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URBICON 2019.9

2023. 1. 4. 09:05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SUBURBICON

 

 

가끔 뉴스를 보면 황당한 기사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얼마 전 사회 문제가 된 무릎 꿇은 장애자 학부모의 사진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어디 그뿐일까. 오래전부터 아파트 단지들에서 벌어지는, 길 막기는 이젠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심지어 바윗돌로 막은 경우도 있었고, 양몰이도 아닌데 가시 돋힌 철조망으로 아이들 등굣길을 막아 버린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이를 님비현상이라 말하면서 비난을 하지만, 막상 자신의 거주지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들과 동일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왜 그럴까? 우리 인간의 내면 한 가운데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고, 그 욕망은 남과 구별되려는 우월감, 돈에 대한 욕심, 나와 다른 또는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것에 대한 본능적 반발 이런 것들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놀랍게도 거주 공간이 자리한다. 거주 공간은 하나의 생각과 시선이 유사한 사람들과 군집을 이루면서 선명해진다.

 

 


좋게 말하면 지역색이고 나쁘게 말하면 배타성이다. 이런 배타적 태도는 어디서 비롯될까? 흥미로운 연구 중에 골목길을 둔 단독주택지의 사람들과 아파트 단지의 사람들이 이웃관계 태도 차이에 대한 것이 있다. 골목길 사이의 단독주택지 거주자들은 이웃과 인사하고, 매우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지만, 아파트 단지에 사는 거주자들은 이웃과 교류가 거의 없는 고립된 삶을 선택하면서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낀다. 어떤 주거 형식보다 밀집되어 있는데도 심리적 단절이 확연하다. 아파트는 사실 이런 익명성 때문에 선호되기도 한다.
물론 편의성 등의 기능적 해결도 무시 못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경제적으로 이자금액 이상의 수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저축 상품이기도 하다. 자산 증식의 상품으로 주택이 역할하기 시작한 것은 새로운 일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영화 서버비콘(Suburbicon)의 첫 장면은 전혀 낯설지 않다. 살기 좋은 도시, 멜팅 팟(Melting pot - 오늘날 이민 국가들인 미국이나 캐나다 등이 국가적 장점으로 여기는 다양성을 이 영화에서는 거부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홍보수단으로 사용된다)이 아닌 도시, 비슷한 사람들이 미국 전역에서 모여 사는 곳, 쇼핑몰도 가깝고, 경찰서도 있고, 합창단의 존재까지 광고수단으로 사용된다. 이른바 근교 주택단지(Suburban)다.
1950년대 미국의 최대 흥행 상품으로 근교 주택단지는 세계 대공황 이후 미국이 내수 경기를 이끌어낸 최고의 정책 상품이다. 물보다 싼 기름 값과 효율 좋은 정제 기술로 저렴하게 팔리는 자동차는 할부 금융의 발달로 누구나 구입 가능했다. 모기지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주택가격은 교외 주택 단지로 이주를 쉽게 만들었고, 지자체는 초기투자와 운영비가 많이 들어가는 철도보다 도로 하나로 마무리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땅 넓은 미국에서 교외 주택은 자동차, 가구 산업, 주택 건설, 건축자재산업, 그리고 주택 분야 대출업 등 이른바 전 분야의 산업 소비를 이끌어 내는 최고의 상품이었다. 미국의 황금기라는 경제 호황기가 시작된 것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전역에서 건축된 이런 신도시는 말 그대로 골드러시의 사업장이었다.
낯선 공간에 건축되고 갑자기 마을이 생기고, 모르는 사람들과 이웃이 되었다. 처음 보는 공간에 모여 살게 된 이들은 정서적 공통점도 유사성도 없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동산 가격이다.

은행 이자를 내면서 이사 온 곳인데, 만약 집값이 떨어진다면? 이보다 더한 공포가 있을까?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이야기 하고, 인문학적 고상함을 갖추려 노력하지만, 신도시 거주자들의 내면에는 그들의 주머니, 은행 잔고가 얼마나 남게 될 것인가 더 중요한 것이다.
비단 바다 건너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서버비콘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를 건너 2019년 현재 우리도 마찬가지다.
전형적 교외주택의 백인 마을 서버비콘에 등장한 낯선 이웃은 이곳 주민들에겐 혼돈의 상황이었고, 전혀 예측 불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광고처럼 백인들의 마을이었던 곳인데, 이곳에 이주한 흑인 가족의 유입은 신도시라는 상품 가치를 떨어뜨릴지도 모르는 공포의 상황이었던 셈이다.
지난 수십 년간 벌어진 아파트단지를 배경으로 벌어진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보면 영화 서버비콘처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심 이데올로기’가 작용했음을 목격하게 된다.
당장 신도시 건축을 둘러싼 사람들의 항의의 핵심 이유가 무엇인가? 교통 문제? 학교 증설? 사회 인프라 시설의 문제? 그것들은 영화 서버비콘에 등장하는 백인들의 가면 같은 위선과 가증스러움이다.

 


흑인 가정집 앞에 밤마다 와서 찬송가를 부르며 동네를 떠나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공포감을 조성하면서, 그들은 인터뷰를 한다. “백인의 마을이라고 해서 이사 왔다.” “이곳에 사는 것은 노력과 교육을 통해서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이 아닌가?
당장 인터넷을 켜고 부동산 카페나 글을 읽어보면 영화 서버비콘의 주민들과 똑같은 말들을 살펴볼 수 있다. 청년 주택과 신혼 부부 주택이 뭐가 문제일까? 인구가 늘어나는 도시 환경이 뭐가 문제일까? 인프라 구축은 하면 되는 것이다. 그전에 만든 수많은 분양단지들은 왜 항의를 하지 않았을까? 낡은 아파트를 보수할 생각은 안하고 4천 세대 가까이가 매일 허물고 새로 짓기를 소망한다. 새집을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높은 집값으로 로또 맞을 생각뿐이다.
영화 서버비콘에서 드러내고 보여주는 교외주택 주민들의 가면과 위선은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흑인가정을 등장시키지만, 이 영화는 결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문제를 부각 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다 더 근본적인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을 드러내는 영화다. 이 영화를 감독한 조지 클루니는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의 평등함과 인권의 보편성을 숨기면서, 백인 가정의 불륜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중심 옆에 두고, 중심에는 전혀 다른 백인 가정의 부도덕, 위선, 가증스러움을 전진 배치하고 있다.
불륜의 관계에서 보험금을 타내려는 비열한 중산층 가족. 아내를 살인 청부를 시켜 살해하고, 변태적 관계로 처제와 사랑을 나눈다. 이 모든 것을 들키게 되자, 아이도 죽이려 하고 보험조사원도 살해해버린다. 하지만 살인 청부업자들은 자신들의 범죄가 탄로 날까 봐 불륜의 부부를 죽이고... 결국 영화의 결말은 참혹하다. 주인공은 아이를 죽이려고 치사량의 약을 탄 음식을 먹고 죽는다. 영화의 말미는 연쇄 반응으로 범죄와 연루된 모든 등장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며 죽게 되는 약간의 블랙 코미디다.
미스터리? 서스펜스? 뭔가... 그렇다. 이 영화와 아주 비슷한 인간의 욕망을 다룬 영화 <기생충>이 연상된다.
영화 <기생충>이 자본주의의 경제적 불평등을 우화로 풀어낸 것이었다면, <서버비콘>은 도시구조와 인간의 이기심을 블랙 코미디로 풀어서 보여준 셈이다.

 


이 영화의 이면을 보면 부동산과 인간의 후천적 욕망이 얽히면서 시작된다. 인간의 기본적 삶이 머무르는 주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독히도 풀지 못하는 숙제다. 특히 주거난은 식량난과 마찬가지로 폭동의 주범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에서 로또 같은 최고 수익의 금융 상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체제의 국가든 가장 먼저 취하는 정책은 식량난 해결과 동시에 주거난에 대한 해결이다. 하지만, 주거는 식량난보다 복잡하고 어려워서 어떤 방법을 써도 부작용이 일어난다.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특히나 도시의 집중화는 더더욱 어렵게 만든다. 한때 도시 분산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고도 산업사회와 고생산성 사회가 되면서 오히려 도시 집중은 더 강력해지고 거대해졌다.
제한된 토지에 거주자들이 늘어나면 당연히 지가 폭등이 일어나고 주택가격은 비싸진다. 비싸진 주택가격은 사람들을 더욱 자극하게 되고, 예민해진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 공통이다.
이런 이유로 어느 나라나 주거가격이 올라도 문제지만 떨어져도 문제가 된다. 올라도 선거에서 지지만, 떨어져도 선거에서 진다.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오르면 집 없는 사람들이 선거에서 심판하고, 집값이 떨어지면 집 가진 사람들이 선거에서 지지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주거는 예민한 대상이다. 그 예민함은 집값에 집중되게 만들고 주거 형식이나 내용까지도 좌지우지 한다. 문제는 이런 욕망 때문에 정작 주거의 본질적인 내용들이 무시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작년 원로 건축사 한 분이 초대형 아파트 재건축 단지를 설계하면서 곤란함을 겪었었다. 그분의 말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귓전을 맴돈다.
“일조권이 안 들어도, 무조건 50층으로 해달라고 한다. 하루 종일 그늘에 있을 수도 있다고 했더니, 그들은 상관없다고 한다. 왜냐면 공사 중에 비싸게 팔 생각뿐이기 때문이다. 그 집에 안 살거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영화 서버비콘은 표면적으로 우리와 다른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 같지만,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욕망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돈의 욕망이다. 사실 100%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적절한 절제는 필요하다. 욕망의 순도를 조금만 낮추면 서버비콘의 아름다운 풍경을 느끼고, 이웃의 정겨움을 추억하게 된다. 욕망의 순도를 조금만 낮추면 어떨까?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