시키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구두는 꼭 하나는 있어야 하 는 필수품이었기에 수제화 거리는 전성기 시절을 맞이하여 유행과 패션을 선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대형 제화업체와 값싼 중국제품의 등장, 수제화에 대 한 인식 감소로 인해 염천교 수제화 거리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구두를 찾 는 사람도, 수제화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도 주는 상황일 뿐더러 옛 건물인 만큼 건물 안정등급조차 매우 낮아 장인들의 작업환경이 열악한 실정이다. 하지 만 재개발 문제가 제기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따로 건물보수나 개선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도 불구하고 염천교 수제화거리의 역사성과 가치를 인식하 고 지키기 위해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 중에는 서울로 7017 프로젝트 와 연계하여 염천교 수제화 거리를 활성화하고 홍보하는 활동이 있다. 또한 중구 보건소와 함께 국민대학교에서는 이 지역 구두장인들과 상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적 지원을 하고 있으며, 장인들은 이를 통해 ‘협업’, ‘소통’의 자세를 배우고 있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에 직접 가보면 낡고 오래된 상점들이 줄줄이 있고, 1층엔 상 점들이, 윗층엔 신발 공장들이 있었다. 상점들 밖에는 구두 경력 30∼40년이 넘 는 상인들과 숙련된 장인들이 정성들여 만든 여러 종류의 수제화들이 놓여있었 다. 단정하고 묵직한 느낌의 남성구두화, 곱게 수놓은 여성단화, 화려하고 알록 달록한 브릿지 댄스화, 골프화 등산화 등 아주 다양하고 예쁜 신발들을 볼 수 있 었다. 상점 안에는 구두와 세월을 함께한 장인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제화 거리의 간판도 또 하나의 볼거리다. 염천교의 오래된 간판은 아크릴류와 비닐계통의 시트지를 주로 사용한 아날로그 방식과, 수제방식으로 제작된 간판 들로 수제화의 감성과 딱 어울린다. ‘굳이어 제화' , ’무도화', ‘가르방', '싸롱화등의 옛날간판이 복고풍 서체로 적혀있었다.

염천교 수제화거리

 

수제화거리를 걷다보면 줄선 상점들 한 가운데 카페가 있다. 카페 문의 간판과 외관은 이 수제화 거리에 녹아들어 자연스러웠다. 옛날 다방 느낌을 풍기는 이 카페에선 맛있는 프랑스 디저트를 맛 볼 수 있다. 카페 내부는 복층구조로 되어있 고 통로가 좁다. 벽지색, 가구, 찻잔 등 곳곳에서 빈티지함과 아늑함을 느낄 수 있 을 것이다.

 

염천교 수제화거리

 

서울역의 고층건물들로 둘러싼 복잡하고 시끄러운 거리에서 벗어나 고요함과 옛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가까운 염천교 수제화거리를 들려보는 건 어떨까.

또 기회가 된다면 나만의 특별한 구두 한 켤레 제작해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중림동은요?

 

현재 중림동은 한창 개발 중으로 앞으로의 모습이 더욱 기대되는 바다. 하지만 중림동의 도시재생이 진행되는 만큼 그에 따른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벌써부터 월세 인상은 물론, 새로운 임대인을 찾는 현수막이 보인다. 그 동네만의 맛집도 이러한 문제로 인해 프렌차이즈로 바뀐다. 길이 뜨면 동네가 유명해지는 만큼 기존 상인들은 터를 뺏긴다. 중림동을 오래 지켜왔던 상인들에겐 중리단길이라고 칭하는 게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로 인해 지역색이 흐려 지게 된다면 중림동 재생사업의 의미는 어디에 둬야 하는 걸까. 한창 핫했던 경리단길은 이러한 ‘∼리단길'에 따라오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현재는 길에서 한산함이 느껴진다. 중림동의 중리단길마저 이러한 길로 가지 않도록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옛날과 현재가 공존하는 중림동의 특색을 잃지 않고 발전되길 기대한다.

 

 

 

 

 

글. 김세빈(Kim, Sebin _ 중앙대학교 건축학과),

박수진(Park, Sujin _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

박가연(Park, Gayeon _전남대학교 건축학과),

박우승(Park, Wooseung, 한국교통대학교 건축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