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상실의 ‘시대 우화’ <기생충> 2019-.7

2022. 12. 23. 13:08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Parasite>
The fable of the time when humanity is being lost

 

 

 

정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독특한 제목의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을 수상하면서 화제가 되었고, SNS나 블로그, 그리고 신문에는 여기저기 영화 감상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영화의 미장센도 만만치 않게 이야기 되었다. 아마 이런 글들을 전부 모아 놓고 읽어보면 흥미진진할 듯하다. 영화 ‘기생충’ 이야기다.

1999년 <영화 속 건축이야기>를 출판하고 얼마 안 돼 개봉한 봉준호의 ‘플란다 스의 개’를 보고나서 무릎을 쳤다. 우리도 공간을 잘 이해하는 영화감독이 탄생 했구나!

그 뒤로 영화팬으로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항상 공간을 능숙하게 배우처럼 이해 하고 다루는 봉준호의 영화에 만족했다. 처음 제목을 듣고는 ‘제목 참 거시기 하 다’라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제목은 그다지 유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을 받 은 위력은 대단해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뉴스를 보고 바로 예매했 다. 이렇듯 상을 받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대중에게 가장 확실하 게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상이라고 하니까 최근 논란이 된 정부의 프리츠커 운운 이 떠오른다. 이와 관련된 생각을 쓰고 싶어 근질근질 하지만... 그러면 샛길로 샐 듯해서 멈춘다.

 

봉준호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주 52시간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 고 제작된 영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이런 발언은 이 영화의 내용과도 연관 성이 있다.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노동과 인간적 삶이다. 굳이 그의 이런 발언이 뉴스화가 된 것을 보면, 이 영화가 어떤 시선에서 만들어 졌는지 알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주 52시간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 고 제작된 영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이런 발언은 이 영화의 내용과도 연관 성이 있다. 그것은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노동과 인간적 삶이다. 굳이 그의 이런 발언이 뉴스화가 된 것을 보면, 이 영화가 어떤 시선에서 만들어 졌는지 알 수 있다.

교묘하게 입장을 뒤 섞은 덕분에 인터넷 여기저기 이 영화를 분석한 글들의 상당 수는 계급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분명 이 영화는 계급구조를 언급하고 있다. 공 간이 특히 이를 잘 드러낸다.

동선의 길이를 가지고 은유하고, 공간의 장식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공간의 크기가 중요하다. 건축하는 사람이야 다들 알지만 모든 살아 있는 동물들은 일정한 자기 영역을 확보해야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 영국의 유명 한 요리사 올리버는 그런 이유 때문에 닭이나 돼지들의 최소 공간, 최적 공간을 확보하는 운동을 한다. 미국의 유명한 프랜차이즈 치폴레(chipotle)는 움직이기 힘든 축사가 아닌 자연 방목으로 자란 소나 돼지고기만 사용한다

동물도 일정 공간을 확보해야 스트레스가 없고, 스트레스 받지 않은 고기가 신선 하다는 점이다.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

이 영화는 두 개의 공간, 아니 세 개의 공간을 통해서 인간에게 공간의 크기가 갖 는 자유로움을 설명하고 있다. 박사장의 집은 속된 말로 운동장 같이 널따랗고 한가로이 여유를 즐기는 공간이다. 반면에 김기택의 집은 반지하로 공간만 구획 되는 크기다. 문광의 남편은 자유로이 떠날 수 없는 지하의 감옥에 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의 크기는 개인의 권력 또는 자본력을 상징한다. 공간이 클수록 비용이 증가하고, 가격이 상승한다. 어느 날 돈 많이 번 부자가 성북동 주 택으로 갔다가 후회하는 이유도 단순한 매매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관리를 자기 부담으로 해야 하는 것 때문이다. 푸른 정원의 집은 눈으로 이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돈이 지출된다는 의미다. 극단적으로 비교하면 고시원의 크 기를 보면 한 사람 누울 자리정도밖에 안 된다. 감옥보다 작은 이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생활한다. 그것을 도시형 생활주택으로 건축화 한 것에 대해 건 축하는 이들은 한번쯤 고민해 봐야 한다.

아무튼 공간의 제약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주고 심리적 스트레스로 나타 난다. 그래서 강제적으로 공간을 줄이기도 한다. 감옥이 그렇다.

나중에 김기택이 박사장을 살해하고 숨어사는 지하의 감옥은 영화를 이중적으로 해석하게 한다. 감정적으로 충동해서 자기를 조롱하고 지배하는 박사장을 죽이 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스스로의 감옥이기 때문이다.

많은 영화평에서 지상과 지하의 극적 공간 대비를 언급하고 있다. 새삼스러운 영화 미장센 기법이 아니다. 영화감독 ‘프리츠 랑’은 지하의 노동자와 지상의 자산 계급을 <메트로폴리스(1927)>라는 무성 영화에서 보여주었고, 일본 SF 애니 메이션계의 거장 ‘오츠카 데사무’ 역시 <메트로폴리스>라는 동명의 만화 영화 에서 공간의 위상을 통해서 사회 계층을 보여주었다. 지배자는 하늘 높은 줄 모 르는 지구라트의 타워에 살지만, 하층 계급은 지하 1레벨, 지하 2레벨 등으로 더 떨어지면서 나중에는 쓰레기 처리하는 하층계급을 제시했다. <블레이드 러너 (1982)>의 기업인은 구름 위처럼 높은 곳에 산다.

 

화 미장센 기법이 아니다. 영화감독 ‘프리츠 랑’은 지하의 노동자와 지상의 자산 계급을 <메트로폴리스(1927)>라는 무성 영화에서 보여주었고, 일본 SF 애니 메이션계의 거장 ‘오츠카 데사무’ 역시 <메트로폴리스>라는 동명의 만화 영화 에서 공간의 위상을 통해서 사회 계층을 보여주었다. 지배자는 하늘 높은 줄 모 르는 지구라트의 타워에 살지만, 하층 계급은 지하 1레벨, 지하 2레벨 등으로 더 떨어지면서 나중에는 쓰레기 처리하는 하층계급을 제시했다. <블레이드 러너 (1982)>의 기업인은 구름 위처럼 높은 곳에 산다.

성공한 사업가의 파티와 출입구가 다른 하인들의 동선을 보여주는 <고스포드 파 크>는 신흥부자들의 성취감과 우월감을 태생적 귀족이 아닌 이들에게서 보여준 다. <기생충>에서도 박사장은 수시로 ‘선’과 ‘냄새’를 언급하며 교묘한 우월감과 계급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역시 최근 이삼년 사이에 벌어진 사업의 성공으로 이뤄낸 결과이지 오래전부터 부자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박사장의 아내가 말하는 짧은 대사에서 “어느 날” 부자등급에 올라간 익숙하지 않은 교양을 곳곳에 서 드러내고 있다.

사실 그건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기택 또한 문 광의 남편을 보고 그런 우월감을 표출한다. 남의 집 지하에서 아무도 몰래 숨겨 진 공간에 살고 있는 문광의 남편보다 자신은 우월하기 때문에 “앞으로 어떡할거 야”라는 질타 아닌 질타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독립된 자기 공간을 가진 박사장과 반지하지만 그래도 자기 가족의 공간 을 가진 기택,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숨겨진 공간에 얹혀사는 문광 부부. 공간에 대한 크기의 은유만큼 소유관계의 은유도 드러내고 있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미장센을 관찰하는 입장에서 유독 중첩된 영화는 리 메이크된 <하녀(2010)>였다. 동일한 계급을 드러내는 영화지만, 영화 <하녀> 는 싸구려 이미지의 부잣집 건물이 나온다. 건축적으로는 열등감과 테마파크식 의 표현으로 드러난 저택이 <하녀>의 배경이었고, 저택의 부자는 말 그대로 몸 의 지방층과 성적 욕망으로 점철된 사악한 이기주의자로 묘사 되었다. 반면에 < 기생충>의 박사장 부부는 젊은 엘리트답게(?) 좀 더 지적이고 우아하게 집을 선 택했다. 지적인 집의 선택은 건축가(사)의 강조에서 드러난다. 일반인들은 누가 설계했는지 관심이 없고, 단지 얼마짜리이며 몇 평이며, 앞으로 얼마나 오를 것 인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여유 있게 많이 가진 자들은 그런 것들을 숨긴 채, 우아 한 관심으로 표현한다. 마치 원래 가치 지향적이었던 사람들처럼... 그런데 이런 가치 지향은 박사장 부부의 내면이 아니었고, 타인의 강요와 시선이었다. 기우가 처음 박사장 집을 들어서는 순간 문광의 집 설명에서 드러난다. 문광이 집주인이 바뀌어도 마치 집의 매뉴얼을 아는 관리자가 필요한 것을 강조하는 셈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뭔가 복잡하고 내용이 많으면 힘들어하는 심리적 속성이 있고, 문 광은 그것을 이용했던 셈이다. 이렇게 보니 이 영화에서 건축은 이야기의 중요한 연결고리다. 가상의 건축가(사) 남궁현자의 존재와 가치가 인정되지 않으면, 문 광이라는 집사가 같이 살 이유도 없고 지하구조에 대한 이야기 전개도 불가능해 진다.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비치 하우스 _ 리차드 마이어 사진 Scott Frances (www.richardmeier.com)

 

이 글을 쓰다가 문득 미국 부자들이 집지을 때 가장 선호한다는 리차드 마이어가 떠올랐다.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백색으로 지어져 있고, 적당한 곡선으로 차가움 을 극복한다. 대체로 푸른 잔디위의 하얀 집은 환상적이기도 하고, 명쾌하다. 하 얀 집은 어떤 장식물도 어울리고, 특히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예술품의 배경으로는 제격이다. 음악이나 그림, 조각은 어느 날 갑자기 돈이 많다고 좋아지는 것이 아 니다. 억지로 좋아하면 고문이 되는 것인데, 부자들의 세계로 가면 자의반 타의반 이런 예술품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 그들과 대화가 되고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기생충>에서도 이런 장면은 여러 번 나온다. 그림이 벽을 채우고, 초 등생 아이 파티에 클래식을 연주하는 것도 그런 의미로 보인다. 인디언 좋아하는 아이가 성악을 좋아할 리 만무고...

 

이 영화의 마지막이 우울한 점은 그런 패배감을 그냥 인정해버린다는 것이다. 왜 냐면 주인공 기우의 희망은 어린애 같은 대사로 환타지로 나오기 때문이다. “돈 을 많이 벌기로 했다.” 이 허망한 말은 뭘까?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전 제 조건들이 필요하다. 도덕적으로, 합법적으로, 구체적으로... 영화는 이런 모든 조건들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 “돈을 전혀 벌 수 없을” 수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겨울인 것도, 눈 덮인 산자락인 것도 빈털터리의 불안함을 생각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어쩌면 이 영화 전체의 주제가 되는 ‘비인간성’의 사회 시스템일 수도 있다. 등장인물 누구도 냉열한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는 순 간순간 인간에 대한 애정을 상실하고 도구로 본다. 엄청난 성공 열매와 실패자에 대한 대응이 극단적인 현대사회가 사람들을 서로 서로 도구로 보게 만드는 것이 다. 이런 사회 구조적 한계를 너무 쉽고, 단순하고, 그리고 집중력 있게 묘사할 수 있는 탁월한 그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