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24. 09:05ㆍ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Half of me is trembling with fear, and the other half is full of courage"
마흔쯤 되었을 때, 어떤 신문기사를 보고 재미삼아 기대수명을 계산해본 적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수명에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면 더하기 네 살, 담배를 피우면 빼기 다섯 살 하는 식으로 계산하는 것이었다. 계산 결과 나의 기대수명은 93세였다. 평균수명보다 열 살이 더 많은 숫자였다. 오래 살 것이라는 결과가 기쁘기는커녕 아흔 셋이라는 나이가 너무나 끔찍하게 느껴졌다. 마흔이 넘도록 ‘심사숙고’란 것 한 번 해본 적 없이, 마음이 이끄는대로 살아온 내 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숫자로 여겨졌다.
어떻게든 기대수명을 좀 줄여야 했다. 고기를 더 먹을까? 평생 손대본 적 없는 담배를 피울까? 농담 같은 고민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수 명을 가장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문란한 성생활’이었다. 음주, 흡연은 고작 빼기 대여섯 살인데 비해 문란한 성생활의 삭감 수명은 마이너스 열다섯 살이나 되었다. 오래 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과제였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흘렀다. 나는 수명을 줄일 노력은 하지도 않고, 어느새 뻔뻔하게 홍삼이니 오메가3니 하는 건강보조식품을 기웃거리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기대수명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재수 없으면 100살까지 산다’에서 더 나아가 ‘운 나쁘면 120살까지 살게 된다’는 말까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아직도 산만큼 더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나도 이제는 좀 진지해져야 하지 않을까, 제법 의젓한 생각도 가끔은 하게 되었다. 오십을 훌쩍 넘기고도 여전히 삶이 무언지 모르겠는 나는, 내 나이 마흔이 되던 해에 전파를 탄 라디오 광고를 떠올린다.
남)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아무나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누구나 아이를 낳지만
아무나 아버지가 되는 건 아니다.
누구나 산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나 산을 오르는 건 아니다.
Na) 클라임 더 라이프 K2
(K2_라디오CM_2004_카피)
2004년 아웃도어 브랜드 K2는 클라임 더 라이프(Climb the Life)라는 슬로건으로 TV와 라디오 광고를 시리즈로 내보냈다. 산을 오르는 일이 인생을 살아가는 일과 비슷하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슬로건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다섯 편이나 제작된 라디오 광고는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살고 있던 나에게 죽비소리가 되어 울렸다.
남) 라스트 콘서트를 보고 울던 처녀는
세상의 가치를 돈으로만 환산한다.
친구를 위해 죽어도 좋다던 스무 살 청년은
울먹이는 친구의 보증을 거절한다.
나도 내가 싫을 때가 있다.
그래도 나에게 주어진 산을 올라야 한다.
Na) 클라임 더 라이프 K2
(K2_라디오CM_2004_카피)
남) 스무 살의 꿈은 10억이 아니었다.
지금은 10억을 꿈꾼다.
스무 살의 꿈은 강남 아파트가 아니었다.
지금의 꿈은 강남 아파트다.
스무 살 조용천이 올랐던 지리산과
지금 조용천이 오르는 동네 뒷산은 다른 걸까?
Na) 클라임 더 라이프 K2
(K2_라디오CM_2004_카피)
나도 그랬다. 스무 살의 꿈이 무엇이었는지는 까맣게 잊었고, 친구의 딱한 사정을 이 악물고 외면했다. 강남의 아파트는 너무 먼 얘기여서 꿈도 꾸지 않았지만, 좀 더 쾌적하고 넓은 집을 꿈에서도 바랐다. 나도 자주 그런 내가 싫었다. 늦은 밤까지 야근이 당연하고 주말에 일하는 것이 다반사인 내일도 지긋지긋했다. 그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내가 한심했고, 방치되다시피 한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아침마다 회사로 차를 몰면서 톨게이트를 지나 바다로 달리는 충동을 느꼈다. K2 라디오 광고에 나오는 출근길의 남자처럼….
남) 나는 수서사거리에 서있다.
왼쪽으로 가면 서울, 오른쪽으로 가면 속초.
나는 오른쪽으로 달리는 충동을 누르고
왼쪽으로 핸들을 돌린다.
지금 나는 소풍을 온 것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산을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Na) 클라임 더 라이프 K2
(K2_라디오CM_2004_카피)
남) 지금 나는 세 마리 용과 싸우러 간다.
내 기획서는 토씨까지 트집잡는 김이사,
늘 한 발 앞서 승진하는 입사 동기 최부장,
여섯 시면 사라지는 강대리.
무섭다. 하지만 이겨야 한다.
오늘도 나를 응원해 주는 아홉 살 딸 때문이다.
Na) 클라임 더 라이프 K2
(K2_라디오CM_2004_카피)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뎌왔던가, 내가 생각해도 참 용하다. 물론 매일 비장했던 건 아니고 늘 불행했던 것도 아니다. 10억이나 강남의 아파트는 갖지 못했지만, 대신 세치 혀의 맛있는 사치를 형편껏 누렸고, 힘든 야근 후에는 경쟁 프리젠테이션에서 승리하는 기쁨도 맛보았다. 엄마를 속이며 게임에 몰두하던 아이들 과도 지지고 볶으며 드물지 않게 하하호호했다.
그리고 이제… 그 때처럼 야근을 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엄마 노릇과 일을 동시에 하느라 종종거릴 필요도 없는 나이가 되었다. 평균수명이 겨우 60을 넘겼던 70년대라면 떠들썩하게 환갑 잔치를 하고 나서 곧 죽으리라 기대해도 좋을 나이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어쩌면 아직도 반이나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남은 반생을 알기는커녕 올해 남은 반년을 어떻게 채워가야 좋을지도 수시로 헛갈린다. 인생의 나머지 반에 대한 내 심정과 똑같은 카피를 K2의 TVCM에서 들었다.
Na) 나의 절반은 지쳐있고
나의 절반은 힘이 남았고,
나의 절반은 두려움에 떨고
나의 절반은 용기로 가득하다.
클라임 더 라이프(Climb the Life)
K2
(K2_TVCM_2004_카피)
광고 속에는 아득하게 높은 산을 오르는 남자가 있다. 앞으로 가기도 힘들고 돌아가기도 힘든, 절반쯤 올라온 상황이다. 날씨는 점점 더 험해지고 한 발자국 올 라갔다가 다섯 발자국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가 없다. 기어이 정상에 오르겠다는 투지가 불타기도 한다. 카메라는 산에 붙어 겨우 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그러나 멈추지 않고 발을 옮기는 남자를 원경으로 잡아 보여준다.
나도 안다. 지나온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돌아갈 수 없고 멈출 수도 없다.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는 저녁이나, 앞날에 대한 두려움으 로 떨리는 새벽에도 발걸음을 떼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내 생에 길고 아득하게 남은 수많은 날에, 후회와 두려움으로 주저하게 될 때마다 이 광고를 떠올리고 용기를 얻겠다고 머리 속에 적어 둔다. 그럴 때마다 산을 오르는 남자의 목소리를 거듭 읽으며, 나의 양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다독일 것이다. ‘괜찮다, 다 괜찮을 거다’, 내가 나를 위로할 것이다.
http://k2blog.co.kr/120046393722
(K2_라디오CM_2004_K2블로그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업 계에 입문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주)샴페인,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 계열의 벨컴에서 크리에이티브 디 렉터로 일했다. 독립대행사인 (주)프랜티브에서 ECD로 일하 다 독립하여 다양한 광고물 제작과 글쓰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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