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24. 09:04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Space built on spirit, Korean Seowon Ⅲ
한국의 서원은 중국을 참조하되 이를 조선사회의 상황에 맞추어 적용한 교육 기관이다. 조선의 사림들은 서원을 구심점으로 하여 ‘조선’ 성리학을 발전시켰으며 독자적인 건축 양식을 갖추고자 했다. 최근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 또한 이러한 점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서원을 이루는 두 주축은 유생들이 경서를 공부하는 공간인 강당과 학문의 모범이 되는 선현을 기리는 사당이다. 강당과 사당의 조합은 얼핏 이질적인 듯하지만, 한국의 서원에서 이 두 건축물은 지형 조건에 따라, 혹은 제향자의 정신에 따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당은 선현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전저후고前低後高 형으로 강당보다 높은 곳에 배치하고, 『주자가례朱子家 禮』의 원칙에 따라 강당 동쪽에 세워야 했다. (그림1) 하지만 서원 건축을 주도 한 성리학자들은 무리하게 원칙을 고집하기보다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적용하고자 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 같은 높이로, 혹은 일직선상에 배치하는 것을 허용하되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장치를 심어두었다. 이러한 장치를 발견하는 것이 한국의 서원을 살펴보는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사당을 높은 곳에 지을 수 없을 때, 필암서원과 무성서원
필암서원筆巖書院은 평지에 배치되어 전저후고의 원칙을 지킬 수 없었다. (그림 2) 따라서 성리학에 통달한 학자이자 뛰어난 건축전문가였던 옛 조상들은 건물의 시선을 사당으로 열어 존경을 표했다.
필암서원의 강당인 청절당淸節堂은 등을 돌리고 서있다. 대문을 지나 청절당으로 향하는 진입로에서 보이는 것은 청절당의 뒷모습이다. 왼쪽에 난 쪽문을 통해 반대편으로 돌아가야 청절당의 정면을 볼 수 있다. 쪽문은 폭도 좁고 높이도 낮아 들어서는 순간 저절로 고개를 숙여 사당에 예를 표하게 된다. (그림3)
청절당은 들판이 아닌 필암서원의 사당인 우동사佑東詞를 향해 대청마루를 열어두었다. 방과 대청을 들락거리는 매 순간 사당에 예를 표하도록 한 공간 배치다. 이는 필암서원의 지형을 보완하는 구조기도 하다. 필암서원은 평지에 위치해 전저후고의 원칙을 적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강당이 우동사를 바라보게 하여 존경을 표한 것이다. (그림4)
무성서원武城書院 또한 필암서원과 같이 평지에 배치되어 있다. 산수풍경이 빼어난 곳에 자리한 다른 서원과 달리, 무성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9곳의 서원 중 유일하게 민가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백성들이 ‘직접’ 통일신라시대에 선정을 베푼 고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것 또한 다른 서원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그림5)
명륜당明倫堂 뒤로 넓은 마당을 지나 6단의 계단 위에 사당이 올라타 있다. 경사로가 높지 않아 우러러 모시는 분위기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림6) 이렇듯 무성서원의 배치 구조는 다소 허술하게 느껴진다. 다른 서원과 같이 유식과 강 학, 사당 영역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자아내는 공간 구성의 긴장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버티고 견뎌낸 건축 공간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무성서원을 마을 속의 사당 영역으로 보면 허술한 건물 배치가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무성서원은 마을의 사당에 학교를 설치한 것에 가깝다 고 봐야 할 것이다. 서원이 일반적으로 깊은 산속에 위치한 것과 달리 무성서원은 마을에 둘러싸여 많은 기능을 마을에서 보충할 수 있었다.
명륜당 대청마루의 뒷벽을 헌 것은 제향자의 혼이 지나가는 통로를 내어 제향자의 사상이 민심에 가닿기 위함으로 해석됐다. 무성서원은 학문이 높은 선비가 선정을 베푼 지방관을 모시고 동네 사랑방에 기거하듯 마을 중심에 앉아 있다. 무성서원이 허술하지만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서원과 마을이 공간적으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직선축으로 구현한 정신, 옥산서원과 도동서원
『주자가례』에 따르면 사당은 강당 동쪽에 세워야 했지만, 9곳 서원이 모두 이러 한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옥산서원玉山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서 강당과 사당은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선현의 정신을 기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재 이언적은 조선사회에서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적극적으로 정치실험에 나선 인물로, 결국 유배당해 함경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동시대의 화담 서경덕 이 재야학자였다면 이언적 선생은 현실정치에서 사상과 철학을 실천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시대를 개혁하는 실천방안으로 예법을 앞세우는 향사례와 노인을 공경하는 향음주례를 제안했으며 1539년(중종 34)에는 「일강십목소一綱十目 疏」를 지어 국왕이 성리학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간신에 둘러싸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회재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은 이러한 그의 이상세계를 구현한 공간이다. 옥산 서원의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마루에 앉아 시선을 남쪽으로 던지면 자옥산 봉우리가 누각의 지붕에 걸린다. 이는 선비들의 정신이 날아가야 할 관념적인 목적지가 자옥산 봉우리임을 지시한다. 자옥산 봉우리는 이언적 선생의 학문 세계를 상징하는 사산의 하나로서 이상세계를 의미한다. (그림7)
옥산서원의 사당인 체인묘體仁廟는 구인당의 바로 뒤에 자리한다. 사당이 강당의 동쪽으로 비켜나 있지 않고 곧바로 뒤에 앉아 있는 것은 이언적 선생이 제자들의 등 뒤에서 함께 자옥산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이언적 선생의 혼은 체인묘에 있을지언정 그 정신만은 구인당에서 자옥산을 향해 학문의 방향을 가 리킨다는 것을 암시한다. 옥산서원은 이언적 선생의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학문 의 목표를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시각적으로 풀어놓았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환주문에 이르는 진입축과 동일한 축을 따라 나있다. 도동서원을 설계한 한강 정구는 퇴계의 제자였지만 강당 동쪽에 사당을 세워야 한다는 『주자가례』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이는 김굉필 선생의 의리 학문을 배 치에 실어 직선의 축을 강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정당中正堂 뒤에 사당의 출입구를 두었지만 강당이 사당을 등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일직선으로 난 돌계단이 한훤당 김굉필의 사상을 옮겨놓은 성찰의 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림9)
글. 김희곤 Kim, Heegon 건축사
김희곤 건축사
마흔이 넘어 스페인으로 떠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건축물을 돌아보았다. 스페인 마드리드건축대학교에서 복원과 재생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명하며 성 균관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했다. 문화부 장관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건축대전 심사위 원, FIKA 국제위원회 자문위원, 2017 UIA 서울 유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건축은 미래로 열린 창이자 창조의 근원이라는 믿음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세계의 문화유적과 도시 답사를 계속하며 글쓰기와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스페인은 건축이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정신 위에 지은 공 간, 한국의 서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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