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한국 건축에 대한 불온한 생각 2022.12

2022. 12. 21. 15:15아티클 | Article/에디터스레터 | Editor's Letter

Extremely personal, rebellious thoughts about Korean architecture

 

고백하건대 나는 지극히 세속적인, 상업적 목적 가득한 전략적 브랜딩 건축을 하며 살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월간 <건축사> 편집국장으로서 수시로 찾게 되는 국내 건축작품들을 보는 즐거움은 상당하다. 상업적 목적이 강한 건축이 아닌 고매하고 순수하고 조각 같은 건축들을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유명 건축잡지에 실리는 최근의 한국 건축들은 지극히 팬시하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젊은 시절 술자리에서 논하던 객기 어린 우리 건축의 어색함은 상당히 사라지고,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매끈함과 세련됨을 보여주 고 있다. 가끔 옥에 티처럼 어울리지 않거나 거친 디테일에 아쉽기도 하지만, ‘잘 디자인된’ 건축들은 결코 열등감으로 아쉬워할 대상들이 아니다.

그런데, 뭔가 1% 부족한 것이 있다. 언젠가부터 노벨상 수상을 하지 못한 국 내 학계를 비판하고 자조하듯, 하이야트 재단이 만든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지 못한 국내 현실을 자조하고 비판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런 한탄 때문 인지, 정부는 프리츠커 상을 목표로 해외 연수의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뉴스는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혹시 렘 콜하스나 리처드 로저스가 받은 하크니스 장학금이나 풀브라이트 장학금 같은 것이지 않을까 했는데, 아 뿔싸! 그게 아니라 그냥 워킹 홀리데이 같은 연수프로그램이었다. 각설하고, 프리츠커 상을 간절히 받아야 하는 이유는 모르지만, 과연 프리츠커 상을 받을 수 있을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불온한 생각을 드러낸다면, 굳 디자인은 몰라 도 방향이 바뀐 프리츠커 상을 수상할 한국 건축이 있을까 의문이 든다. 너무 빨리 돌아 가신 김수근, 김중업 선생이 좀 더 생존 해서 자신들의 철학적 산물로서 건축 미학을 완성하고 드러냈다면 오래전받았을 법도 하다. 르 꼬르뷔지에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알바 알토 등의 영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 시절을 지나 온전한 본인의 철학적 결과물들이 더 나왔다면 말이다. 지나간 시간이야 그렇다 치고, 문제는 철학적인 산물로서 건축보다는 산업에 가깝고, 팬시해 보이기만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틀린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프리츠커 상이라는 틀 안에서 본다면 타이밍이 맞지 않게 되었다.

최근 십수 년간 프리츠커 상의 관점이 확실히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지극히 미 학적이고 개인 관점의 오브제로서 건축과 건축사의 정체성보다는 사회 공동체 적 관점에 주목하고 있다. 고유의 정체성과 더불어 사회적 관점과 공동체적 의 식, 인류 보편의 다양한 사회적 대안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때로는 가난한 지역주의를 가지기도 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고민하기도 하며, 빈부 격차의 한복판에 서는 건축이기도 하다.

그런데 건축은 나홀로 가능한 결과가 아니라 자본을 가진 상대에 의해 선택되 고 만들어지는 수동적 창조물이다. 낯설고, 거칠고, 생소한 환경에서는 성장할 기회가 없다. 우리가 자라나는 환경은 거의 이익논리 가득한 산성토양으로, 프 리츠커 상이 배출되는 토양과는 전혀 다르다. 토양에 맞아야 성장할 수 있다. 프리츠커는 다른 토양에서 가능하다. 그래서 난 한국 건축사들의 능력을 운운 하는 비판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프란시스 케레나 안 라카통, 이본 패럴, 알레한드로 아라베나, 왕수를 못 만드 는 것은 우리 건축 소비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럭셔리한 해외 선진 사례나 따지고, 각종 건축법으로 제한하고, 싼 것이 최고 좋은 것이라는 사고가 가득 한 환경에선 불가능하다. 그러니 더 이상 아쉬워 말고, 저소득층 주거로 유명 한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에게 VVIP 빌라 설계를 의뢰하기나 하자. 물론 내가 못 보고, 잘 모르기 때문에 불온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지도 모른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