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미 준의 바다,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 그리고 아이 엠 페이 2019.10

2023. 1. 5. 09:08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The Sea of Itami Jun, Sketches Of Frank Gehry, and I. M. Pei

 

대학시절 영화를 좋아하던 터라 왜 건축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 다큐는 없는지 궁금했다. 이십 년 전 영화 관련 책을 쓰다가 약간의 아쉬움 때문에 건축사라는 직업이 강조된 영화들을 따로 모아 이야기를 했었다. 영화 속 건축사들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찾아보니, 주인공 직업이 건축사가 상당하다. 뭔가 있어 보이는 직업? 자유로운 시간과 물리적 이동 거리도 다양하니 시나리오상 안성맞춤인 주인공 직업이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다면 건축사라는 직업 명칭이다. 분명 시공사 현장 소장인데 번역은 건축사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경우도 많다. 건축사와 현장 소장은 영어로도 다르고, 건축사(가)는 법적 자격자만 사용하는 호칭 Architect이다. 그래도 대학시절 내가 선택한 전공이 멋지게 나올 때는 쓸데없는 집단의식에 빠져서 기분이 좋았다. 영화에는 여러 직업이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관련 직업인들이 감정적 반응을 하는 것을 보면 비단 건축하는 이들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아무튼 괜한 동질감은 직업으로 건축을 하는 내내 쓸데없이 감정적으로 우호적이 된다. 그런 감정덕분에 건축이나 건축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더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 관련 책을 출판한 덕에 1998년부터 강의하던 학교에서 십여 년 가까이 ‘영화 속 건축’을 테마로 설계 수업을 진행했었다. 영화만큼 공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시선을 이해하기 좋은 학습도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직설적인 공간에 대한 이해 도구이기도 했고, 이야기구조로 드러나는 은유적 공간에 대한 이해 도구이기도 했다. 그렇게 수업하던 중 실제 유명 건축가(사)인 프랭크 게리를 주연으로 찍은 다큐멘터리가 국제적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아마존을 통해 CD를 구입해 보니 감독이 시드니 폴락이다. 가벼운 로맨틱부터 다소 진지한 현실 비판까지 다루는 주제가 폭 넓은 노장 극영화 감독이다. 그런 사람이 건축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니...

 


포장을 뜯자마자 학생들하고 같이 보기도 했다. 시드니 폴락의 친구이기도 한 프랭크 게리가 주연한 다큐멘터리다. 거의 밀착해서 24시간 따라다니듯 촬영한 : 프랭크게리의 스케치, (원제목 : Sketches of Frank Gehry)는 프랭크 게리의 생각과 일상을 들여다 보는 셈이라 그의 건축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완성되는지 흥미로웠다.
기억에 남는 몇몇 장면들 중 프랭크 게리를 세계 건축계에 알린 작품인 LA에 있는 그의 주택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카메라는 게리의 설명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조각조각 이어진 철물점 이미지의 주택은 하늘과 빛, 그리고 클로즈업한 부분들을 보여준다. 갑자기 집에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건축하는 이들과 달리 영화하는 이들의 카메라 앵글은 좀 더 이야기 중심적이고, 뭔가 상징과 은유를 담는 것에 능숙하다. 확실히 카메라 앵글이나 시선의 차이가 많다. 대체로 건축 잡지에 나오는 또는 건축하는 이들이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 아름다운 대상에 집중하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매력적인 연예인들의 화보 사진 같이 최대한 건축의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드러낸다. 디테일을 보여주는 것 역시 그렇다. 그러다 보니 대체로 비례나 구성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뭔가 인간적인 느낌은 거의 없다.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는 진지하게 그의 건축을 설명하기 보다는 그의 일상을 추적하면서 일기 쓰는 것처럼 시나리오를 만든 듯하다. 게리의 다큐가 일상의 현재를 다루듯이 했다면 이타미 준의 바다는 조금 다르다.

다큐의 시작은 제주도의 독특한 미술관으로부터 시작한다. 오래전 이 미술관을 처음 보고 너무 신기했다. 통상의 미술관이라고 하면 그림이나 조각, 공예 등 대상물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던가?
그런데 작디작은 제주도의 미술관은 덩그러니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을 전시하고, 돌을 전시하고, 물을 전시한다. 독특한 개념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자연이고, 건축의 감성적 요소들 아닌가? 이타미 준이 전시한 것은 시적 감성을 전시한 것 같았다. 바람소리가 들리고 영화의 인트로가 시작되면서 그의 작품 몇 개와 개인사적 이야기로 진행이 된다. 개인적으로 이타미 준을 처음 안 것은 작품이 먼저였다. 1984년 서울 대학로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지나가다 독특한 건물이 완성되는 것을 보았다. 김석철 선생이 설계한 두손 갤러리 였다.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던 것이 등하교길에 있는 김수근 선생의 미술회관(지금은 아르코 미술관)과 두손 갤러리 등은 입시공부로 머리 아픈 내게는 탈출구였고 오아시스였다. 하교길에 이런 미술관을 종종 들렀다. 두손 갤러리 지하에는 클로즈드(Closed)라는 카페가 있었고, 지하 두 개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블랙, 다른 하나는 화이트. 이번 다큐를 보니 아마도 80년대 이타미준은 흑백에 빠져 있는 무채색의 시기였던 것 같다. 아주 나중에 건축잡지에 나온 그의 스케치를 보면서 일본의 극단적 디테일주의자인 다카마츠 신과 중첩됐다. 다만 두 사람의 선은 매우 다르다. 나는 다카마츠 신을 망가적 로봇디테일 주의자로 보는데, 이타미 준은 전혀 다른 굵직굵직한 덩어리들과 재료의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그가 왜 이타미 준이라는 일본식 이름의 예명을 썼는지 처음 알았다. 사실 공항이름에서 가져왔다는 대목에서 뭔가 그의 내면에 있는 유목적 정체성의 혼란을 알 것도 같았다. 그런 유목성은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시간 넘게 상영되는 이타미 준의 이야기는 단지 건축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배타적 국가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이주자의 삶. 직업에 대한 애정과 애착, 그리고 그것을 자녀에게 잇고 싶어 하는 마음. 일종의 집착일 수 도 있다. 하지만 이 다큐의 전체적인 인간적 흐름은 동일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 되고 이해됐다. 한국인으로 일본에 귀화하지 않고 거주하는 외국에서의 삶은 겪어보지 않았지만, 하지 않아도 될 치열한 고민과 갈등 속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나고 자라서 모든 추억과 기억이 일본에 있는 이에게 무작정 왜 한국어를 못 하냐,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느냐라는 질문은 일차원적인 것 같다.
그런 그의 갈등은 아마도 건축에서 차분해지고, 마음의 평정을 갖는 것 같았다. 초기작에 비해서 점차 후기로 들어가면서 점점 선은 더 단순해지고, 오히려 감성적으로는 강렬해진다. 그의 부모님 집에서 보듯이 초기 작품은 과잉 의욕이 드러나 보이지만, 그의 빛과 질감에 대해 집착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감성적 느낌들은 마치 시어처럼 구사되어 전체 건축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타미 준 역시 현대 수많은 건축사들의 도전처럼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지만, 흔히 우리가 아는 노출 콘크리트와 뭔가 좀 다르다. 안도다다오의 노출이 묘한 긴장감과 반짝이는 질감으로 마무리 한다면 이타미 준의 노출은 좀 더 거칠고 인간적이다.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구사하는 노출 콘크리트의 약간 건조한 구성과도 다르다. 맹숭맹숭한 영국 음식처럼 싱거운 느낌인 반면에 이타미 준의 경우는 좀 더 감정적 느낌을 전달한다. 아주 미묘한 차이지만, 더 유머있고, 의도적 거침이 있는 것 같은 그런 감성적 디테일을 보여준다.
이타미 준의 바다를 보고 얼마 안 있어서 EBS 국제 다큐 영화제 소식을 듣고, 프로그램 검색에 들어갔다. 안도 다다오의 다큐도 이 프로그램에서 봤었는데, 죽 훑어보니 건축 섹션이 있었고, 여러 이야기들이 나온다. 좋아하는 렌조 피아노도 있고, 노만 포스터도 있다. 그중 얼마 전 102세로 돌아가신 아이 엠 페이에 대한 다큐: 아이 엠 페이의 건축세계 (원제목:  I.M. PEI: Building China Modern.)를 발견하고 사무실에 앉아서 한 시간 남짓 보았다.
이 다큐를 보면서 깜작 놀란 것이 90살이 다 된 노장의 에너지였다. 흔히들 건축은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증가할수록 좋아 진다고 하는데, 일찍이 성공한 아이 엠 페이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90이 넘어서도 여전한 현역이고 건축에 대한 밀착된 감정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 다큐는 미국 PBS의 미국의 거장 시리즈 중 하나로 만들어졌다. 다큐의 중심에 나온 건물은 소주의 부호 출신으로 수백 년을 살아온 자신의 어릴 적 고향에 건축된 박물관이다. 2002년에 시작되어 2006년에 건축된 소주(蘇州) 박물관의 진행 과정을 다큐로 담았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 다큐를 제작한 앤 메이크피스 역시 노장이라는 점.(1947년 생으로 2010년 상영했으니, 다큐 제작 시점을 보면 63살에 만든 셈이다.) 젊은 노익장은 정말 노익장인 아이 엠 페이의 작업 루트를 따라가면서 촬영한 셈인데, 아이 같은 아이 엠 페이의 미소가 한 몫 단단히 한다. 대부분의 건축사들의 표정이 다소 근엄하다 못해 화난 듯 해 보이는데, 아이 엠 페이의 해맑은 미소같은 표정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사실 아이 엠 페이는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로 미니멀리스트 건축사로 대표적 인물이다. 현대 건축의 중요한 시절을 장식한 인물로 그의 작품들을 보면 대담한 형태의 자유로운 표현이 놀랍다. 사선이나 원형은 건축에서 사용하기 무척 어려운 도형인데, 아이 엠 페이는 이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이 다큐에 나오는 소주 박물관만 하더라도 사선과 사각형, 원형으로 구사하는 매스들의 집합체이다. 아이 엠 페이의 탁월한 감각은 루브르 피라미드에서 새삼 읽혔지만, 소주 박물관을 만들어내는 기하학의 구성에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단순한 기하학으로도 충분히 소주의 건축적 정체성을 훌륭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비슷한 기하학으로 일본에 건축한 폴라 미술관과 비교해 볼 수 있는데, 아이 엠 페이의 뛰어남은 기초 도형인 삼각형과 사각형만으로 각각의 국가적 건축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폴라 미술관은 누가 봐도 일본 전통 건축을 현대화 한 것 같고, 소주 박물관은 중국 소주 건축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읽혀진다. 이런 것이 대가의 능력일까?

 


그런데 아이 엠 페이의 건축세계를 보는 동안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갔다. 그것은 건축사를 대하는 중국 공산당 간부인 소주 시장 등의 태도다. 한마디로 영접하는 모습에 감동을 넘어서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한국 건축사가 아이 엠 페이만큼 성공한 사례도 없고, 세계 건축계에 작품세계를 인정받는 경우가 거의 없긴 하지만 이 장면만큼은 정말 부러웠다. 그것은 창작하는 이들에 대한 존중과 존경의 의미다. 한마디로 업자 취급이 아니다.
이런 생각은 이 글의 맨 처음 언급한 프랭크 게리의 디즈니 콘서트 홀에 초대 받아 무대에 선 장면과 중첩된다. 우리는 그림이나 음악을 연주하는 창작가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건축사들은 어떤가? 하나의 훌륭한 건축을 창작하는 이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커녕 업자로 취급하는 수준 저열함을 가지고 있다.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그냥 계약에 의해서 수주하는 업자일 뿐이다. 개인적 경험에서도 굳이 오라고 해서 찾아간 개점식에 이름 한번 부르지 않고, 멀찌감치 바라본 수치심이 떠올랐다. 시공사 대표가 한마디 하고, 마을 대표가 한마디 하는데 뙤약볕 밑에서 느껴지는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원래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건축사를 존중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창작한 사람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이타미 준의 바다를 보면서 그 역시 한국에서 작업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알게 한다. 일본에서는 이방인이라 힘들었을 것이고, 한국에서는 또 다른 이방인과 건축사에 대한 태도로... 하지만, 마지막 제주도 건축 후원자를 만나서 펼쳐진 그의 에너지와 결과물에서 행복한 말년이었을 것 같았다. 성공한 건축사들의 다큐를 보면서 그들의 치열함이나 건축적 성과보다, 더 멋지고 부러운 점이 이 부분이었다면 조금 거시기 한 걸까?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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